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르헨티나의 시간은 느리고 느리게 흘러갔다. 때로 스쳐지나갈 감정까지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하는 단점이 그 속에 숨어있었다. 게으름뱅이의 걸음걸이같은 그 시간은 잠이 오지 않는 밤, 사정없이 비가 내리는 그 순간에도 동일했다. 뭔지 모를 갈망으로 확 치밀어오른 나는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지독한 원칙주의자인 가이드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럴때면 나는 선반 위에 누워 자는 인형웨이터를 뒤집어서 그의 등에 달린 배낭을 열어젖혔다. 그리곤 일기장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도대체가 넌!'

어느 순간 내 머릿속의 또 다른 자아는 간섭쟁이 가이드로 돌변해서 외쳤다. 어떨 때 그건 걸걸한 조제의 목소리를 닮기도 해서 나를 난처하게도 했고, 엄마로 돌변해서 괴로운 훈계를 일삼기도 했다. 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방안을 왔다갔다 하던 중, 누워 자던 고양이의 꼬리를 얼결에 밟기라도 하면 녀석은 씰룩거리며 쏘아보았다. 그러면 간이 침대에 누웠던 알토와 소프라노는 잠꼬대를 하는양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마디씩 거들었다.

"갈림길은 다시 합쳐지는 거야."
"후훗, 이 바보."

그럼 나는 못 들은 척 일기장만 쏘아보았다. 그저 죽은 언니와 일기장 주인의 공통점이 너무 많아서, 혹은 나와 비슷한 상황에 대한 동질감, 그리고 그건 지독히도 끈질기게 들러붙는 무한한 감정의 집착이라고 여겨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것 외에는 할 게 없었다. 일기장 속의 시간은 1999년 가을, 그리고 아르헨티나, 내가 머문 게스트 하우스가 그 공간적 배경이다.

1999년 9월 25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코르도바, 로사리오, 멘도사, 산미겔데투쿠만....나는 게스트 하우스 앞마당의 벤치에 앉아 그러한 도시 이름들을 되뇌어 보았다. 뜰에는 가을 꽃봉오리들이 막 웃음을 터트릴 기세로 내 옆에 앉아있었다. 나는 지난 저녁에 시인이 준 여행 책자 속에서 그러한 익숙하고도 낯선 도시 이름들을 발견했다.

처음 여기 와서는 아름다운 건축물에 매료가 되었다. 거의 다가 회색 일색이지만 매우 고풍스럽고 우아하며, 특히 리골레타 묘지 같은 곳은 그 아름다움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죽은 사람을 그렇게 아름다운 장소에 모셔둔다는 건 남은 자들과 그들이 교감할 수 있는 최고의 방식인 셈이다. 나도 그렇게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감정의 한 순간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폴리에스테르, 철강 케이블, TV음극선관 제조 산업이 발달한 이 나라를 사람으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그와 매우 흡사하다 할 수 있으리라. 아주 건조하고 치밀한 면을 가지고 있는 그는 성실성과 부지런함에서만은 당할 자가 없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굉장히 닫힌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어떻건 지금쯤 그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고층 쇼핑 프라자에서 직원 관리에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멀리 바다를 건너서 그와 12시간 차이 나는 곳에 있다. 적어도 지금 내가 할 일은 아르헨티나 타임을 즐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가뿐해졌다.

"탱고가 원래 남자들 춤 아니겠어요? 세상으로 부터 따돌림 받고 자신들끼리만 살아가야했던 가우초들의 영혼이 배어있는 춤."
"영혼의 반려자!탱고와 반도네온처럼 가우초들 역시."

맞은 편 저 멀리에서 탱고를 추던 Y와 시인이 숨이 턱에 차선 의자에 주저앉으며 말했다.그 바람에 식탁 위에 놓인 와인잔이 흔들리더니 오후의 햇살을 받아서 반짝하고 눈이 부셨다. Y는 어디선가 종이 봉투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숨이 덜 고른 상태로 외쳤다.

"체 게바라가 한국에서도 서서히 알려지고 있더군요. 당신에게 주려고 길에서 하나 사왔어요."

하며 그가 내민 건 체의 얼굴이 그려진 하얀 티셔츠였다. 에바페론이 체에게 혁명 사상의 기반을 만들어주었다는 이야기를 Y는 열심히 했다. 에바는 자신을 약자와 극빈자, 여성들의 삶을 바꾼 혁명가로 평가해주기를 바랐고, 열심히 봉사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그 바람을 간접적으로 표출했다. 그러한 에바의 봉사정신은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생이었던 체의 삶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여행책자에 나와 있었다.

"나는요, 체가 젊은이들의 트렌드나 관광 상품으로만 전락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좀 되거든요. 본질은 언제나 순수해야만 하는 거죠. 체의 본질, 그리고 그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기엔 세상은 너무 편파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그런 의미로 보자면 자신의 마음 속 근본을 스스로만은 잘 이해하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 같은 게 느껴져요. 당신도 남들이 함부로 당신 마음을 난도질 하는 데 휘둘리지 말아요. 정말 당신을 잘 아는 것은 당신 뿐이니까요."

어느 틈에 아사도가 다 구워졌는지 고기 냄새가 더욱 강하게 피어올랐다. 구수하다고 말하자 '향긋한 평화'라고 시인이 말했다. 철판 위 고기와 채소에선 김이 확 피어올랐고, 그와 동시에 가우초들이 말을 타고 대지를 마구 달리며 그들이 호흡하던 자유인의 여유, 그리고 상황에 순응하며 터득한 생활의 지식이 그 음식의 향기와 함께 영상처럼 떠올랐다.

그들은 따돌림 받고 천대 받으면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자신들의 삶에 순응하며 살았다. 그렇기에 그것이 후일에 아르헨티나 문화 여러 방면에서 강한 기반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에게로 그 영향이 이어지면서 탱고가 삶의 예술이 되도록 해 주었다. 결국 세상을 이끄는 가장 역동적인 힘은 주변인들에 의해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주변인인 줄 알았는데 세상엔 그러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그들이 바라보는 현재와 미래는 결코 찰라로 머물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자 아르헨티나에 잘 왔다는 생각이 물밀듯 스며들었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시인은 언제나 그렇듯이 비노를 잔에 가득 따라 주며 고기 접시를 건넸다.

<계속>


태그:#아르헨티나, #탱고, #와인, #아사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