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각종 포털 사이트에는 아름다운 여성의 몸(명품 각선미, 반전 뒤태 등)이 메인을 장식하고 있다. 이는 무심코 흘려보내는 한낱 가십거리가 아니다. 그곳에 좀 더 아름답고 싶다는 여성의 욕망이 투영되었다면 조금 과장된 말일까? 연예인이 현대인에게 모방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현시점에서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다이어트를 통한 날씬한 몸매는 이미 건강이 아닌 미용의 관점으로 대중은 인식하고 있다.

20세기 이후 미디어가 확산되면서 여성의 몸은 대중에게 노출되었다. 대중매체의 등장으로 '날씬함'에 대한 이상이 상류계층의 유행에서 벗어나 전 사회계층으로 확산되었고, 이와 동시에 영화의 등장은 여성들이 모방하고 싶은 여성의 아름다운 몸이 매체를 통해 공급됨으로써 여성들의 욕망을 자극해왔다. 그래서일까? 여성의 몸 혹은 노출이 영화의 흥행코드 중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얼마 전 개봉한 <간기남>과 <후궁: 제왕의 첩>의 경우를 살펴봐도 여배우의 몸에 대한 대중의 관심에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사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풍만한 여성의 몸에서 대중들은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스러운 몸의 이상형의 기준이 점점 날씬해지기 시작했고, 소비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면서 날씬한 몸을 가진 여성이 아름다운 여성상의 지위를 확고히 유지해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홈쇼핑을 비롯한 소비적 성격이 강한 매체들은 좀 더 날씬한 몸을 가꾸기 위한 방법과 상품들을 내놓으며 여성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때문에 한편에서는 여성의 몸에 가혹할 정도로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 혹은 남성들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러한 여성들의 불만을 대변하고자 한 영화가 개봉했으니 바로 <통통한 혁명>이다.

'혁명'이 되기엔 부족한 영화 <통통한 혁명>

 <통통한 혁명> 포스터

<통통한 혁명> 포스터 ⓒ (주) 마운틴픽쳐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영화의 의도는 분명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혁명이 될 수 없는 환경에서 시작을 하고 있다. 왜 그럴까? 영화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물론 특정 장르의 관습을 따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장르란 일종의 관객과 이루어진 무언의 약속이다. 장르의 익숙함은 관객에게 안정감을 실어준다. 하지만 소재 면에서 새롭지 않거나 고리타분하다면 관객의 외면을 받게 되는 것이 장르다.

업계에서 잘나가는 모델 도아라(이소정 분)는 177cm에 48kg의 완벽한 비율을 자랑하는 몸매를 가진 여성이면서, 웬만한 남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 만큼 도도하고 안하무인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 도아라가 좋아하는 남자인 강도경(이현진 분)이 통통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그녀는 과감히 살을 찌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70kg 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강도경에게 고백을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전문 프로모델인 한 여성이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남자에게 다가가려 한다. 이 부분을 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이 설정은 결국 남성의 시선에 맞춰서 여성의 몸을 다시 재단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여성의 입장에서 시작해야 할 영화는 종국엔 남성에 의한 기준으로 편승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애초에 이 영화에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주인공이 살을 찌우면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고 자아를 찾아간다는 영화의 설정은 다분히 마초적인 시각에 입각해 힘을 잃어간다.

특히 스테이크 20인분을 다 먹으면 사귀어주겠다는 강도경의 제안은 경악을 금치 못할 만큼 마초적이다. 또 주인공인 도아라가 자아를 찾게 되는 과정 역시 강도경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무엇보다 도아라가 진정 원하던 삶이 무엇인지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채 영화는 마무리 된다. 영화는 남자들이 통통한 여성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살을 찌우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이어트를 조장하는 세태에 전복을 꾀하고자 했지만 그 사이에 남성이 들어가면서 여성이 배제되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전문 패션모델 직업의 여주인공, 아쉽다

 <통통한 혁명> 영화 속 한 장면

<통통한 혁명> 영화 속 한 장면 ⓒ (주)마운틴 픽쳐스


그녀의 직업은 전문 패션모델이다. 그리고 그녀의 날씬하고 맵시 있는 몸매는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노출된다. 자신에게 '전문'이라는 타이틀이 붙는 순간 모델에게는 책임이 따른다. 그것은 전문가와 일반 대중 사이를 연결하는 신뢰감의 문제다. 그리고 모델의 날씬한 몸매는 패션모델에 적합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운동선수의 경우를 살펴보자. 어떤 운동선수든 자신의 몸을 그 운동에 가장 적합한 상태로 이끌기 위해 수많은 땀을 흘리고 스스로를 단련한다. 대중은 운동선수의 탄탄하고 건강한 신체에서 외형적 아름다움과 함께 그 노력의 결과물을 본다.

똑같은 기준이 패션모델에게도 적용된다. 패션모델의 몸은 단순히 날씬한 몸매가 아닌 올바른 골격 상태를 만들기 위한 각종 스트레칭과 운동, 그리고 식이요법을 통해 만들어진 자기 단련의 결과물이다. 도아라 역시 스스로의 몸을 자신의 직업에 맞게 가꾸기 위해 단련한다. 영화는 그런 도아라를 지금까지 자신이 이루어 온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 남자의 품에 안기는 순정녀로 만들어 버린다.

어떤 이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왜 모델들은 저렇게 날씬해야 해?"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라면 이 영화의 설정이 다소 통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모델들은 날씬한 몸을 유지해야 하는 직업이다. 한 번 상상해보자. 뚱뚱한 혹은 통통한 모델이 입은 의류 상품들을 당신은 구매하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 소비자는 의류제품만을 보고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다. 날씬한 몸매의 모델의 이미지와 의상의 디자인이 함께 맞물려야 제품 구매 욕구가 발동된다. 패션모델의 몸매는 소비자본주의 사회 속 하나의 경쟁력이자 자본이다. 그런 패션모델이 살을 찌우며 해방감을 느끼고 자아를 찾아간다는 캐릭터 설정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체중을 20kg까지 증량하며 연기를 했던 여배우는 다시 예전의 날씬한 몸매로 돌아갈 것이고, 관객 역시 "D라인이면 어때?"라는 착각에서 빠져나와 여전히 S라인을 꿈꾸려 할 것이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본 후에는 말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제목에 맞게 중심부를 향해 일침을 가해야 했다. 여기서 중심부라 함은 외형적인 조건과 전혀 상관이 없는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날씬한 몸매를 요구하는 환경을 말한다.

하지만 패션모델은 외형적인 조건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직업이다. 연출의도를 끝까지 밀고 나가고자 했다면 주인공은 패션모델이 되어선 안됐다. 애초에 영화는 혁명이라는 무거운 타이틀을 짊어지고 갈 용기가 없는 듯 연출의도에서 비켜선다. 그렇기에 영화의 결말 부분 통통한 이들도 모델도 될 수 있다는 낯간지럽고 계몽적인 장면은 혁명에 가깝기보단 투정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혁명'이라는 타이틀을 걷어내고 흥미로운 소재의 로맨틱 코미디로 만들었다면 차라리 관객의 눈과 귀는 즐겁게 해줄 수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혁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제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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