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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가장자리를 넓히고 허물어진 밭둑을 새로 쌓다가 형형색색의 눈부신 헝겊자락이 곡괭이 끝에 걸렸다. 순간적으로 귀한 보물이구나 싶었다. 시커먼 흙 속에 찬란한 천연색 물건이 살짝 드러났으니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적인 연관은 없는 지역이지만 혹시 아는가. 수 천 년 신비를 담은 고분이라도 발굴되는가 싶어 아주 조심스럽게 주위 흙을 손으로 긁어 파 들어갔는데 아이구 머니나. 이게 뭔가. 글씨체도 투박한 현수막이 아닌가. 행사 일자가 1990년대니 당시로서는 한껏 멋을 부린 총천연색 현수막인데 이것뿐이 아니었다. 현수막을 겨우 캐내자 그 뒤를 이어 주렁주렁 딸려 나오는 게 있었다. 캄캄하기 짝이 없는 비닐뭉치였다.

정말 캄캄했다. 며칠 동안은. 캐도 캐도 끝이 없었다. 아마도 비닐이 왕성하게 보급되기 시작하던 그 때부터 수십 년을 계속 뭉쳐 넣었나보다. 땅 속에 깊이 묻혔으니 싱싱하기가 막 사 온 비닐처럼 보일 정도였다. 요즘 사용하는 비가림 하우스 비닐보다 훨씬 두꺼웠다. 몇 사람의 농부 손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지만 하루라도 더 일찍 농작물을 출하하기 위해 비닐멀칭을 하고, 비닐 하우스를 짓고는 다음 작물이 급해 아무렇게나 폐비닐을 파묻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나 깊이 비닐을 묻을 농부는 없다. 그 정도의 정성이면 폐비닐 수거작업을 했을 것이다. 이것이 땅 속에 더 깊숙이 묻히게 된 것은 뻔하다. 밭 가장자리 기슭과 밭 둑 아래에 대충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처박아 두었지만 점점 위쪽 밭의 배수층이 막히기 시작하고 밭둑이 무너져 내리면서 덮여 간 것이 분명하다.

흙이 숨을 못 쉬고 물도 안 빠지니 물을 잔뜩 실은 위쪽 흙이 장마 때마다 무너져 내려 덮인 것이다. 땅 속의 저수지가 되었으니 큰 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은 당연지사. 내가 이 밭을 살 당시에 주목나무 묘목을 키우고 있었던 것을 봐서는 곡식을 심기위해 무너지는 밭둑을 고쳐 쌓기보다는 채소나 곡식재배는 포기하고 나무 장사를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농촌 땅들이 파괴되어 가는 수순이 그렇다.

문전옥답들이 농약과 제초제로 점점 사막화되어 땅심을 잃으면 더 많은 비료와 거름을 집어넣다가 그 다음에는 묘목을 심는다. 오미자나 오이, 참외, 단호박을 심기도 한다. 띄엄띄엄 구덩이를 파서 심으면 되니까 그렇다. 그다음에는 과수원으로 만들고 또 그 다음에는 음식점이나 전원주택을 짓는다.

농약과 비료농사가 '녹색혁명'이고 비닐농사가 '백색혁명'이라고?

서로 안 통하는 사람끼리는 '아' 해도 '어'로 알아듣고 선의의 제안이 음모나 저의로 읽힌다. 대표적인 집단이 정치권으로 무슨 말이건 꼬투리를 잡고 꿍꿍이 속을 파헤치느라 자기 속까지 뒤집힘 당하곤 한다. 그런데, 땅이 안 통하면 어떻게 될까?

함부로 비닐을 쓰는 농사를 하다 보니 시골 여기저기에 봄이 되면 비닐 태우는 시커먼 연기가 고대시대 봉화처럼 솟구치는 광경을 심심잖게 본다. 비닐 연기는 염화수소 같은 치명적인 중금속을 공기 중에 쏟아낸다. 이것은 산성비를 만든다. 폐비닐 태운 재를 새가 먹으면 오래지 않아 죽어버린다. 폐비닐 재가 흘러흘러 물속에 들어가면 물고기가 먹거나 아가미에 걸려서 고기들이 떼로 죽기도 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땅이 안 통하게 되는 것이다. 땅이 동맥경화에 걸리는 것이다. 폐비닐을 이렇게 땅에 묻어버리면 그렇다. 그 땅은 바로 죽음이다. 공기와 물의 흐름이 차단되어 그곳의 수많은 벌레들과 미생물들이 몰살한다. 다른 곳으로 이동도 못한다. 씨를 뿌려도 자라지 않고 집을 지어도 기반이 탄탄하지 않아 나중에 문제를 일으킨다. 비닐을 만드는 과정은 또 어떤가. 직업병에 걸려 간암이 될 확률이 높다.

실정이 이러한대도 우리는 농약과 비료농사를 '녹색혁명'이라 부르고 비닐농사를 '백색혁명'이라 부르고 있다. 영농폐기물중 폐비닐은 kg당 50∼130원 정도의 수거비를 지급하지만 그것 때문에 농사일 멈추고 비닐을 걷어서 수집장으로 싣고 가는 농심이 천심인 농부는 점점 찾기 힘들다. 요즘은 이마저도 중단되었다.

아예 비닐관련 모든 업체들, 예컨대 석유화학 회사나 비닐 유통업체, 비닐하우스 제작업체 등에 환경부담금을 몽땅 물리면 어떨까. 마트에서 맥주나 소주를 사면 아예 50원의 병 값이 덧붙여졌다가 공병을 반납하면 되돌려 주듯이 농사용 비닐에 폐비닐 회수금을 엄청나게 덧붙여 팔았다가 사 간 만큼 폐비닐을 반납하면 그것을 되돌려 주는 것은 어떨까? 일종의 예치금인 셈이다.

며칠 동안 캐 낸 땅속 비닐을 계곡물로 씻어 동네 하치장으로 옮기며 해 본 생각들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천도교 월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폐비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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