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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병역거부'

어느덧 한국사회에서 익숙해져버린 일곱 글자. 여전히도 극단적인 비난과 오해가 가득한 사안이지만, 그래도 지난 10년간 조금씩 사람들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존재와 이들의 감옥행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병역거부가 손가락질 받을 무엇이 아닌, 인권의 한 부분임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앎이 늘어감에도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4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각 국가의 인권상황을 유엔에 보고하는 자리(국가별 인권정례검토, UPR)에서,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히기로 했다. 18일 공개한 '제2차 국가별 정례 인권검토 대한민국 국가보고서'(초안)에서 확인된 내용이다.

한국 정부의 병역거부 불인정, 국제 인권 영역에서는 나라 망신

입영·집총 거부로 재판 중인 이준규씨가 지난 2011년 8월 30일 오후 헌재의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 병역법 합헌 판결 후 열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입장발표에서 발언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자료사진)
 입영·집총 거부로 재판 중인 이준규씨가 지난 2011년 8월 30일 오후 헌재의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 병역법 합헌 판결 후 열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입장발표에서 발언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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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노무현 정권시절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대체복무제가 거의 입법화 단계에 이르렀지만,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면서 전면 백지화되었다. 그리고 나서는 줄곧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을 거부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것은 다르다. 물론 그동안 유엔의 개별적 권고에 대한 입장표명은 있어왔지만, 인권정례검토에 제출하는 보고와는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엔의 지속적인 병역거부 인정 권고를 거부하며, 국제 사회 앞에서 대놓고 한국 정부는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선언이라 할 수 있다.

하나만 명확하게 하자. 양심적 병역거부는 국제 인권 영역에서는 기본 중에도 기본인 사안이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와 병역이 가진 민감함 때문에 여론은 열악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다 알고 있을 정부 관료들이 '우리는 못한다, 배째라' 수준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나라 망신이다.

양심적 병역거부, 기본 중에서도 기본인 인권

유엔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병역거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고, 1998년 유엔인권위원회 제77호 결의안을 통해서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는 징벌적 성격을 띠지 않는 비전투적 또는 민간적 임무를 대체복무로 시행해야 한다"는 구체적 원칙을 세웠다.

유럽연합 역시 2000년 기본권헌장을 채택하면서 제10조 제2항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은 인정된다. 각 국내법은 그 권리의 실행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최근 유럽 47개국을 관할하는 유럽인권재판소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형사 처벌한 아르메니아에 대해서 권리 침해 결정을 내렸고(2011년 7월 7일), 이후 터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결정을 내렸다(2011년 11월 22일).

중국과 대치하고 있는 대만도 이미 2000년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인정했다. 우리의 병무청에 해당하는 역정서의 한 관리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이 "자국 내의 인권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심어주므로 대외적인 국제 이미지에 심각한 훼손을 가져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한국 정도의 국제적 위상을 가진 나라에서 한 해 천여 명에 가까운 숫자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간다는 것은 외국 전문가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이미 2006년부터 지속적인 문제제기가 있어왔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 2011년 3월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무려 100명이나 되는 한국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개인 진정을 받아들이고, 한국 정부에게 이들에 대한 즉각적인 권리 구제와 대체복무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어렵다", "곤란하다"가 아니라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어떤 노력을 현재 진행하고 있는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매일 형사 처벌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구체적인 대체복무제 허용 계획도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정부의 보고서에는 "신중한 검토와 연구를 계속할 계획"이라는 면피용 표현만이 있을 뿐이다.

튼튼한 안보 위해 천 명의 젊은이들이 꼭 감옥에 가야 하나

양심적 병역거부가 국제 인권의 기본이라고 인정한다고 하더라고, 한국은 특수상황이 아니냐는 주장이 이어지곤 한다. 이번 정부의 입장도 이런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전 중인 특수한 안보상황, 대체복무제 도입 시 발생할 수 있는 병력자원의 수급 문제, 병역의 형평성에 관련된 비판적 사회 여론"이 병역거부 반대의 논거였다. 그러나 이것들이 한 해 천 명의 젊은이들이 감옥에 가야하는 이유라고 할 수는 없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면 누가 군대에 가냐고 한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 그 수많은 나라에서는 누가 군대에 갔을까? 2007년 국방부가 제시한 대체복무는 현역복무의 2배 기간 동안, 합숙 형태로 최고 난이도의 사회복무를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대체복무로 설정하였다.

현재 현역 육군의 21개월 복무를 기준으로 한다면 42개월 합숙 복무이다. 이것조차 허용되어서는 안 될 만큼 한국 군대가 엉망인가? 그 누구도 해한 적 없는 젊은이들 천 명을 감옥에 보내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군대인가?

이미 유엔은 대체복무제 도입이 안보상황을 위태롭게 할 어떠한 근거도 없음을 명확하게 했다. 그럼에도 정 불안하다면 인원수를 제한해서 대체복무제를 실시해보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천 명의 젊은이가 감옥에서 먹먹하게 1년 6월을 보내는 것보다, 우리 사회의 필요한 영역에서 봉사하는 것이 가지는 긍정적 효과는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왔던 2007년 노무현 정권의 대체복무제도 허용 결정이었다. 감옥행이 계속되는 것은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라며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이후 뒤집혔고, 이제 국제 사회 앞에서도 선언할 것이란다.

2012년 6월 현재 감옥에 있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숫자는 800여 명이다. 8조 원이 넘는 차기 전투기 도입사업이 졸속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센 비판을 받고도 묵묵부답인 정부가, 특수한 안보상황을 이유로 이 젊은이들의 감옥행이 불가피하다고 하는 것은 비극도 아닌 희극이다.


태그:#양심적 병역거부, #UPR, #국제인권, #인권정례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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