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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나와 어렵게 영세민에 등극되다   

"어? K대 경제학과 출신이시네. 영감님, 이 정도 학벌이면 왕년에 한 가닥 하셨겠구먼. 생계보조비 신청은 받아들일 수 없겠는데요. 영세민 생활자금 지원이라는 게 영감님처럼 멀쩡한 사람들 덕 보이자고 시행된 제도가 아니거든요."

비전향 장기수 S선생님. 1990년대 초, 각서 한 장을 마지못해 쓰고 감옥 밖 세상으로 나와 보니 그는 오갈 데 없고 무능력한 초라한 신세였다. 그러나 담당 동사무소 직원 눈에는 깔끔하고 지적인 외모의 이 노인이 결코 '생활보호대상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게 말이지요. 제가 젊어서 돈을 전혀 못 벌었다오. 현재 내 처지가 독거노인에 일말의  경제력도 없는 지경이 확실한데 그까짓 케케묵은 학벌이 무슨 소용이오."
"그래도 그렇지. 영감님처럼 많이 배운데다 이렇게 사지 멀쩡한 양반이 뭔들 못해 먹고 살았겠습니까. 우릴 속이실 생각일랑 마시고 그만 나가주시죠."
"그래 이 사람아! 나 국가보안법으로 감방 살다 나왔소, 이제 됐소?!"

동사무소에 생계보조금을 신청하러 갔다 오시던 날, 해당 직원의 빈정대는 태도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만 소리 지르고 말았다며 선생님은 무척 애닳아 하셨다. 남한에서 다닌 K대학 외에, 동사무소 직원은 결코 알 리 없는 북한의 또 다른 K대학이 선생님의 최종학력이었다. 그러나 비전향 장기수 신분에 그런 고학력 학벌이란 그저 거추장스런 걸림돌에 불과했다. 당시 한 달에 고작 몇 만원 하는 생계보조비를 간청하러 가야 했던, 경제력이 무능한 선생님은 양쪽 K대학의 경제학도 출신이었다.

학벌뿐만 아니라 S선생님의 단아하고 말쑥한 외모도 걸림돌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전직 교장쯤은 했음직한 지적인 외모 때문에 출소 후 약삭빠른 자본주의 할머니들의 숱한 프러포즈를 받아 넘기느라 애를 먹었다. 아무리 빈털터리 노인이라고 고백을 해도 할머니들은 그조차도 영감님의 겸손쯤으로 받아들일 뿐, 한 할머니는 오히려 '아무리 그래도 영감님 퇴직금은 나올 거 아니예요옹'하면서 덤비는데 선생님은 난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감옥에서 꼬박 30년을 살다 나온 노인에게 퇴직금이란 것이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돌보는 이 없이 잊혀져가는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

작년 겨울 선생님 거주지의 동사무소 직원에게 우리 남편이 그 옛날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강하게 항의하고 있었다. MB정권 들어 더욱 경직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선생님은 외부와의 연락을 모두 끊고 칩거하셨다. 연락두절 상태가 길어지자 우리는 점점 불안해졌다. 추운 겨울 독거노인에게 일어 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구임대 아파트인 S선생님을 댁을 두어 번 가 본 적이 있는데 막상 찾아가보려니 정확한 동, 호수가 기억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비상연락망으로 지니고 있던 B선생님의 전화번호마저 핸드폰이 망가지면서 날아가 버렸던 것이었다.

도움을 청하러 간 해당 동사무소의 사회복지과 직원은 지레 호들갑을 떨었다. 몇 명의 사회복지과 직원들이 관내의 영세민 계층을 관리하기도 벅찬데 특별히 독거노인 한 명의 생사를 확인하는데 낭비할 인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먼저 들른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도 외부인에게 입주자 신상을 함부로 누설할 수 없다는 판에 박은 대답만 들었던 터였다.

"찾는 어르신하고는 어떤 관계죠?"
"굳이 관계를 따지자면, 뭐, 사제지간쯤? 그래요 제자나 다름없습니다, 저희가."
"그분 예전에 교편 잡으셨나 보죠? 그런데 지금은 생활보호대상자라!"
"아뇨. 교사가 아니라, 오래 전 '저쪽'에서 잠깐 교편을 잡기는 했지만 '이쪽'에선 아닌데,  구체적인 관계를 물으시니 제자뻘 된다는 거죠."

"친척이나 뭐 연락 닿을만한 사람들은 없나요?"
"없어요. 그나마 저희가 왕래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인데 몇 달째 연락이 안 되네요. 날씨도 추운데 혼자 사는 노인에게 무슨 불상사라도 생겼는데 아무도 모르면 어떡합니까? 동, 호수만 알려 주시면 찾아가 보는 건 저희가 한다니까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는 사회복지과로 가보라고 하고 여기서도 안 알려준다니 정말 답답하네요. 그분 처자식은 '저쪽'에 있어 생사조차 모르고 '이쪽' 형제들과는 왕래도 거의 없는데."
"그 사람 정말 이상한 노인이군요. 처자식 있는 분이 영세민 자격 딴 것도 그렇고, 또 자꾸 헷갈리게 이쪽, 저쪽은 뭡니까?" 
"실은요, 그 선생님이 있잖아요, '장기수' 할아버님이세요."

나는 주저하면서 평범찮은 선생님 신분을 어렵게 밝혔는데 직원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래요? 어쨌든 저희로선 사람 찾는 일까지 할 형편은 못되고 혹시 새롭게 알게 된 사항 생기면 연락할 테니 전화번호 하나 남기고 가세요. 그분 성함이 장기수씨라고 했죠?"
"네? 아뇨. 이름이 장기수가 아니고 감옥생활 오래 한 양심수, 그 장기수라니까요."
"감옥이요? 그럼 이 노인이 과거 범죄자였단 말인가요?"
"그래욧! 그분은 불쌍하게 국가보안법으로 평생 감옥 살다 나왔답니다. 그러니 주변에 아무도 없고요. 이제 됐소?"

무성의한 직원의 태도에 질려 남편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동안 아파트관리사무소다 동사무소다 찾아다니며 받았던 푸대접에 감정이 복받쳐 그만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는 동사무소 직원을 향해 그분이 장장 30년을 감옥에서 보낸, 위험 천만한 인물이라는 말은 꾹 참고 안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울의 끝 무렵 선생님들과 조우했다. 불편한 무릎 때문에 느릿느릿 걸으시는 B선생님과 지팡이에 의지한 채 겨우겨우 걸음을 떼시는 S선생님 모습을 뵈고 나니  걱정했던 마음과는 달리 괜히 화가 났다. 남편에게 먼저 전화로 알렸다.

"여보. 당신, S선생님 담당형사 찾겠다고 했던 거 안 해도 되겠어. 두 분 여기 멀쩡하게 살아계시네."
"무사하시니 다행이지. 안부 전해드리고, 선생님들께는 우리가 여기 저기 찾아다닌 것 말 하지 마, 미안해 하실 거 아냐."

우린 최후의 수단으로 경찰인 남편 친구를 통해 선생님 담당형사를 찾아보려는 계획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B선생님과 달리 아직 보안관찰이 해제되지 않은 S선생님은 담당형사가 정기적으로 관리를 했다. 선생님은 여든다섯 늙은이를 여태껏 밀착 감시하는 정권의 처사에 불만이 많지만 우린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요즈음 담당형사들은 예전 같은 강압적인 감시 대신 말 그대로 보호하고 관찰해주는 거의 사회복지사 역할을 대신 해주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생사를 확인하고 거주지 반경을 체크하고 겨울이면 가장 먼저 김장김치를 챙겨주는 선행을 모두 담당형사가 감당하고 있었다.

"뭔 소리냐? 너는 우리가 죽기라도 한 줄 알았냐? 허허허!"

S선생님은 일부러 대수롭잖게 웃으셨지만 평소 말이 없는 B선생님은 내 손을 꼭 잡으시더니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자네들이 걱정할 것을 미처 생각 못했구먼. 걱정시켜서 미안하고 또 정말 고맙네, 우리 같은 빨갱이들을 누가 걱정이나 한다던가."

갈 수 없는 땅, 평양

S선생님은 원래 남한 출신인데 6.25때 월북했다가 다시 남파되었다. 월북할 때는 남한의 부모형제와 이별했고 남파되어 내려올 땐 북한의 처자식과 이별했다. 그리고 여태껏 북에 두고 온 가족의 생사를 모른다. 양 체제 사이에 남북한의 가족들은 선생님으로 인해 큰 희생과 고통을 치러야 했다.

선생님이 가장 한스러워 하시는 것은, 우리나라 최고 대학을 졸업한 수재 동생들이 연좌제에 걸려 사회에서 영원히 매장당한 채 살아야 했던 일이다. 그래서 당신 대신 부모님 제사를 지내는 동생 내외분 볼 낯이 없다며 제삿날에도 일부러 제사시간에 맞춰 새벽차를 타고 서울에 가신단다. 어느 해인가 밤기차를 기다리는 선생님 손에는 빈털터리 장남이 어머님 제사상에 올리려고 준비한 초라한 김 한 톳이 들려 있었다.

"아야, 내 너에게 옷 한 벌 사주랴?"

언젠가 두 분 선생님이랑 거리를 걸을 때 한참을 여성복매장 앞에서 서성이시더니 S선생님께서 두 눈을 반짝이며 말씀하셨다.

"네에? 제가 선생님 옷을 사드려도 모자랄 판에 독거노인이 제게 옷을 사 주신다고요?  괜히 예쁜 매장 아주머니한테 말 걸고 싶어서 그러시는 거죠?"
"내 평생에, 저렇게 울긋불긋 예쁜 여자 옷 한 벌 사보질 못했구나. 나도 예쁜 옷 한번 내 손으로 사보고 싶단 말이다."

아마도 선생님은 여성복 매장 앞에서 북에 두고 오신, 60여 년간 생사조차 모르는 사모님 생각이 간절했던 모양이었다. B선생님은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B선생님은 출소 후 남한에서 새 인연을 만나셨지만 그 할머님과는 북으로 송환될 시에 필연적으로 또 이별을 해야만 할 운명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엔 해마다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모의간첩' 색출 작전이 전개되었다. 간첩 구별방법은, '이른 새벽 산에서 내려오는 자, 운동화에 늘 생 흙이 묻어 있는 자, 버스비나 담배 값 등을 잘 모르는 자, 몰래 이상한 주파수의 라디오 방송을 경청하는 자, 하는 일 없이 돈을 펑펑 쓰는 자, 내내 소식이 없다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자' 등등이었다. 흉악한 생김새에 사람을 함부로 해치는 독종들인데다 머리에는 대개 뿔이 나 있는 괴물 같은 형상을 한 이들이, 간첩들 인상착의로 우리에겐 주입되었다.

그러나 실제 접한 간첩 선생님들의 외모는 하나같이 말쑥하고 여리고 선량한 것이 어렸을 적 모의간첩 색출작전이 왜 단 한 건의 성과도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오랜만에 세상에 나오다 보니 자본주의 문리에 다소 어둡고 남들 눈을 피해 조용조용 속삭이는 항목이 그나마 맞아떨어지기는 하지만 그 시절 우리가 교육받은 대로, 혈안이 되어 상상하던 것과는 너무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어쩌다보니 어렸을 적 진저리치게 증오하고 무서워했던 전직 간첩들과 이십년 세월을, 내 딸아이 말에 따르면 '엄마의 유일한 친구들'로 엮여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그 중에서 양심수 Y선생님은 가장 먼저 고인이 되었다. 외손녀가 유명한 배우가 되어 본의 아니게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셨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선생님들은 서로 많이 의지하셨다. 선생님들은 목소리가 유난히 작은데다 본능적으로 구석자리를 좋아하셨다. 한번은 커피숍에서 S, Y 선생님 틈에 끼어 소곤소곤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는데 낯익은 웨이터 청년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호탕하게 농담을 걸었다.

"저희 종업원들이 선생님들은 꼭 간첩 같대요. 만날 때마다 구석자리에 앉아 속삭이시는 모습이 영락없이 간첩이라나요. 너무 황당하죠. 하하하!"

전직 간첩 출신 선생님들의 뜨끔해서 어색해 하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늘 웃는 낯에 인자하시던 Y선생님은 그 얼마 뒤 돌아가시고 내 핸드폰에는 비상연락망 번호를 기존의 Y선생님 자리에 B선생님으로 바꿔 저장했다.

얼마 전 탈북자 출신으로 김일성 대학을 졸업한 인물이 통일부 고위공무원으로 기용 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런 소식을 접하노라면 우리 사회가 마치 과거 이념을 달리했던 사람들에게조차 퍽 관대하고 아량이 넓은 것처럼 비쳐지지만 그것은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가시적인 수혜라고 생각한다. KAL기 폭파범 김현희한테도 주체사상 이론가로 한때 권력서열 13위까지 올랐다는 황장엽에게도 무지 관대했던 정부지만 정작 응분의 옥고를 치르고 현재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연로한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에게는 한 치의 아량도 베풀고 있지 않다.

선생님들은 당시 분위기로 2차 송환도 쉽게 이루어질 줄 알았다. 그래서 S선생님은 남한의 산하와 그동안 신세지고 고마웠던 사람들을 사진에 담아 가겠다며 카메라를 들고 여기 저기 다녔었다. 그런 선생님을 모시고 모 단체로 대학교 등지로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러 다녔던 것이 벌써 10년 전 일이다. 10년이 지나도록 6.15 남북공동합의문에 명시된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양쪽체제에서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어쩌다 보니 남북한 양쪽 국가원수가 둘 다 내 대학 후배들인 셈이구나, 쩝!"
"하! 그러네요. 이쪽 K대에 저쪽 K대. 특히 저쪽 K대학은 총동문회회원이 전국에서 달랑 선생님 혼자였잖아요, 황장엽 동문이 왔다가 죽고, 요새 통일부 직원 한 사람이 와서 또 한 명 늘어난 건가요? 총동문회원이 전국에서 늘 한 명 뿐인 이상한 대학교가 선생님 모교인 거예요. 하하하!"

저번 5.18 때 망월동에서 만나 여러 얘기 끝에 주고받은 농담이었다.

"그건 그렇고 선생님들 오늘은 날씨도 화창하고 좋은데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 가시게요. 두 분 선생님 특별히 가시고 싶은 데라도 있으십니까?"

망월동을 빠져나오면서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남편이 뒷좌석 선생님들께 물었다. B선생님은 어디가 좋을까나 열심히 궁리하시는데 S선생님이 비장하게 행선지를 밝혔다.

"자네 정말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 데려다줄 텐가?"
"그럼요. 저희들 오늘은 선생님들이랑 보내려고 작정하고 왔습니다. 시간도 넉넉하고 기름도 빵빵하게 채웠습니다. 어디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나는 가고 싶은 곳이 딱 한 군데 있는데 혹시 아는가? 평양이라고!"


태그:#6.15, #평양, #비전향 장기수, #친구,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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