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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판돈(사천섬)의 유일한 교통수단 ...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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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가 정을 떼고 싶었던 걸까? 방콕으로 떠나는 날 좋지 못한 해프닝이 있었다. 이른바 화장실 세면대 사건인데,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기에 앞서 아내의 꿈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아침에 눈을 뜨자 아내가 꿈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여행에서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좀처럼 꿈 이야기를 하지 않는 아내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나타나셔서 자꾸만 책상 밑으로 들어가셨단다. 우리로서는 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배낭을 싸고, 체크아웃을 하고, 배를 타기 위해 아이들과 만나기로 했던 장소 앞으로 나가면서도 계속 꿈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오늘 하루 우리 부부는 물론이고 아이들을 평소보다 더 조심시켜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던 중이었다. 멀리서 윤미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모, 삼촌, 큰일 났어요!"
"왜?"
"승현이가 화장실 세면대를 부수었어요!"
"승현이가 왜?"
"몰라요, 미쳤나 봐요!"
"무슨 이유가 있겠지."
"자기가 안 그랬다 그러는데, 아~ 몰라요. 지금 숙소 주인이 난리예요."

아내가 다른 모둠 아이들을 기다리기로 하고, 윤미와 함께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그들의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승현, 상훈, 성호 남자 아이 셋이서 배낭만 꾸려놓고 침대에 앉아 있다.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세면대가 무너져 있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세면대도 부서지지는 않아서 다시 이음새를 사서 붙이기만 하면 될 듯했다. 일단 승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아, 이거… 제가 한 거 아닌데요, 그냥 세수만 했는데… 쾅하고 무너졌어요."
"그냥 세수만 했는데?"
"네! 사실 처음부터 세면대가 그랬거든요. 그저께 들어올 때부터 흔들거렸어요."
"그래?"  
"그리고 어제 이렇게 됐거든요, 세면대. 그래서 아저씨한테도 고쳐달라고 말했어요. 알았다 그랬는데…."
"어제?"
"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배낭 들고 나가려고 하니깐, 못 간다고, 돈 물어내라고…."
"알았다. 그럼, 넌 잘못 한 게 없는 거네?"
"네!"

승현이를 다독여주고 옆에 서있는 상훈이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주인하고는 이야기해봤어?"
"네. 근데 말이 안 통해요. 무조건 돈 내래요. 그런데, 삼촌, 여기 방에 있잖아요, 벽에 금이 가고 구멍 난 거도 물어내래요."
"이건 왜?"
"우리가 그런 거래요. 이건 진짜 우린 모르는 일이거든요. 우리 들어오기 전에 이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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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재미난 모양이다^^ ..
ⓒ 김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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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얼울해 죽겠다는 표정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상황이 분명하게 그려진다. 세면대를 다시 보니, 이음새가 낡아서 떨어진 것 같다. 휴우~. 꼭지가 돈다는 표현은 이때 써야 하나. 이 사람들 순진하게 생긴 애들뿐이라고 그냥 덮어씌울 요량이었나 보다. 라오스에서는 두 번의 여행 동안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아니 이런 지저분한 일이 이 나라에서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속상하고 화가 났다.

그래서 그냥 돈으로 해결하고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시시비비를 따지기에 시간이 너무 없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의 여정은 빡빡했다. 지금부터 30분 안에 배를 타고 이 섬을 나가서 팍세까지 가는 버스를 타야 하고,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오후 5시 안에 태국 국경에 닿아야 했다.

만약 늦어지면 국경 문이 닫히고 우린 국경에서 하룻밤을 보내야하는 불운한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그러면 국경 너머에서 방콕 가는 야간버스도 놓치게 되면서 남은 일정이 완전히 꼬이게 되는 것이다.
 
화가 난 나는 일단 아이들은 배 타는 곳으로 먼저 보내고, 주인을 만났다. 그런데 그는 영어가 짧기도 했지만 정말로 막무가내였고, 예의가 없었다. 더 이상 말 할 것도 없다는 투로 윽박지르기나 했지, 도무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말고 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세면대가 내려앉았으면 고객이 다치지 않았는지 정도는 한 번쯤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경찰을 불러달라고 했지만, 그는 이 섬에는 경찰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그를 데리고 방콕까지 가는 교통편을 예약했던 여행사로 가서 여직원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여직원의 통역으로 우리 아이들의 말을 차근차근 전했다. 첫날부터 흔들거렸고 그냥 세수만 했는데 떨어졌다더라, 어제 이야기했을 때는 고쳐준다고 하고선 왜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느냐, 그리고 벽에 금 가고 구멍 난 것은 우리 아이들이 한 일이 아니다, 내가 봤을 땐 세면대가 부서진 게 아니라서 낡은 이음새만 바꾸면 될 듯하다, 그 정도의 돈은 내가 지불할 생각이 있다, 여행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을 믿어 달라, 등등 간곡하게 설득을 했지만 그 사람은 '불통'이었다.

무조건 돈만 내놓으라는 식으로 소리를 질러댈 뿐이었다. 이렇게.

"NO PAY, NO GO!" 

......
▲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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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다 여행자 직원은 버스 시간이 촉박해서 지금 배를 타야한다고 재촉했다. 난감해진 나는 여행자 직원을 향해 왜 이 섬에는 경찰이 없냐고 한숨을 쉬었더니, 이런, 경찰이 있단다. 나쁜 놈, 거짓말을 한 것이다. 여행사 직원에게 20분만 기다려 달라 하고 경찰서로 갔다. 난 다시 한 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끝까지 듣고 난 경찰이 "그렇다면 당신의 학생들이 첫날부터 세면대가 흔들거린다고 이야기했어야 했어"라고 지적했다. 난 생각지 못했던 그 부분을 인정해야 했고 세면대에 대해선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하지만 숙소 주인은 엉뚱하게 벽에 금 가고 구멍 난 것까지 언급하고 있고, 세면대의 상태에 비해 과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내 말을 듣고 사건 현장을 보기 위해 게스트하우스에 함께 가보자고 했다. 세면대와 벽의 금과 구멍을 둘러 본 경찰은 내 주장에 대체로 동의하며 중재안을 내놓았다. 세면대 수리비용으로 20달러.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결인 셈이었다. 난 경찰이 보는 앞에서 주인에게 20달러를 건넸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수였다. 난 악수가 화해의 의미였는데, 그는 내게 졌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었나 보다. 갑자기 "NO KOREAN!"이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20달러를 내게 집어 던졌다. 내가 돈을 줍지 않자 다시 내 가방의 생수통 꽂는 그물에다 쑤셔 넣었다. 그리곤 나를 노려보며 윽박질렀다.

"You don't go today! Stay here!"  

경찰을 쳐다보았더니, 그도 이제 어쩔 수 없단다. 상호 합의를 하지 않으면, 정식 조사를 해야 하고, 그러면 오늘 안에 결론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아내와 나 뿐이라면 하룻밤을 더 자고라도 버릇을 고쳐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상황은 그것이 아니었다. 옆에서 여행사 직원은 계속 시간이 없다고 보채고 있었다. 나는 내가 가진 돈으로 모자라서 이미 배를 타고 있는 아내에게 가서 돈을 받아 그치에게 건네줬다.

젠장! 아내의 꿈이 그때서야 생각났다. 조심했어야 했고, 문제가 생겼으면 액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시간만 허비한 꼴이 된 것이다. 나 혼자 정신없이 동분서주 하는 동안 아이들은 배에서 기다리며 라오스에 대한 안 좋은 기억 하나를 새겨 넣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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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오스를 떠나는 날 아침, 햇살이 유난히 눈부셨다 ...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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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 세면대 사건의 파동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섬에서 늦게 나왔으니 버스는 늦게 출발했고, 그래서 팍세에서는 레스토랑 앉아 밥 먹을 시간도 없어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워야 했으며, 결국 그렇게 서둘러 갔지만 국경에 도착했을 때에는 5시가 넘어 있었다. 도미노 게임처럼 그날 하루의 일정이 밀려서 툭툭 넘어지는 꼴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6시까지는 1인당 추가 비용으로 1달러씩만 내면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출입국절차를 모두 마치고 국경을 넘자, 바로 태국이었다. 시장에서 흘러나오는 생기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길을 따라 펼쳐진 식당에서는 낯선 음식 냄새가 나고, 거리에서는 군것질거리, 잡동사니, 양말이나 속옷 같은 것들을 늘어놓은 장사치들로 복작거렸다.

익숙해진 하나의 세계가 가고 다른 또 하나의 세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15명의 나그네들은 배낭을 앞뒤로 메고 버스터미널까지 1킬로미터 남짓한 길을 걸었다. 그때 승현이가 슬며시 따라 오면서 말을 붙인다.

"삼촌, 저… 얼마나 들었어요?"
"……? 뭐가?"
"……세면대 부서진 거요?"
"왜? 알고 싶어?"
"아니, 제가 그런 거는 아니지만, 아무튼 저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제가 그 돈은 내야 할 거 같아서…."
"됐~거든요."
"그래도… 제가 내야지… 마음이 편할 거 같아서…."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그것이 계속 신경 쓰였나 보다. 내 기분 상한 것만 생각하면서 아이들 몰래 화난 감정을 다스리느라, 정작 상처를 받았을 당사자를 생각지 못한 것이다. 내가 그 돈 몇 푼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미안한 마음에 표정을 단정히 하고 짐짓 그를 바라보며 말한다.

"승현아, 삼촌 한 번 봐 볼래? 네가 잘못 한 거 하나도 없어. 정말이야. 물론 삼촌이나 우리 중에 누구 다른 사람이 잘못 한 것도 아니야. 그냥 그런 일이 있었던 거야. 알겠어?"

그날 밤, 방콕 행 야간버스 안에서 나는 늦도록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고 화를 내고 흥분했겠지만, 아이들은 어땠을까? 혹시 무섭지는 않았을까? 라오 사람들은 화내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고, 그건 삶의 속도 때문이라고, 아이들에게 잘도 말해주면서 정작 나는 라오 사람들을 대상으로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번만이 아니다. 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혹은 리더라는 책임감을 핑계로 삐끼와 같이 거리에서 만나는 라오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했던 장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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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콘에서의 마지막 밤 ...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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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서의 마지막 여정을 이렇게 보내다니….

옛 말처럼 정을 떼려는 것이었을까. 돌아가 그리움으로 병들지 말라고. 그리워서 아프지 말라고. 그래, 그렇게라도 생각해야지.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덧붙이는 글 | 본 연재 기사는 <제민일보>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은 김향미&양학용 여행작가 부부가 지난 겨울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11명의 청소년과 2명의 대학생과 함께 라오스로 한 달 동안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저서로는 967일 동안의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묶은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예담)와 라오스 여행이야기를 담은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좋은생각) 등이 있습니다.



태그:#라오스, #여행학교, #돈콘, #시판돈, #시속4킬로미터의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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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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