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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싸이라는 가수가 강남스타일이란 노래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더군요. 얼마전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기네스에 등재 되었다는 소식도 접했습니다. 그러나 피팍한 제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사람들의 이야기 일 뿐이지요. 저는 연예계에도 관심 없지만요. 정치에도 무관심 합니다. 제 인생 여정과도 동떨어진 사람들의 인생살이 일 뿐이니요.

인터넷 검색하니 위키백과에 안철수 대선주자에 대해 나온 자료입니다.
 인터넷 검색하니 위키백과에 안철수 대선주자에 대해 나온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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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터넷을 검색해가며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에 대해 찾아 보았습니다. 먼저 안철수 대선주자에 대해 찾아 보았죠. 안철수 씨에 대해 먼저 찾아본것은 지난 19일 서울 충정로 구세군아트홀에서 대선출마 기자회견후 그를 향해 관심이 쏠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철수 씨에 대한 자료를 검색해 보니 차고넘쳤습니다. 안철수 씨는 1962년 2월 부산에서 출생 하였고 '대한민국의 의사, 프로그래머, 벤처 사업가, 교수 그리고 정치인이다.'고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부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1980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해 의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는 198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의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90년에는 당시 최연소인 만 27세에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학과장을 역임했다고 합니다.

안철수 씨는 의사로서 전공 실험을 더 잘하고 특기를 쌓기 위해서 컴퓨터도 함께 공부하였고 컴퓨터 언어 습득이 완료되었을때 컴퓨터 잡지에서 컴퓨터 바이러스가 한국에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자신의 컴퓨터와 디스켓을 검사해보니 그 중 일부 디스켓에서 바이러스가 감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1988년 6월 바이러스가 감염된 과정을 반대로 하면 치료할 수 있겠다 생각하여 '백신'(Vaccine)이란 이름의 반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만들어 치료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잘 알고있는 V3 최초 버전인 V1 입니다.

안철수 씨는 7년간의 의사 생활을 접고 컴퓨터 백신 회사를 만들게 됩니다. 그때가 1995년 3월 15일.그때 만들어진 기업이 안철수연구소 였습니다. 그 후부턴 사람 고치는 의사 보다는 컴퓨터 고치는 의사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초기 4년은 무척 어렵게 백신회사를 경영하다가 1999년 4월 26일 CIH 바이러스(체르노빌 바이러스) 사건이 일어나면서 적자가 나던 회사는 흑자로 전환되게 됩니다. 당시 CIH 바이러스로 인해 수십만대 가량의 컴퓨터가 파괴되어 기업과 공공기관 등에서 수천억원의 피해가 발생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 일로 인해 바이러스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변화하게 되어 백신에 대한 관심도가 많이 놓아 지기도 했습니다.

위키백과에 나온 '안철수의 모든 것'을 보니 그의 화려한 성공과 성장은 준비와 기회가 절묘하게 잘 맞아 떨어진거 같았습니다. 안철수라는 이름으로 수십여권의 책이 시중에 나와있고,방송출연,언론사 인터뷰,수십건의 포상 등 대단한 이력의 소유자 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수십종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철수 씨는 유학 생활을 마치고 2008년 4월 귀국 해 KAIST 경영학과 교수로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다가 2011년 6월부터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대학원장으로 부임 대선출마 발표 전까지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위키백과에 나온 문재인 대선주자 자료입니다.
 위키백과에 나온 문재인 대선주자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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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론 문재인 이라는 대선주자에 대해 검색해 보았습니다. 문재인 씨는 '1953년 1월 경상남도 거제시 출생으로 대한민국의 법조인·사회운동가·정치인이다.'고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1975년 경희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운동으로 수감 된 적이 있으며,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학생운동 전력으로 판사 임용에 실패하자, 노무현과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수차례의 인권 변호 활동을 하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 2003년부터 2006년 5월까지 청와대 민정수석·시민사회수석, 2007년부터 2008년 2월까지 비서실장을 역임하였고, 노무현 사후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의 이사장을 맡다가, 2012년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12년 6월 17일에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출마 선언을 하였고, 2012년 9월 16일 민주통합당 경선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고 설명해 두었습니다.

문재인 씨는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재학시절 운동권 학생 이었답니다. 집회와 시위를 주도하다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되어 1975년 6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기도 하고고 학교에서 제적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1975년 8월 육군에 특전사령부 특전여단 수중폭파요원으로 복무하였다합니다. 재밌는건 당시 소속 부대 여단장이 전두환, 대대장은 장세동이였다고 하네요. 그는 군복무를 잘해서 전두환 여단장으로부터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기도 했다합니다. 그는 1978년 2월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다고 합니다.

군 제대후 그는 '사법시험을 준비하여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사법시험 합격통지서를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받았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으나,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이 좌절되었고, 노무현과 사법시험 동기인 박정규(노무현 정부 시절 민정수석 역임)의 소개로 노무현을 만나 법무법인 부산에 합류하였다. 법무법인 부산에서 노무현과 연을 맺은 것을 계기로 30년가까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으로 활동했다.'고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면서 정치를 하게 되었나 봅니다. 문재인 씨도 몇권의 저서는 있었으나 학생운동과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경력과 정치인으로 세월을 보냈나 봅니다.

위키백과에 나온 박근혜 대선주자의 자료입니다.
 위키백과에 나온 박근혜 대선주자의 자료입니다.
ⓒ 인터넷 화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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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검색한 대상은 박근혜라는 여성입니다. 박근혜 씨는 '1952년 2월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삼덕동)에서 당시 육군본부 작전. 교육국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과 중등학교 교사 출신인 그의 부인 육영수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육영수에게는 첫 딸이었으나 아버지 박정희는 이혼 경력과 전처소생이 있었으므로 박정희에게는 차녀가 된다.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고 쓰여있었습니다. 또 위키백과는 그녀에 대해 '1998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된 이후 계속 당선되어 현재 제19대 국회의원이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2012년 8월 새누리당 경선을 통해 제18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활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박정희라는 사람. 1961년 5월 16일, 별 두개 단 군인이 자신의 부대를 이용해 당시 권력자를 총뿌리 앞세워 밀어내고 자신이 권좌에 오릅니다. 그리고 18년간 철권통치를 하지요. 젊은 시절 학교 교사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육사를 다녔고, 일본의 천황폐하만세를 외치며 만주로 가서 독립군 때려잡는 군인이 됩니다. 해방후 가까스로 남한으로 들어와 다시 군생활을 합니다. 그런 아버지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된 겁니다. 박근혜 씨가 52년 2월 생이니 10살 무렵부터 청와대에 들어가 생활한 샘이고 그무렵부터 나라의 공주가 되어 자란 샘이 됩니다.

박근혜 씨에 대해 검색하니 위키백과사전엔 위 3사람 중에 가장 길게 정보가 들어 있었습니다. 박근혜의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이 모두 있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책만 구해보아서 박정희에 대해선 조금 알지만 박근혜 씨에 대해선 아는게 없습니다. 그녀는 성심여고를 졸업하고,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고 합니다. 프랑스 유학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 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암살범의 피격으로 사망했다는 급보를 접하고 바로 귀국했다 전해집니다.

박근혜 씨는 부모 유산을 물려받아 관리운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위키백과 자료에 의하면, 1982년 육영재단, 1994년 정수장학회를 운영하면서 이후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정치적 발언은 삼가하며 육영재단과 정수장학재단 일에 전념하다가 1988년 당시 민자당 총재인 노태우의 정계 입문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육영재단이나 정수장학회, 영남대학교 재단 운영 과정에서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고 후일 그가 한나라당 대표나 2007년 유력 대선 주자로 나올 때마다 수시로 의혹이 제기 되었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의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습니다. 사생아 존재 여부 의혹에서부터 전두환 정치자금 6억 수수 의혹,성북동 주택 취득 의혹,최태민과의 관계 의혹,육영재단 운영 관련 의혹,영남대학교 관련 의혹,정수장학회에 대한 의혹과 해명,5.16에 대한 관점,복귀 당시 2억원 수수 의혹과 사실...... 이렇게 논란이 되고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새누리당 경선을 통해서 대통령 후보로 지금까지 유일하게 여성 대권주자로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진 2012년 12월 19일 제 18대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대권주자 이야기 였습니다. 이제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현대차 앞에서 1인 시위 하는 사진. 필자입니다.
 현대차 앞에서 1인 시위 하는 사진. 필자입니다.
ⓒ 현대차 비정규직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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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64년 강원도 평창군 대상리라는 산골에서 태어났습니다. 두분다 문맹이셨고요. 화전민 출신이지요. 어머니 이야기로는 먹지못해 입이 돌아가고 정신이 혼미해 지기도 했다합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이란 표현이 맞을 거 같은 궁핍한 생활을 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보면 될거 같습니다. 그 산속에서 화전민으로 생계를 유지하지만 먹고살기 어려우니 단양 삼곡으로 가서 살다가 다시 제천으로 가서 살기도 했답니다. 그러다 1970년대 제가 6살 무렵 울산으로 이사를 내려오게 되지요. 울산에 대형 공장이 많이 들어서니 거기가면 먹고살수는 있을거라는 정보를 들었나 보더라고요.

두분다 무식하니 뭐 돈많이 벌수있는 직장을 얻을수 있었겠나요? 허구헛날 놀음과 술에 쩔어사는 아버지. 폭행을 당하면서도 자식들보니 차마 도망도 못가고 억지춘양식으로 사시는 어머니. 우리 가정은 그랬습니다. 월세를 몇개월째 못주어 쫓겨 나기도 많이 했다네요. 무식하고 가난한 부모 밑에서 저도 무식하게 자랐지요. 옷은 빨지 않아서 시커멓고 속엔 이가 드글거렸지요. 물이 귀해 몸도 씻지 못해 머리엔 이가 기어다니고 꿰제제하니 그런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마침, 국민학교는 의무교육이라 한글의 원리도 잘 모르면서 덧샘,뺄심도 못하면서 나누기 곱하기,분수는 더 못하면서,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여러가지 과목 하나도 이해 할수도 없었으면서도 뻔질나게 학교 등교를 잘하니 졸업장은 주더라고요. 1979년 부터던가요? 만약에 중학교를 시험치고 들어 갔더라면 저는 국졸이 전부였을겁니다. 운좋게도 다시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 되어서 입학금만 내면 중학교를 다닐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공부배워 뭐하냐며 못가게 했지만 어머니는 까막눈이라도 면해야 한다면서 아버지에게 혼이 나가면서도 교복과 책,학용품을 구해주셔서 중학교 입학이 가능했습니다.

당시 새로 생겼던 현대중학교에 배정받았습니다. 현대중학교는 현대중공업 대표였던 정주영 씨가 만든 학교였습니다. 첫 학생 입학이니 정주영 씨가 직접 와서 한말씀 하고 가셨는데 저는 입학식 때 운동장에 모여있지 않았습니다. 입학식날 교복을 입고있지 않았거든요. 교복 안입고 있으니 입학식에 참석말고 교실에 남아 있으라고 담임이 그랬지요. 저는 교실에서 입학식 하는 풍경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교복은 2주 후에 어머니가 사다 주셔서 입을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공부는 더 어려웠습니다. 한자도 있고,영어도 있었습니다. 산수도 못하는데 수학이라는 제가 보기엔 너무도 어려운 글자들이 가득한 책이었습니다. 중학교도 아는게 없으니 공부는 꼴지를 면치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교는 용감하게 잘했습니다. 3년간 그렇게 했더니 초등학교 수준도 못되는 저에게 중학교 수준 공부마치고 졸업한다며 졸업장을 주었습니다. 고등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닌가 봅니다. 시험을 치루었습니다. 체력장도 했고요. 체력장 시험 20점에 110개만 맞으면 현대공고 들어갈수 있었다는데 제 이름은 합격자 명단에 없었습니다.

"창기야 앞으로는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회사 들어가기도 쉽단다. 우짜노."

이웃에서 많이 걱정들 하셨지만 어쩔수 없었습니다. 공부머리가 안되는걸 어쩌겠습니까? 공부는 잘 외우면 되는데 저는 그 외우는 기능이 되잖았습니다. 간단한 영어단어 하나도 잘 외우지 못했습니다. 잘 외우는 사람이 똑똑한가 봅니다. 눈썰미가 있고, 일머리도 있나 봅니다. 잘 외우지 못하는 저는 시험본다는 말만 들으면 겁부터 납니다. 잘 외우는게 안되다보니 일머리도 없고,눈썰미도 없나 봅니다. 사회 생활 하는데 참 불편한게 많습니다. 제 가방줄이 거기서 끝나느냐? 아닙니다. 중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저는 현대중공업에 사환으로 들어가 일했습니다. 요즘은 그런 일자리가 있는가 모르겠지만 그때는 있었습니다. 사환은 사원들의 잡심부름하는 어린 노동자 였습니다.

사환이라 월급은 얼마 안되었지만 재미가 있었습니다. 사무실에서 근무했거든요. 그때는 청사진이라고 암모니아수에 접촉 시키면 색이 시퍼렇게 변하는 종이가 있었는데 조선소의 설계도가 다 그렇게 청사진으로 구워 사용하던 때였습니다. 청사진 구워오기,복사하기,은행갔다오기,우체국 업무 같은 일을 맡아 했었습니다. 1980년 초,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하자는 구호가 많이 들리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중학교 마치고 사환으로 취직한 사람들에게도 배움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현대그룹 대표였던 정주영 씨는 울산 동구지역에 여러 학교를 세웠습니다. 제가 1회로 졸업한 현대중학교도 그중 하나고요. 현대고등학교,여고도 지었습니다. 그리고 현대공업고등학교도 세웠습니다. 그 현대공고에 야간학급이 만들어졌습니다. 사환으로 다니는 어린 노동자에게 기회가 부여되었습니다. 아침 7시까지 출근해서 오후 6시에 근무를 마치던 시절이었지만 사환은 오후 4시 30분이면 마치고 야간학급에 공부하러 갔습니다.

1년후 저도 현대공고 야간특별학급에 입학했습니다. 야간특별학급엔 사환뿐 아니라 생산직 사원도 많았습니다. 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 생산직 사원도 많았습니다. 저보다 나이 많은 형님들이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수업시간에 불려나가 문제 못풀면 손바닥을 맞곤 했는데 야간특별학급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 그런가 교사들이 때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게 참 좋았습니다. 공부 못해도 맞지 않으니 그보다 좋을순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 보니 머리가 어질했습니다. 하얀건 종이고 까만건 글씬데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를 이해할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용감하게 등교는 잘했습니다.

3년후, 내용을 한가지도 습득한게 없었는데도 졸업장을 주었습니다. 기분 좋았습니다. 초등학교 수준도 못되는 머리속을 가졌는데도 고등학교 졸업장이 생기다니요. 어떤 형님들은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분들중 몇몇분은 대학에 진학하기도 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들 보면 참 부럽습니다. 저는 공부하는 머리와는 거리가 먼 뇌 구조를 가졌나 봅니다.

고졸, 졸업장은 위력을 발휘 했습니다. 실력은 없었으나 그 고졸, 학력인정이 고졸이 아니면 들어갈수없는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2000년 7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사내하청업체에 들어가 일하게 됩니다. 2004년에 불법파견 문제가 터졌습니다. 제 짧은 가방줄로 보아도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비정규직 노조에 가입하고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에 동참했습니다. 2009년 말 업자가 다시 바뀌면서 노조탈퇴해야 써준다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하고 가족의 생계가 달린 문제가 그나마 있는 직장 잃으면 안된다 싶어서 비정규직 노조원에게는 미안하지만 탈퇴했습니다. 일자리 계속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실수였는지 모릅니다. 2012년이 들어서면서 제 일자리가 사라진다 했습니다. 공정을 들어내고 다른 공정이 들어선다고 했습니다. 정규직 노동자는 1년 유급휴직 할것이고 하청노동자는 모두 정리해고 될것이라 했습니다. 노조를 탈퇴해버려서 어찌 할바를 몰랐습니다. 3월 초, 하청업자는 정상화 되면 다시 부르겠다는 말과 함께 음식점에 우릴 대려가 음식을 시켜놓고 사직서에 서명하라 했습니다. 서명 안하면 한달치 위로금이 없다고 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10년간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쫓겨날까봐 휴가 내고 싶어도 안내고 일했었는데 소용없었습니다.

정리해고 당한지 2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여러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지난 2월 23일엔 대법원에서 현대차가 불법파견 주식회사라고 최종판결 나기도 했습니다. 희망이 생기나 했는데 현대차는 3000명 신규채용 안으로 마무리 지으려나 봅니다. 현대차는 노무관리자와 하청업자를 시켜서 노조탈퇴하고 집단소송 취하하면 신규채용 시켜주겠다며 꼬시러 다닌다고 합니다. 그것도 조합원이 노조에 신고를 해서 알게되었습니다. 현대차에서 내놓은 안이 통과될 경우 비노조원만 좋습니다. 지난 2004년부터 현대차 불법파견 투쟁에 나선 수백명의 노동자는 외면당합니다. 해고자 복직은 물건너 갑니다. 체불임금 받을수 있는 조건이 사라집니다.

검색해보니 대권주자들은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재산도 많았습니다. 머리가 똑똑했습니다. 생산현장에서 노동이라곤 해본일이 없는 대권주자들. 그들은 지금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알고나 있을까요? 12년간이나 불법파견되어 노동착취 당해온 비정규직 노동자 현실을 이해할까요? 비정규직이 울산 현대차 뿐이겠습니까? 전국에 900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고 합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절반의 임금을 때먹혀야하는 비정규직. 일용직,임시직,기간직,계약직...... 우리나라에 차별받으며 절망속에서 생활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그리 많다는 사실을 문재인 후보,안철수 후보,박근혜 후보는 알고나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 변창기 기자는 2012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대선특별취재팀입니다



태그:#현대자동차 불법파견, #문재인, #박근혜, #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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