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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 어디라고 그에 깃든 전설과 이야기가 없겠냐마는 강원도 태백시 구문소 일대는 숨은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계절과 바람에 따라, 그날그날의 햇빛과 별빛에 따라 달리 보이는 이곳은 나의 단골 걷기 코스(관련기사 : 하늘도 세평, 꽃밭도 세 평... 이곳이 어디요?)였지만, 입때껏 숨어 있는 이야기는 모르고 지나쳤다.

이곳을 다시 찾은 때는 지난 15일, SBS <물은 생명이다> 촬영 때문이었다. 구문소 현장에는 이 지역 역사문화전문가인 신동일 태백시 역사문화해설가가 함께 했다.

조선 영조시대 실학자 여암 신경준 선생은 '산경표'(山經表·조선의 산맥 체계를 도표로 정리한 책)에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 했다. 이는 '산이 물을 나눈다'는 의미로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는 말도 같이 사용된다. 이는 지극한 당연한 보편적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구문소만은 예외다. 물이 산을 건너는, 정확히 말하면 물이 석회암 바위를 뚫어 버린 세계적으로 드문 풍경을 만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천연기념물 417로 지정돼 있다.

억겁의 세월 동안 물이 산을 뚫고 지나는 곳인 구문소는 예로부터 신령한 기운이 모인 곳으로 알려졌다.
▲ 태백시 구문소 억겁의 세월 동안 물이 산을 뚫고 지나는 곳인 구문소는 예로부터 신령한 기운이 모인 곳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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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시 동점동 산 6-3번지 구문소(求門沼)는 태백 팔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신령스러운 풍경을 자랑한다.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연못과 용담연못 등에서 나온 물은 황지천과 합쳐져 구문소에 이르러 기암괴석 사이로 급경사를 만나 천둥소리를 내며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치 세상 만물을 다 빨아드릴 기세로 몰아친다. 그러나 반대편에 이르러서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조용한 호수가 된다.

구문소 전설, 많기도 해라

세상을 온통 빨아들일 듯 거세게 몰아치던 물살은 구문소 뒷편에 가서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조용한 호수가 됐다. 사진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도로가 일제 강점기 뚫은 도로다.
▲ 구문소 하류 세상을 온통 빨아들일 듯 거세게 몰아치던 물살은 구문소 뒷편에 가서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조용한 호수가 됐다. 사진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도로가 일제 강점기 뚫은 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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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문소는 물이 구멍을 내고 소(작은 연못)을 이뤘다는 의미로 '구멍소' '구무소'라 불렸다. 다른 말로는 '뚜루네'라고 불렸고, 한자로는 '뚫을 천'을 써서 천천(穿川)이라 했다. 지금도 구문소 아래쪽 석벽에는 '천천'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신동일 선생은 구문소 일대의 지형이 5억5000만 년 전에 형성됐고, 물이 산을 뚫고 흐르는 것은 3억~1억5000만 년 전이라고 한다.

이러한 곳에 당연히 전설이 없을 리 없다. 구문소 폭포가 떨어져 소가 되는 바로 인근 바위에는 '오복동천자개문'(五福洞天子開門)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신동일 선생은 정감록(鄭鑑錄·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온 예언서)에 나온 말이라 한다. 정감록에는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길이 막혀 갈 수 없는 곳에 석문이 나오는데, 이 문은 자시(子時·오후 11시~익일 오전 1시)에 열려 축시(丑時 오전 1시~ 오전 3시)에 문이 닫힌다고 한다. 자시에 안으로 들어가면 병이 없고, 삼재가 없는 오복동이라는 곳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정감록에 기록된 오복동천자개문은 구문소 위쪽을 유토피아로 그리고 있다. 사진 오른쪽에 조그마한 동굴이 있었고, 예전에는 바위틈에 새들이 많아, 알을 먹으로 구렁이들이 많이 올랐다고 한다.
▲ 오복동천자개문 정감록에 기록된 오복동천자개문은 구문소 위쪽을 유토피아로 그리고 있다. 사진 오른쪽에 조그마한 동굴이 있었고, 예전에는 바위틈에 새들이 많아, 알을 먹으로 구렁이들이 많이 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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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동은 '무릉도원'이자 '유토피아'인 샘이다. 신동일 선생은 이를 역사, 문화적으로 해석한다. 그는 "백두산에 하늘의 연못 천지(天池)가 있다면, 태백에는 땅의 연못 황지(潢池)가 있다"며 "이는 태백지역이 음양의 이치와 맞물리고 있다는 것"이라 말했다. 이어 "구문소 위쪽에는 신성불가침 지역인 소도와 천제단이 있었던 만큼 신령스러운 지역"이라면서 "현재도 경상남북도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내려보내는 곳"이라고 오복동의 의미를 풀어줬다.

구문소 생성과 관련된 전설도 있다. 구문소 인근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용을 만날 수 있는데, 첫 번째 전설이 바로 백룡과 청룡에 관한 전설이다. 황지천에 살고 있는 백룡은 석벽을 사이에 두고 철암천의 청룡과 낙동강의 지배권을 두고 매일같이 혈투를 벌였는데, 백룡이 꾀를 내 굴을 파서 청룡을 제압했다고 한다. 이때 생긴 굴이 바로 구문소란다.

이어 대홍수와 관련된 전설도 있다. 어느 날 홍수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커다란 나무가 떠내려 와 석벽을 때리니 구멍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고, 중국 하나라 우왕(중국 하나라 시조라 칭해지는 전설 속의 인물로서 물을 다스렸다고 한다)이 한 걸음에 달려와 칼로 석벽을 찔러 구멍이 생겼다는 전설도 있다. 우왕 전설은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석굴로 이어진다.

구문소 옆에서 31번 국도는 두 갈래로 나뉜다. 그중 석벽을 뚫은 도로는 1937년 일제 강점기 때 만든 것으로, 일제는 석벽에다 '우혈목이'(禹穴牧裏)라고 새겼다. 신동일 선생은 "일제가 하나라 우왕이 대홍수 때 구멍을 내던 전설과 같은 의미로 길을 만들었다는 뜻"이라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는 일제가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에 쇠말뚝을 박는 것과 비슷한 한 행위"라고 덧붙였다.

구문소 주변의 석벽은 마치 병풍처럼 생겼다고 해서 '뼝대바위'라 불렸다. 이 뼝대바위는 땅의 기운이 충만한 황지를 감싸는 형국인데, 일제가 이를 알고 황지의 기운을 고의적으로 빼내기 위해 석벽을 뚫었다는, 이른바 '혈지름목'이라 말한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태백 황지를 둘러싸고 있는 뼝대바위에 도로를 낸 일제는 하나라 우왕의 전설을 빌려 의미를 포장했다. 그러나 이는 황지의 기운을 빼는 혈지름목이라 한다.
▲ 우혈목이 일제강점기인 1937년 태백 황지를 둘러싸고 있는 뼝대바위에 도로를 낸 일제는 하나라 우왕의 전설을 빌려 의미를 포장했다. 그러나 이는 황지의 기운을 빼는 혈지름목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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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외한으로서 혈의 흐름이야 알 수가 없지만, 이곳 주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믿음의 대상이다. 1970~80년대 태백에 광산이 번성할 때, 외지인들이 60~70%에 달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구문소로 들어왔다가 돈을 벌어 다시 이사 갈 때는 구문소를 피해 멀리 돌아갔다고 한다. 나갈 때도 구문소로 나가면 돈이 녹아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 믿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실제 구문소의 뼝대바위는 위아래의 온도 차이를 만들고 있다. 신동일 선생은 "구문소 아래쪽에는 사과 농사를 짓고 있지만, 위쪽은 안 된다"며 "2~3도 정도 차이가 난다"고 전했다.

1970년대까지 기우제 지내던 구문소는 노천 자연사 박물관

구문소에는 물줄기가 세 갈래로 나뉘어 떨어지는 폭포가 있다. 이를 여기 사람들은 '삼형제 폭포'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낙동강 발원지의 한 곳인 용담과 연계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어느 날 하반신에 용 비늘이 돋기 시작한 어머니는 삼형제에게 꿈속에서 나타난 신령님이 지목한 태백산 아래 연못에 자신을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한다. 하늘에서 용마가 내려와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모시고 찾아온 곳이 바로 지금의 태백시 소도동 청원사 앞에 있는 용담이다.

낙동강 발원지 중 하나인 용담과 연관된 전설이 깃들어 있다.
▲ 구문소 삼형제 폭포 낙동강 발원지 중 하나인 용담과 연관된 전설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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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문소에서는 1970년대까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구문소 큰 폭포 바로 앞쪽에는 가로세로 2미터 쯤 되는 제법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기우제터다. 옛사람들은 기우제터를 신령함이 응축된 곳으로 잡았다. 기우제는 1년 내내 물량이 줄지 않는 맞은 편 샘물을 떠서 지내는데, 그 방식이 조금은 괴이하다.

하늘에서 신령한 기운이 깃든 이곳을 항상 보고 있다는 점에서, 이곳을 더럽히면 하늘에서 반드시 더러움을 씻어낼 비를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우제 뒤에는 항상 짐승의 피를 뿌렸다고 한다. 가뭄에 의한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이리 했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대목이다.

구문소 일대는 약 5억5000만 년 전인 고생대 캄브리아기의 지각변동으로 약 45도가량 융기됐다. 그 때문에 그 시대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신동일 선생은 이곳이 얕은 바닷가였다고 말한다. 그 흔적이 구문서 전체에 산재해 있다. 첫 번째 증거가 바로 '소금흔'이다. 파도가 잔잔한 지역에 소금도 같이 퇴적이 되는데, 나중에 소금은 빠져나가고 방해석이 자리를 잡아 네모난 모양의 결정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구문소 인근에서 고생대 흔적이 지천에 널려 있다. 좌측 삼엽충 화석, 우측 완족류 화석, 아래 건혈 흔적 화석
▲ 구문소 고생대 흔적 구문소 인근에서 고생대 흔적이 지천에 널려 있다. 좌측 삼엽충 화석, 우측 완족류 화석, 아래 건혈 흔적 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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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생물이 기어 다녔던 게 화석이 된 생흔화석, 물결 모양의 화석, 가뭄에 땅이 사방으로 갈라진 것이 그대로 화석이 된 건혈 흔적 화석, 물방울 모양의 새눈 구조 화석 등 고생대 지질 및 기후변화 연구의 귀중한 화석들이 널려 있다. 이곳에는 캄브리아기를 대표하는 삼엽충 화석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삼엽충과 함께 고생대 가장 크게 번성했던 완족류의 화석도 만날 수 있다. 신동일 선생은 "구문소를 연구해 박사만 6~7명이 배출됐다"며 이곳의 학술적 가치를 강조했다.

한편에서는 봄을 맞아 새로운 생명들의 꿈틀거림도 확인할 수 있다. 구문소 주변 바위에 물이 고여 있는 곳마다 도롱뇽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알집을 무수히 벌여놨다. 바로 옆에서는 검은 콩알만 한 올챙이들이 나뭇잎 밑으로 숨어들고, 배에 붉은 무늬를 새긴 무당개구리들은 짝짓기에 여념이 없다. 구문소 바위틈에서는 돌단풍들이 돋아나 바람을 즐기고 있다. 구문소는 과거의 생명의 흔적과 현재의 생명이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탄광 번성할 때, 세상은 온통 검은색

구문소 인근 물이 고인 바위틈에서 도롱뇽들의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흔적들을 남겼다. 구문소는 고생대 생명의 흔적과 현재 시대 생물들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 도롱뇽 알 구문소 인근 물이 고인 바위틈에서 도롱뇽들의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흔적들을 남겼다. 구문소는 고생대 생명의 흔적과 현재 시대 생물들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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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구문소 인근에서 천연기념물 330호이자 멸종위기종 1급으로 지정된 수달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곳에서 수달이 발견된 것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문소 아래 퉁점마을에 8대째 살아왔다는 정춘교(71) 할아버지는 "예전에는 구문소 인근에서 열목어와 산천어가 넘쳐났어, 팔뚝만한 뱀장어도 한소쿠리로 잡았었지"라고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구문소 안쪽 동굴 벽에는 새들이 많았다. 새들이 알을 낳는 시기가 되면, 구렁이들이 벽을 타고 가다 물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랬던 구문소 물길은 태백에 탄광이 번성하면서 1990년 대 초반까지 시꺼먼 색을 보였다. 물고기가 사라지자 새들도 종적을 감췄다. 정춘교 할아버지의 아들인 정의탁(52)씨는 "강에서 수영하고 나면 땀구멍에 석탄 찌꺼기가 끼어 새까매졌다"고 말했다. 그 시절 아이들은 강물도, 사람도 검게 그려서, 크레파스 중에 유독 검은 색만 빨리 닳았다고 한다. 이랬던 곳이기에 구문소 주변에서 수달이 발견된 것에 의미를 둘 수밖에 없다.

구문소 인근 물이 고인 곳에서 무당개구리가 짝짓기를 하고 있다.
▲ 무당개구리의 짝짓기 구문소 인근 물이 고인 곳에서 무당개구리가 짝짓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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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문소 주변은 문화적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많다. 구문소 안쪽에는 조그마한 동굴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거기서 '사시랭이 놀이'를 했다고 한다. 사시랭이 놀이는 엽전에 숫자를 써서 놀던 놀이로서 숫자에 맞는 노래를 했다는 게 특징이다. 왜적이 침입했을 때 대여섯 사람들이 모여 목청껏 노래해 사람들이 많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 시작됐다는 것이 정춘교 할아버지의 얘기다. 이후 이 노래는 아리랑처럼 구전되면서, 정형화된 틀이 아닌 새로운 이야기가 계속 유입됐다. 사시랭이 놀이에서 불린 노래가 새로운 이야기를 담듯이 구문소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참고로 구문소에 대해서는 태백시 문화관광과로 역사문화해설을 신청하면 좋은 내용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이틀 동안 태백 구문소 일대를 설명해 주신 신동일 선생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신동일 선생과 같이 지역의 역사·문화·자연사를 꿰뚫고 있는 이를 만나는 것도 복이 아닌가 싶다.

낙동강 발원지 중 하나인 용담에 세워진 어머니 상은 하반신이 용비늘로 덮여있다. 합장을 한 채 물끄러미 속 깊은 물 속을 처다보고 모습이 왠지 애잔하다.
▲ 청원사 용담의 어머니 상 낙동강 발원지 중 하나인 용담에 세워진 어머니 상은 하반신이 용비늘로 덮여있다. 합장을 한 채 물끄러미 속 깊은 물 속을 처다보고 모습이 왠지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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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 블러그에도 올립니다.



태그:#구문소, #낙동강, #자연사 박물관, #화석, #용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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