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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박상규의 부음을 들은 하루는 길었다. 부음은 자막으로만 봐도 심장박동에 가속이 붙는다. 최근에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상주가 되면서 더 강해진 증상이다.

아버님을 떠나보내면서 떠난 아버님의 자리만큼이나 뚜렷하게 인식됐던 건 상주가 된 우리 자식들 나이였다. 어느새 부모가 떠나고 세상에 안 계신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 나이가 됐다는 것! 이런저런 문상을 다니면서도 못 느꼈던 일이었다. 그런데 직접 부고를 띄우는 입장이 되고 보니 형제들 하나하나 설핏하게 저물어가는 나이에 서 있음이 슬픔의 파고를 더 올렸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나이를 산다. 세상의 시간은 현재 자기 나이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건 자기 나이에 맞춰 세상을 본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몰랐거나 관심 없었던 일을 어느 순간 알게 되고 그 일이 가장 갈급해진다면 그건 그 나이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부음에 무관할 수가 없다. 어느 사이 내가 누군가의 부음에 온 신경에 불이 켜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얼마 전 TV에서 박상규의 투병생활을 다룬 다큐를 보았다. 여러 장면 중 가장 나의 깊은 시선을 끌어낸 것은 지방의 작은 무대에서 노래하던 그의 모습이었다. 매니저 손을 잡고 무대까지 올라간 그는 매니저가 세워준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서 '정말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그때 나는 어린아이처럼 차렷 자세로 노래하는 그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건 숨이 가빠 어긋나는 박자 때문도 아니었고 가사를 흐리게 하는 어눌한 발음 때문도 아니었다. 불편한 한쪽 수족 때문에 친근한 제스처를 볼 수 없다는 서운함 때문도 물론 아니었다. 프로 가수로서의 단정한 양복 차림 아래 보이던 그가 신고 있는 운동화 때문이었다. 취재진도 그 모습이 생경했을까? 노래를 끝내고 다시 매니저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왔을 때 그 이유를 물었다. '구두를 신으면 넘어질 까봐 그래. 내가 잘 못 걷잖아.' 환하게 웃던 그의 대답. 너무 맑은 미소여서 나는 한참을 먹먹해진 가슴으로 서성였다.

프로그램 말미에 그는 뇌졸중이 재발되어 다시 입원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그는 취재를 끝내고 돌아가는 취재진들을 천근만큼이나 무거운 팔을 들어 웃으며 배웅했다. 쾌유를 바라는 취재진의 인사에 "암, 그래야지. 꼭 나아서 또 노래해야지. 아직도 내 노래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라며 긍정의 여유도 잃지 않았다. 이미 제자리에서 한참 벗어난 발음이었지만 삶에 대한 주권을 잃지 않은 그의 의지가 그대로 읽혔다.

오랜 중병으로 모습과 목소리는 쇠락했다 해도 아름답게 저물어가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그걸 보여줬다. 열정은 필 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저물어가는 시간에도, 그래서 마지막 지는 순간에도 열정은 덜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바람 따라 떠난 걸음 돌고 돌아
어느새 반평생 세월은 흘러
차디 찬 술잔 위에 스치는 지난날도
한자리 꿈일 텐데 차마 못 잊어
미워도 했소 원망도 했소 떠도는 가슴앓이를
아... 이것이 역마라고 
한숨을 짓던 어머니

물결 따라 흔들리며 돌고 돌아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는지
휘영청 둥근 달에 어리는 고운님도
어차피 남남인데 정은 왜 들어
미워도 했소 원망도 했소 떠도는 가슴앓이를
아... 이것이 역마라고
한숨을 짓던 어머니

이제 그가 떠났다. "바람 따라 떠난 걸음 돌고 돌아/ 물결 따라 흔들리며 돌고 돌아/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의 노래 <역마>처럼 삶이란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것! 생명을 받는 순간 우리가 지나가는 시간과 공간은 모두 역마가 된다. 태어나고 자란다. 그러다 "어느새 반평생 세월은 흘러" "스치는 지난날"이 "한자리 꿈"처럼 아득한 시간이며 찰나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저물고, 저물어 사라진다. 꽃이 지지 않으면 필 일도 없듯이 삶도 마찬가지다. 저물 일이 없는데 어찌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름답게 저물 일이다.
치열하게 저물 일이다.
반백이 된 꿈이라 해도 온몸으로 끌어안고 저물 일이다.


태그:#서석화, #박상규, #가수, #역마,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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