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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오른 박근혜 "물러설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4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정부조직개정안 처리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 대국민담화를 내자, <오마이뉴스>가 관련 기사에 단 제목입니다. <한겨레> 인터넷판은 <박대통령 화난듯....부르르 시종일관 불만 드러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고 그렇게 홍보하고 취임한 지 열흘이 다 되었지만 국무총리 한 명 임명하고 다른 부처 장관은 '개점휴업'입니다. 그리고 정부조직법을 두고 박 대통령은 화가 난 표정으로 "새 정부 출범 일주일이 되도록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해 국정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며 "이것은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라며 격문에 가까운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담화문이 아닌 격문...민주당 "파시즘 체제 어떻게 등장했나"

특히 그는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미래를 위해 이 문제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라며 미래창조과학부 업무관련 정부조직법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야당 요구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거의 '협박' 수준입니다. 정성호 민주당 수석대변인이 박 대통령 담화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한 이유입니다.

"과거에 파시즘 체제가 어떻게 등장했는지 봐라. 대개 국민의 대의기관인 의회를 무시하고 '의회를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이라며 국민과 직접 소통해 의회를 무력화시킨다. 많은 독재자들이 그런 이유로 늘 국민과 직접 소통해왔다."

'독기오른 듯'한 박 대통령 모습을 보면서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각납니다. 박 전 대통령은 비록 군사반란으로 집권했지만 집권 초에는 인재를 두루썼습니다. 독재자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도 그가 집권초에는 유능하고 자신에게 직언하는 인재를 등용한 것만은 인정합니다. 한 예가 박정희 정권 첫 총리인 최두선입니다. 한홍구 성공회대교수(교양학부)는 지난 2일 <한겨레>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30)박정희의 용인술, 박근혜의 용인술>제목 글에서 박정희와 최두선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독재자' 박정희, 눈엣가시였던 <동아>사장을 초대 총리에

1963년 대통령 선거 당시 동아일보와 박정희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선거 막바지에 동아일보가 박정희의 '빨갱이' 전력과 여순사건으로 박정희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실을 폭로하는 호외를 뿌렸기 때문이었다. 선거 사흘 전 동아일보 정경부장과 인터뷰를 하던 박정희는 부르르 떨다가 재떨이를 집어 던지고 나갈 만큼 동아일보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 박정희가 바로 몇 달 전까지 햇수로 17년간이나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최두선을 직접 집으로 찾아가 설득하여 총리로 모신 것이다.

최두선 역시 1963년 12월 국무총리 일성으로 "공화당원으로 입각한 게 아니다"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공화당을 겨냥한 것이지만, 속으로는 이름만 총리로 살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인 것입니다. 비록 대일 굴욕외교 반대 따위로 여섯달만에 물러났지만 박정희는 1971년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불렀습니다.

최두선은 그해 8월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해 9월 열린 제1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에서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과 북측 '판문각' 사이 '직통전화'를 개설했습니다. 이 직통전화는 1974년 7·4남북공동성명처럼 남북이 정치, 군사 등 각종 당국간 문제 발생했을 때 상호 연락 채널이었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자신의 좌익경력을 문제삼아 최두선을 내쳤다면, 1974년 7·4남북공동성명은 한 뒤에나 이뤄졌을 수도 있습니다.

박정희 몰락은 초심 망각하고 차지철 같은 인사 때문

비록 군사반란으로 집권했지만 인재를 등용하는 초심을 지키고, 3선개헌과 유신쿠데타를 자행하지 않았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유신쿠데타 이후, 초심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차지철 같은 이를 경호실장에 임명함으로써 몰락을 자초했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아버지 집권초기보다는 말기에 더 가까운 행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과 일할 사람들로 '병역특혜와 탈세, 부동산투기, 위장전입'도 모자라 '논문표절, 전관예우' 의혹 관련자들을 뽑았습니다. 박지원 전 민주당 원내대표를 이를 두고 "4+2인사"라고 비꼬았습니다. 그리고 36대, 37대, 38대 육군참모총장을 국정원장-국가안보실장-경호실장에 내정해 '군부시대부활'이라는 비판마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 반성과 책임은 없고, 오히려 야당을 향해 급박한 것입니다. 박 대통령은 '지역감정 바이블'인 허태열 전 새누리당 의원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뽑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일성은 "비서실장은 귀는 있지만 입이 없다"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하라는 것만, 지시하는 것만 하겠다는 발상입니다. 충신은 말 잘듣 사람이 아니라 쓴소리와 직언을 하는 사람입니다.

"입 없다"는 허태열, '직언'한 김정렴 될 수 있을까

대통령비서실장이 대통령 지시만 따르겠다는 것은 참모 자격이 없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망치는 일입니다. 하지만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달랐습니다. 가장 오랫동안 대통령 비서실장(1969~1978년, 9년3개월)을 지낸 김정렴 전 비서실장이 그렇습니다.

박정희는 1969년 김정렴에게 특별보좌관 구성을 지시하면서 "가급적 대가(大家)보다는 연구 성과를 올리고 있는 젊은 교수 중에서 병역을 마친 사람, 대학, 출신 안배도 고려해 인선을 해보라"고 했다고 합니다(2013.02.02 <동아일보> 유신말 '차지철 장막'에 갇혀 국민 탓하며 직언에 귀 막아).

김정렴은 두 달 동안이나 온 힘을 다해 외교·국방·경제·사회·교육 등 각 분야 최고 인재를 뽑았습니다. 이렇게 뽑은 특보들은 자신의 전문분야와 언론이 전하는 여론을 박정희에게 건의하고, '넥타이 풀고' 토론을 했습니다. 한홍구 교수는 <한겨레> 글에서 김정렴 실장 관련 일화를 들고 있는 데 공교롭게도 박근혜 대통령이 연관된 내용입니다.

박정희의 비서실장 김정렴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시절 자신의 회고록에 남긴 일화는 충격적이다. 어느 날 '큰따님'께서 자신의 집무실로 찾아와 몇몇 기업의 이름을 거론하며 최태민의 구국선교단을 지원하고 있는 기업이니 현안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김정렴은 박정희에게 바로 달려가 '큰따님'이 자금이 필요하면 대통령의 정치자금을 관리해온 자신이 자금을 추가로 마련할 터이니 대통령이 '큰따님'에게 직접 지원하고 '큰따님'이 금전 문제에 다시는 개입하는 일이 없도록 원천봉쇄해 달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이런 개입은 사실 법이 제대로 서 있다면 형사처벌을 받아 마땅한 사안이었다.

대통령 딸이라도 문제가 있다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박 대통령도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 비서실장이 어떤 자리인지도 알 것입니다. 하지만 "비서는 입이 없다"고 말한 허태열 실장이 박 대통령 동생인 박지만씨 가족에게 이같은 문제가 일어났을 때 '안 됩니다'라는 직언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어제 박 대통령의 담화는 국회와 야당을 무시한 것입니다. 청와대 안에서 담화를 두고 논의를 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대통령이 격문에 가까운 담화문이 아니라 야당 요구는 들어주도록 설득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박 대통령은 야당을 급박하는 담화를 했습니다. 직언하는 참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윤창중, 김성진이 될 수 있을까?

박 대통령은 '막말달인'이면서 자칭 '1인기자, 단독기자'인 윤창중 전 인수대변인을 청와대 대변인으로 뽑았습니다. 그가 남긴 어록은 언급 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막말이었습니다.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 입'으로 대통령 의중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하지만 윤 대변인은 '앵무새'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는 임방현, 윤주영, 김성진 같은 대변인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 김성진 대변인은 1979년 10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이 총탄에 맞아 서거했다"는 소식을 국민에게 알린 사람으로, 박 전 대통령 의중을 국민에게 잘 알려 '박 대통령 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성진은 이후 박정희를 '독재자', '반 민주주의자', '자주·자립·자위·자강·자존주의자'로 평가했었습니다.

앵무새처럼 대통령 말만 전하는 윤창중 대변인이 김성진 대변인같은 지략과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남재준이 이후락을 대신할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때 '군 문민화'에 반대했던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을 국정원장에 내정했습니다. 남 내정자는 육참총장 때는 2004년 고려 무신 정권 계기가 된 '정중부의 난' 발언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물론 그는 발언을 부인했지만,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는 "민주정부 10년 동안 국정원의 본래 기능인 대북 정보수집과 국내방첩 분야의 약화를 초래했다. 대공 기능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말을 수차례 했습니다. 그가 국정원장에 임명되면 대북강경 노선으로 치닫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보내 김일성과 담판지어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입니다. 7·4 남북공동성명 배경은 1968년 1.21 청와대 침투사건과 그해 울진삼척 등지에 무장간첩 침투 사건 따위로 남북간 충돌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의 핵실험과 로켓발사로 한반도가 위기로 치닫는 2013년보다 당시가 더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후락을 보냈고, 그는 남북공동성명을 성공시켰습니다. 그해 10월 유신쿠데타를 위한 정치전략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이후 모든 남북사이 협정이나, 공동성명은 7·4공동성명이 뿌리입니다.

과연 남재준에게 이후락 같은 지략이 있을까요?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은 매우 큽니다. 제2한강 기적과 제2새마을운동을 입에 올리고, 박정희식 통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심히 우려스러운 것은 이 모든 것이 유신쿠데타 이후 박정희 모습과 너무 닮았다는 점입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박정희 몰락은 유신쿠데타와 집권초 인사 등용 정책을 저버리고 '맹종'하는 이들을 뽑았기 때문입니다. 박 대통령 인사가 만사가 아니라 망사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참조-물론 이후락과 김정렴 등이 박정희 독재정권에 일조하고, 엄청난 정치자금에 연루되고, 특히 이후락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킨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태그:#박근혜, #박정희, #김정렴, #이후락, #허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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