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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정조 15) 1월 채제공은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한다.

도성에 사는 백성의 고통으로 말한다면 도거리 장사가 가장 심합니다. 우리나라 난전을 금하는 법은 오로지 육전이 위로 나라의 일에 수응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익을 독차지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빈둥거리며 노는 무뢰배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스스로 가게 이름을 붙여 놓고 사람들의 일용품에 관계되는 것들을 제각기 멋대로 전부 주관을 합니다. … 만약 물건 주인이 듣지를 않으면 곧 난전이라 부르면서 결박하여 형조와 한성부에 잡아넣습니다.…

이 때문에 물건을 가진 사람들이 간혹 본전도 되지 않는 값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팔아버리게 됩니다. … 근래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채소나 옹기까지도 가게 이름이 있어서 사사로이 서로 물건을 팔고 살 수가 없으므로 백성들이 음식을 만들 때 소금이 없거나 곤궁한 선비가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일까지 자주 있습니다.…

마땅히 평시서로 하여금 20, 30년 사이에 새로 벌인 영세한 가게 이름을 조사해 내어 모조리 혁파하도록 하고, 형조와 한성부에 분부하여 육전 이외에 난전이라 하여 잡아오는 자들에게는 벌을 베풀지 말도록 할 뿐만이 아니라 반좌법을 적용하게 하시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매매하는 이익이 있을 것이고 백성들도 곤궁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 원망은 신이 스스로 감당하겠습니다. (정조실록 권32 정조 15년 정월 경자)

모든 정책에는 득을 보는 계층과 실을 보는 계층이 있게 마련이다. 특히나 경제정책에 있어서는 그 이해관계가 분명하기에 찬반논의는 격렬하게 진행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책 입안자의 강한 의지와 기득권 철폐라는 시대적 요구가 반영되면, 명분을 얻은 정책 입안자는 자신의 정책을 일관성 있게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조선후기 신해통공 조치라는 것에서 이러한 예를 만나 볼 수 있다.

신해통공은 1791년 채제공이 주도하여 시행했던 정책으로, 서울의 상품 유통에서 독점적 지위를 보장받던 시전상인의 특권을 혁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하고 서울에서 모든 백성이 자유롭게 상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시전상인의 과도한 금난전권(난전을 단속하는 권리)으로 인해 고통 받던 당시 소상인, 소상품생산자들의 보호와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허용하기 위해 시행되었으며 더 나아가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더 이상 난전의 행위를 막을 수 없었던 시대적 요구로 인한 조치였던 금난전권은 과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이상적인 정책이었을까? 그리고 이 신해통공이라는 경제적 정책을 통해 현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정책에 귀감을 얻을 수는 없을까? 이러한 의문과 과제를 가지고 신행통공의 역사와 그 교훈을 알아보고자 한다.

금난전권은 언제부터 왜 나타나게 되었는가?

조선은 국초부터 농본을 표방하여 국가재정의 근간을 농업에 두었고 상업을 억제하는 경제체제였다. 즉 상업을 억제하지 않으면 농본주의라는 기본 전제가 무너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국가에 상인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기에 조선은 한양으로 천도 후에 지금의 종로를 중심으로 대규모 건물을 세우고 상인들을 입주시켰다. 대신 조선 정부는 이들에게 관수품을 조달하고 국고 잉여품을 처분하게 하게 하였다. 또한 서울 사람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하게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금난전권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아직까지 상업이 발전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서울 생필품과 정부 관수품의 수요는 시전상인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17세기가 지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17세기 초엽 이후,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보내는 진공품을 대규모 시전에게 조달하는 국역을 부담시킨다. 이는 조선 정부가 재정적 곤란으로 인해 스스로 물품을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에 상응한 특권으로 금난전권을 부여하게 된다. 금난전권이란 각 시전이 각기 독점 취급하는 물종에 대해 다른 상인들이 이를 취급할 수 없도록 단속할 수 있는 배타적 권한을 의미한다. 결국 금난전권이 등장하게 된 것은 당시 급변하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는데, 즉 조선 후기 상업발전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15세기 안정되었던 토지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양반관료층의 토지겸병이 성행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농토에서 쫓겨난 농민의 일부가 서울과 같은 도회지로 모여 들어 상업인구로 전환되어갔다. 특히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을 떠난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서울로 모여 들어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고 상업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난전을 형성하여 동대문이나 남대문 근처에 모여 장사를 하게 된다. 이후 생필품의 독점적 판매상인 시전상인과 심한 경쟁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결국 금난전권은 서울 상업계에서 난전상인의 성장과 도전으로부터 시전상인의 상권을 보호하고 그들의 자본 집적을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며, 이는 경쟁 상인을 배제하려는 시전상인과 재정적 곤란을 겪고 있던 조선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금난전권의 폐해와 새로운 시대의 요구

18세기 중엽 이후 조선 정부의 시전보호책에 한계가 드러난다. 당시 서울에서 시전의 수가 급격히 증가(부족한 세금 충당 위해 시전 허용)해 이들 모두가 금난전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 결과 서울 상업계는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시전의 수와 난전의 수가 함께 늘어나면서 서울에서 판매되는 거의 모든 상품이 금난전권의 대상이 되고 영세상인, 소상품생산자들은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된다. 시전상인들은 권세가의 노비가 행하는 난전은 단속하지 않으면서 힘없고 약한 소규모 행상이나 소생산자들을 대상으로 금난전권을 행사하였고, 불법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난전을 박살내고 그들의 상품을 강탈하기도 했으며 시가의 반도 안 되는 돈을 주며 팔라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금난전권은 소상인의 뿐만 아니라 서울의 소비자들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 시전상인들은 서울의 상품 공급을 길목에서 차단하여 원활한 물자 유통을 막고 그들의 독점권을 이용하여 가격 조종을 하며 엄청난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 서울의 물가가 급격히 올라 도시 빈민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고, 특히 큰 흉년이 들었을 경우 이는 커다란 사회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시전의 금난전권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18세기 중엽부터는 금난전권을 제한하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시전상인 보호책을 폈던 조선 정부가 이제는 시전의 금난전권 앞에서 신음하는 소생산자층과 소상인, 그리고 도시소비자층도 보호하는 정책을 입안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실제로 이후 부분적으로 시전의 특권이 제한되었지만, 서울의 일반 상인들이 금난전권에 저촉 받지 않고 본격적으로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1791년 좌의정 채제공의 주장에 의해 실시된 신행통공 이후부터였다.

신해통공, 시대적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다

채제공은 시전의 금난전권 횡포의 폐단으로 소상인의 자유로운 상행위가 불가능하여 유통구조가 원활하지 못하고 극심한 물가고를 일으켜 서울 소비자들의 생활이 궁핍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를 제거하기 위해 30년 이내 설립된 작은 시전은 모두 혁파하고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해야 한다는 정책을 제안하고 실제로 그 정책을 강력한 의지로 시행하게 된다. 이는 영조 이래 새로운 시전이 많이 생김으로써 야기된 폐단을 어떠한 형태로든 해결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었다.

신해통공은 모든 시전을 혁파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육의전의 국역부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금난전권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되 금난전권을 소유한 시전의 숫자를 금난전권이 처음 인정되었던 당시로 환원하려는 것이었다. 이 조치로 인해 육의전 이외의 시전들은 큰 타격을 입었으나 그에 반해 사상도고(경강상인, 만상, 송상 등 당시 거대 자본을 가진 상업 세력)는 정부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으로 인해 더욱 활기를 띠고 큰 혜택을 보게 되었다. 또한 시전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해 그들의 국역부담을 줄여주는 한편 당시 성장하던 사상도고들에게 부족한 재원을 마련케 해 신해통공 이후의 부작용을 줄여 나가는 정책을 펴게 된다.

하지만 모든 정책이 그렇듯 신해통공과 그 후속 조치에서도 정조와 채제공의 정치적인 생각과 결단이 반영되어있다. 당시 시전상인은 노론 세력과 정치 경제적으로 결탁하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많은 정치 자금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시전들은 금난전권과 독점적 상권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정조는 그들의 어둠의 결탁을 깨지 않고서는 그의 정치적 입지를 견고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성장하던 사상도고와의 결탁을 통해 신해통공을 시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어물이 육의전 품목에서 제외된 것에서 볼 수가 있다. 어물은 사상도고가 가장 많이 취급하는 물품이었다. 이 어물의 독점권을 철폐하는 조치는 당연히 사상들에게 상당히 유리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가 시행되기 바로 전해에 주교사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주교사는 정조가 그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화성에 행차할 경우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하고, 거기에 투입되는 경강선을 관할하는 기구였다. 그런데 경강선은 대표적인 사상도고였던 경강상인이 상업 활동에 이용했던 것이다. 즉 주교사의 설치는 경강상인을 국가의 통제 하에 두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통제를 통해 국가재정을 보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정조의 정치적 결단과 사상이 반영된 이 신해통공은 당시의 시대적 요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었을까?

신해통공의 원래의 목적은 소상품생산자 소상인의 보호 차원에서 제시된 정책이었다. 하지만 정책 이후 상업 규모가 너무나 커져 버린 사상도고의 독점적 활동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부는 사상도고의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시전을 혁파한 후의 부족한 국가재정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는 정부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고, 오히려 소비자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당시 우의정 박종악은 사상도고의 폐단이 시전상인 못지않아 물가가 크게 올랐다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또한 그 후, 사상도고는 세력이 더 커지고 소규모 상업 자본을 잠식하고 소비자들에게 더 큰 피해를 주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1833년에 일어났던 '쌀폭동'이다.

1833년 서울로 반입된 곡물의 양은 풍부하였다. 공급량이 많아 가격도 안정이 되고 식량에 대한 사회적 문제는 해결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일부 여각주인들이 농간을 부려 쌀의 공급을 차단하였고 곡물전 상인들이 이에 호응을 하면서 10개의 여각 가운데 1개씩만 번갈아 가며 쌀을 방출하자 쌀값이 폭등하게 되었다.

분노한 서울의 백성들은 쌀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정부에서는 진상 조사를 하였지만 당시 봉건세력과 정치 경제적으로 결탁을 하고 있던 상인들은 거의 처벌을 받지 않았다. 미곡 공급의 주도권을 장악한 여객주인권에 봉건세력들의 투자가 많았고 정조대 주교사 설치 이후 경강상인과 권력 실세의 접촉 가능성이 높아졌기에 이러한 정치적 방향이 서울의 미곡 유통에도 반영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자면, 18세기 시전상인에 그 세력이 밀렸던 사상도고들은 신해통공 이후 19세기에 들어와서 조선의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그들의 이윤을 추구하게 되었다. 합리적 경쟁을 통한 시장의 독점이 아니라 권력과의 결탁을 통해 독점력을 키웠기에 그에 대한 부작용은 서울의 일반 소상인, 영세민이 껴안게 된 것이다.

신해통공,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1791년 정조대 신해통공의 실시는 여러모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상업적으로 시전상인의 경제적 특권의 박탈과 함께, 당시 난전을 통해 성장하던 영세 상인의 보호를 목적으로 삼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또한,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해 금난전권의 특권적 성격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게 된 상업 구조의 변화에서도 비롯된 정책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신해통공의 본래 목적과 의도가 소상인 소상품생산자의 영업의 자유를 인정하고 도시 서민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려고 한 것은 분명하지만, 정책 시행 후 독점적 자본력을 가진 사상도고에 의해 정부가 보호하려 했던 계층이 도리어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으로 보아, 정책의 목적과 결과가 함께 가지 못한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된다.

현대 사회의 수많은 정책들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삶과 직결되는 당장의 현실적인 문제이다. 조선시대와는 다르게 현대 사회는 다양한 민의를 다양한 경로와 방법을 통해 정책 입안 과정에 전달되고 반영된다. 하지만 21C를 살아가는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조선시대 보다 못한 소통과 경제적 이해관계만을 따지는 정치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무엇이 시대의 요구인지, 대다수 국민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망각한 채 그들은 불통과 불신의 세상을 조장한다.

MB정권에선 수많은 논란을 일으킨 정책들이 셀 수 없이 많다. 4대강 사업을 비롯하여 규제완화정책, 공기업 민영화 정책, 감세 정책 등, 논란과 우려 속에도 일방적으로 모든 정책을 밀고 나갔으며 그 결과 서민의 삶과 국가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렀지만, 위정자들은 아직도 거짓과 눈속임으로 일관하고 그들의 정책을 옹호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 정책이며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낙수효과'란 허황된 이념에 맹목적 신앙심을 가지고 추진한 5년 동안의 경제적 정책, 이제 우리는 그들의 정책을 하나하나 심판할 때가 온 것이다.

단 하나의 정책을 수립함에 있어서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10년, 20년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한다. 요즘엔 경제민주화라는 것이 새로운 시대적 과제로 부각되고 있고 대선 주자 모두 너도 나도 경제민주화를 부르짖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들이 MB정부의 과오를 두 번 다시 범하지 않으려면 경제민주화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다시금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이 추구하는 정책적 방향은 우리 헌법의 최고가치인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 아닐까. 하루 벌어먹기도 힘든 세상, 거대 자본의 횡포 속에 우리의 이웃 영세 상인들과 노동자들은 오늘도 힘겹게 또 그렇게 살아간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 자살률 1위의 오명은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씻을 수 없는 대한민국의 꼬리표가 될 것이다.

요즘 거의 모든 대형유통마트와 SSM들이 일요일 영업을 재개했다. 재래시장 영세 상인들을 위한 정책을 편다고 했던 모든 자치구들의 조례와 조치들이 일순간에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신해통공 조치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신중히 생각하지 않은 정책은 그들이 보호하려 했던 계층에서 더 큰 경제적 피해와 박탈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지금의 상황이 정말 그러하다. 강한 의지와 여론의 힘을 입어 실시를 했지만, 절차적 과정도 엉터리였고 대기업의 횡포에도 무기력했다.

기대와 희망에 부풀었던 재래시장 영세 상인들의 지금 심정은 어떠할까.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자본력이 달리면 경쟁에서도 밀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이웃들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를 원하며 거대 자본 횡포의 강도를 조금이라도 덜어내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다. 과연 이것이 이루기 힘들 허황된 꿈인 것일까.

앞으로 우리가 맞이하게 될 새로운 정권은 경제민주화의 강한 의지를 가지고 정녕 우리의 이웃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길 바란다. 신해통공의 역사적 교훈을 거울삼아 지금의 경제정책을 원점에서 되돌아보고 하나의 정책을 시행함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하여 성급한 실시로 인한 정책 부작용은 피하고, 많은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정책과 그 이후의 조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경제정책#경제민주화#신해통공#조선시대#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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