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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다.

22일 토4시 글쓰기모임. 6시 작은책 송년회. 좌절하지 마시고 또 희망을 일구어 갑시다."

월간 <작은책> 편집장의 문자를 받은 날은 12월 20일 대선 다음 날. 별로 답장을 보낼 기분이 아니었다. '기분도 안 좋은데 송년회는 가서 뭐 하나.' 그렇다고 안 가겠다. 답 문자를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겠다고 냉큼 답 문자를 보낼 기분은 또 아니고. 그날, 남편은 두 번이나 전화를 해서 안 좋은 내 기분을 위로해 주었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이번에 문 후보가 됐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을 거야. 국회는 새누리당이 다 잡고 있는데 뭘 할 수 있었겠어. 일본에서 민주당이 참패한걸 봐. 5년 뒤 우리도 그 꼴 났을지도 몰라."

남편의 말을 들으니 틀린 말도 아닌 듯했다. 어쨌든 이민 가버리고 싶은 마음은 접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는 정신 차라고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기운이 나질 않는다. 기운이.

글쓰기모임 날, 대선과 전혀 상관없는 글을 써서 <작은책>으로 향했다. 서울 <작은책> 사무실에 도착하자 콜트악기의 해고자 이동호님이 나를 반겼다. 농성장을 지키느라 이동호님이 5개월 정도 글쓰기 모임에 참석을 못했다. 오랜만에 건강한 모습을 뵈니 반가웠다.

사람들이 써 온 글은 총 4편. 그 중 대선과 관련 있는 글이 2편. 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사람들이 자꾸 글 이야기는 안 하고 대선 이야기를 한다. 대선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은가 보다. 6시 시작하는 송년회 때문에 서둘러 글쓰기모임을 끝냈다.

송년회 장소인 문턱없는 밥집으로 내려가니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밥집에서 자리를 잡고 우릴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던 사람이 한 20명은 될까? 덕분에 식당이 거의 다 찼다. 사회자는 대선 멘붕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 서로 위로하고 치유하는 시간을 가지자고 했다. 그리고 흥겨운 장단의 노래가 이어졌다. 재주가 많은 분이 나와서 '목포의 눈물', '사랑가', '아리랑'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등을 불렀다. 그리고 우리 글쓰기 모임의 춤꾼 혜진 씨가 나와서 강남스타일 춤을 보여주었다. 흥겨웠다.

게다가 송년회에는 많은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노래가 이어지는 잠깐 잠깐 퀴즈 타임이 있었다. 첫 퀴즈는 "재능교육의 농성이 오늘로 며칠이 되었을까요?" 였다. 한 분이 손을 번쩍 들었다. "1829일." 정답을 맞혔다. 선물은 재능교육의 유명자 지부장이 직접 주었다. 그리고 유 지부장은 마이크를 잡고 짧은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한진중공업 동지의 자살에 이어 오늘 또 현대중공업 해고노동자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우려했던 일들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는 게 두려웠다. 사실 새누리당의 집권이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에게 절망으로 읽히고 그 때문에 죽음의 행진이 또 다시 시작되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런데 그 불안감이 한진중에서 또 현대중공업에서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 불안감이 어디까지 갈지 아무도 예측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난 문재인 후보의 찬조연설자 중 정혜신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이야기를 가장 감명 깊게 들었다. 정혜신씨는 쌍용차 노동자와 청소년 아이들의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이 사람들의 자살을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자살률을 줄이겠다. 그런 공약을 내는 대통령 후보가 왜 없을까? 뭘 건설하겠다. 뭘 세우겠다. 747 경제공약이나 주가지수 3000 이런 공약 말고 자살률을 지금의 반으로 또는 삼분의 일로 줄이겠다. 그걸 국정 제일 과제로 삼겠다. 그런 사람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국, 자살률을 줄이려면 사람을 가운데 놓고 그 사람의 모든 문제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삶을 힘겹게 하는 조건들을 하나하나 해결을 해 나가야 한다. 산업을 중심에 두고 정책을 펴면 경제 수치만 신경 쓰면 된다. 하지만 사람을 중심에 두고 정책을 편다면 자살률을 획기적으로 줄인 방안이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두 번째 퀴즈 시간이 왔다. 이번에는 삼성 일반노조와 관련된 퀴즈다.

"이번 퀴즈는 삼성 일반노조가 주장하는 것 중에서 세 가지만 말씀하시면 됩니다. 자, 무엇일까요? 아시는 분. 맞추시는 분께 여기 책을 세 권 드립니다."

세 가지? 한 가지는 백혈병 문제일 거고, 두 번째는 노조를 인정하라! 그런데 세 번째는 뭘까? 통 모르겠다. 그 사이 한 사람이 손을 들어선 백혈병 한 가지만 말했다. 더는 손을 드는 사람이 없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손을 들었다.

"노조를 인정하라! 그리고 한 가지는 이건희 물러나라?"
"맞습니다."

헐 찍었는데 맞췄다. 으아 신 난다. 선물이 책 세 권이라는데.

삼성 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이 인사를 한다.

"누군가는 삼성과 꼭 싸워야 할 것 같아서 저희가 이렇게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벌써 며칠간 삼성 본관 앞에서 집회를 이어오고 있단다. 그래서 목소리가 다 쉬었고 그런데도 씩씩하게 말을 이어간다. 우리가 대선 멘붕이다. 이민이다 뭐다 떠들고 있는데 저 양반은 삼성과 싸우면서 어찌 저리 씩씩할까? 사람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앞에 나가서 책 세 권을 김성환 위원장에게 받고 악수도 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온 여자 분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누군가 했더니 보리 출판사에서 삼성반도체 직업병에 대해 나온 책 <먼지없는 방>의 주인공인 정애정 씨다. 얼굴이 참 밝다.

송년회 동안 앞자리에 콜트악기의 해고자 이동호님이 앉아 있었다. 이동호님은 문 후보가 되면 농성장에도 좋은 소식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단다. 그런데 새누리당의 박 후보가 이기면서 현 정부와 동일한 노동정책을 이어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크다는 말을 했다. 같이 앉은 우리들은 어떻게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며 그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갔다. 하지만 이동호님의 참담함이 얼마나 클지 우리는 감히 상상이 안 될 것 같았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을 경품추첨이 있었다. 가장 좋은 상품은 10만원이 넘는 시리즈 책. 물론 내 이름은 너무 빨리 불렸다. 그래서 <작은책>에서 만든 만화책 <천하무적 홍대리>를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상품으로 받은 책과 콜트악기에서 판매하는 수제 비누 한 상자를 들고 전철로 터벅터벅 걸었다. 내가 대선 멘붕이니 이민이니 멍하니 고민하던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농성 노동자들이 참담함과 막막함에 벼랑 끝에 서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부끄러움이 마구 밀려왔다. 정말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래야 그분들도 기운을 내겠지. 정말 내년 송년회 때는 송년회에 참여했던 농성노동자들이 송년회 끝나고 추운 농성장 말고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태그:#대선 멘붕, #재능교육, #콜트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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