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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60년 11월에 논산훈련소 30연대에 입소했다. 그 시절 훈련소 30연대에는 야간 점호 군기가 세기로 이름 나 '잠자나 마나'라는 별칭이 붙어 있었다. 나는 30연대 1소대 향도 겸 1중대 향도를 맡았다.

군대 동기들은 그 시절 군대에서 놀림 받던 "아버지, 돌 굴러가유…"하는 지역 출신들이라서 그들이 잘못한 온갖 매질과 체벌이 내게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우리 소대 목제 청소도구함이 없어져 야간에 '결사대(?)'를 조직해 다른 부대의 것을 훔쳐다 놓으라 했다. 그랬더니, 이들 결사대원들이 경계를 서는 위병들에게 들키자 철망 밖으로 달아나려다 모두 중대본부에 붙잡혀 갔다. 나는 그날 주모자로 불려가 부대원들의 밥을 나르는 드럼통 크기의 식관을 꿰어 나르는 철제 파이프로 매우 두들겨 맞았다. 처음 몇 대는 엉덩이가 떨어질 듯 아팠지만 그다음엔 그저 '머--엉'한 느낌이었다.

매주 일요일은 중대 내에서 부모들의 면회 날이었다. 인정 많은 부모들이 기름진 음식을 차려왔지만 이를 나눠 먹은 소대원들은 설사가 나 여러 명이 화장실에 쪼그려 앉기 일쑤였다. 당연히 월요일 새벽 아침 점호 시각에 결원이 생기니, 기간 사병의 눈속임으로 중간 인원을 거르고 끝자리만 맞추려다 아침부터 조인트(정강이)를 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부대원들의 분실물을 보충하려다 들켜도 내가 대신 매를 맞아야 했다.

이뿐이 아니다. 50여 년 전 일이니 무슨 잘못으로 그랬는지 지금 기억도 안 난다. 나는 논산의 육군훈련소에서 이등병 기간 사병에게 기다란 M1 대검으로 왼쪽 어깨를 매우 두들겨 맞았다. 그 통에 왼팔 어깨를 쓰지 못하고 훈련 기간 내내 팔목을 가슴 앞에 붕대로 걸메고 다녔다. 그때는 그 기간 사병 놈을 어디서 만나면 쏘아 죽이겠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리고 반 년쯤 지난 어느 날 이태원에 있던 육군본부 부관감실 근무 시절의 일이었다. 어느 사병이 가방을 메고 부관감실 연병장에 가까이 걸어오는데 낯익은 모습이었다. 훈련소에서 나를 M1 대검으로 두들겨 팬 바로 그 놈이었다. 다시 만나면 쏘아 죽이겠다던 생각은 어디로 달아나고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그 친구는 그때 당시 새로 제도화된 대학의 ROTC 훈련 보조 교관 시험에 합격해, 육군본부에 신고하러 온 참이었다. 나는 구내식당에 가서 식사 대접까지 했다. 물론 왜 나를 M1 대검으로 두들겨 팼는지 따져 묻지도 않았다.

나는 그 매 맞은 후유증으로 매년 여름 장마철만 되면 왼쪽 어깨가 아리고, 결리고 아파 여러 해 고생했다. 매일 맨손체조를 하고, 아령체조를 수십 년 하고 나서야 그 통증이 사라졌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나 아픈 추억이다.

나는 훈련 기간 내내 거의 매일 몇 차례씩 부대원들의 잘못을 내가 뒤집어 쓰고, 곡괭이 자루 등 온갖 것으로 두들겨 맞았다. 처음에 매를 일주일쯤 맞고 나니 매가 두렵지 않았다. 그저 그때 생각이 '제대할 때까지 뼈만 부러지지 말고 고향에 돌아가야지'하는 마음이었다.

군대 폭력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훈련소를 수료한 나는 육군부관학교에 입교하게 됐다. 교문 입구에서 기간 사병이 "훈련소에서 향도를 맡았던 사람 손들고 일어서!" 하는데 나는 매 맞기 싫어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랬더니 어떤 친구가 "어, 편 이병! 왜 안 일어나?"하는 게 아닌가? 그 통에 입교 1호로 또 따귀를 맞아야 했다.

내 나이 이제 일흔 셋, 50여 년 전 M1 대검으로 두들겨 맞은 그 왼팔이 결린 듯 아려와 창밖 먼 하늘을 바라본다. 제발 이제 그런 일들은 없어져야 하는데…

덧붙이는 글 | 병영 구타의 추억 응모작



태그:#원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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