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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보았다. 개봉된 지는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뒤늦게 본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그 사이 이 영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목회자라서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 늦게 본 주요한 이유가 될 테지만, 이 영화만은 관객으로서 기본적 예의를 갖추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특히 사회성이 물씬 풍긴다는 영화인만큼 관람 뒤 평이라도 남길 준비를 하고 싶었다. 그게 시간을 끌게 된 이유다.

오늘(2월 13일)이 그날이다. 조조 시간에 맞춰 나간다고 준비했는데, 5분 정도 늦었다. 상영 중이더라도 표를 끊으면 입장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제시간 안에 온 관객이 한 명도 없어 영사기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헛걸음한 것이다. 미안해하는 상영관 관계자들에게 오후에 다시 오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소도시에 사는 설움이다.

오후 4시 20분에 시작하는 영화를 보았다. 제법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던 탓에 다시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나오는 배우들도 눈에 익은 사람들이었다. 석궁 테러 사건(?)의 주인공은 국민배우 안성기가 맡았고, 그의 부인은 나영희가 맡았다.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변호사는 박원상이 그리고 신문사 사회부 기자로 김지호가 나왔다.

나는 평소 영화는 '적은 투자에 큰 감동'을 주는 영화가 가치 있는 영화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물량적 공세로는 관객을 끌어모을 수 없고 감동도 줄 수 없다. 작년 말 개봉된 강제규 감독의 <마이 웨이>가 300억 원이라는 큰돈을 투자하고도 흥행에 실패한 것도 바로 내용보다 물량이라는 형식에 얽매인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부러진 화살>은 미미한 투자로 큰 열매를 거둔 작품에 해당한다. 출연 배우들에게도 흥행에 따라 개런티를 지급하는 '러닝개런티'제를 적용 초긴축 재정으로 시작했고, 제작을 마친 작품이다. 노련한 정지영 감독의 예지가 발동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영화는 입소문이 무섭다. <부러진 화살>도 입에서 입으로 그 작품성이 전달되어 보고 싶은 욕구를 갖게 하였다. 현대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SNS가 영화 흥행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후문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여기에 정리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영화를 본 뒤 감상은 몇 줄 남겨도 좋을 것 같다. 이 영화는 5년 전, 한 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대입 수학 문제 오류를 지적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학교 명예를 생각해서 문제 오류를 묻어두자는 학교 측과 동료 교수들이 있다. 하지만 주인공 김 교수는 "진리가 학교 명예보다도 우선한다"며 결연히 맞선다. 이 일로 이듬해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하고….

이 명예의 문제, 체면 문화는 김 교수의 학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각 부문에 공통으로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은 혈연과 지연, 학연 거기에다 교연 (敎緣, 교회로 맺어진 인연)까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사회이다. '체면'이란 이름으로 이들을 복마전처럼 옭아매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법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이 영화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하며, 약자라는 이유로 법의 보호에서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법전 속의 정의(定意)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부러진 화살>을 보면서 김 교수가 법관 집에 찾아가 석궁을 쏘았느냐, 그리고 그 석궁에 맞아 판사가 상처를 입었느냐보다도 부러지고 있는 사법부를 발견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이 영화가 법정 실화 극이라고 해도 픽션의 영역에서 봐야 한다. 하지만 점잖고 권위에 찬, 그러면서도 뒤로는 불의와 타협하는 사법부를 직시할 수 있었던 것은 의외다. 혹자는 사법부를 '양심의 최후 보루'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말이 그들에게 붙이기엔 지극히 사치스런 말이다. 그들은 그 말에 값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 배역을 볼 때, 정지영 감독도 이런 점을 생각한 것 같다. 주인공 김 교수 역에 국민배우 안성기를 세운 것만 봐도 그렇다. 실제로 안성기(주인공 김경호 교수 역)의 날카로운 반론 앞에 법관들도 쩔쩔매는 모습에서 일말의 통쾌함을 느끼지 않은 관객이 있었을까! 어떻게 보면 이런 주인공에 맞서는 재판관들도 탄탄한 배우들을 내세웠다면 재미와 사실성이 더 돋보였을 것이다. 특별 출연한 문성근이 아니었다면 정말 김빠진 일방적 전개가 되었을 것이다.

박원상이 맡은 박준 변호사 역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양아치 변호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각색하다 보니 이런 허점들이 드러났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권위적인 법조계를 바로 잡는 일은 사무실에서 물 대신 술을 마시고, 만취 상태로 여자 후배 집에서 잠을 자고 재판정에 나가고, 육두문자를 즐겨 써서 될 일이 아니다.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변호사가 피고에게 배워가면서 변론을 맡고 있으니 박 변호사의 말대로 "누가 변호사이고 누가 피고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 실제 인물에 맞게 좀 더 치밀한 변호사 상(像)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실화 극에서는 눈물을 흘리게 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눈물이 핑 도는 장면이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미국에서 돌아온 아들이 재판정에 나와 재판을 방청하다가 끝나고 김 교수에게 하는 말 "아빠, 힘내세요"는 김 교수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도 힘을 주는 말이었다. 가난 속에서도 잘 자란 아들이 성인이 되어 감옥에 갇혀있는 죄인(?)인 아빠를 이해하고 힘을 보태는 것은 무한한 에너지로 작용하게 된다. 불의가 지배하는 이 사회는 김 교수를 죄인으로 몰아 감옥에 가두었지만, 아들만은 아빠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신호이다.

지금 사법부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영화 <부러진 화살>의 담당판사였던 이정렬 창원지법 부장판사가 석궁 재판의 내용을 인터넷에 올린 것에 대해 법을 어겼다며 6개월 직무정지의 중징계를 받았다. 또 서기호 서울 북부지원 판사는 촛불집회 등을 다룬 재판 과정에서 이견을 개진하고 SNS를 통해 자유로이 의사를 소통함으로 법관의 품위를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이런 일련의 사법부 작태는 독재정권 하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오랜 '법언(法言)'이 있다. 이 말을 '법언'이라고 표현한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생명력을 지니고 왔기 때문이다. 이 말은 결국 법이 가진 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희화성 말에 불과하다. 석궁 사건의 김 교수가 영화 중 내 뱉은 말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라는 것도 진리를 거스르면서 기득권자 중심으로 진행되는 재판에 대한 독설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것은 또 다른 '말의 화살'이 되어 사법부에 그대로 꽂혔다.

수학 문제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은 진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뛰어난 수학자를 감옥에 가두어 진리를 오도하고 그의 학문적 열정을 사장한 것은 학문을 위해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어떻게 보면 석궁 때문에 사회에 끼친 그의 공헌이 학문으로 이바지한 것보다 월등히 높을 수도 있겠다. 난공불락과 같이 여겨지던 사법부의 치부를 사실적으로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그래서 국민으로 하여금 법과 사법부에 대한 시각을 교정시켜 주었으니까.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부러진 화살뿐 아니라 부러지고 있는 사법부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근래에 보기 드문 수확 중의 수확이었다.


태그:#부러진 화살, #안성기, #김명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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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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