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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버지 부시가 마드리드에서 중동평화회담을 개최한 것은, 중동의 서열을 다시 매기기 위해서였다. 석유채굴권을 통째로 상납하지 않았다고, 이라크의 후세인을 초죽음이 되도록 두들긴 직후였다.

역사상 가장 가공할 무력으로 반미의 사막에 친미의 폭풍을 일으켰을 때, 세계는 부시의 '신세계질서'가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이해했다.

내가 법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도 내 허락 없이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절대복종! 핵심을 네 음절로 깔끔하게 정리한 부시는, 덤으로 팔레스타인문제도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행동대장이었던 이스라엘의 샤미르가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팔레스타인인들은 무조건 테러리스트이므로,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겠다고 우겼다. 대신 미국정부가 은행에 1백억 달러를 보증서주면 협상도 생각해보겠다고 버텼다. 점령지에 유대인 불법정착촌을 짓는데 필요한 자금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부시는 골프채를 들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경호원들이 그의 허리를 잡고 늘어지지 않았다면, 사미르의 머리통과 두 팔이 부러졌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총리를 노동당의 라빈으로 바꾸었다. 평화회담은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라빈도 부시의 말을 듣지 않았다. 동족의 머리통을 부수려 했다며, 화가 난 미국 유대인사회가 무명의 아칸소 주지사 클린턴으로 말을 갈아탔던 것이다.

라빈은 조용히 아라파트를 불렀다. 당시 그는 튀니스의 사무실에서 졸고 있었다. 부른 이유는 하나였다. 손에 묻은 피를 씻을 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라파트는 황송한 마음으로, 나블루스 외곽에 있는 야곱의 샘에서 물을 떠다가 부어주었고, 라빈은 답례의 표시로 상대방의 머리에서 검은색 케피예를 벗겨 손의 물기를 닦았다.

라빈과 친구하기로 작정했으므로, 아라파트는 그걸 확실한 우정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라빈은, 무조건 총부터 쏘라는 말밖에 할 줄 몰랐던 샤미르와 달랐다. 그는 식민지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성장했다는 것을 세련되게 인정했다. 임무가 끝나면 자발적으로 다시 들어가는 알라딘의 램프 요정 지니와 달리, '돌들의 세대'는 아무리 주문을 외워도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조건 밀어붙이고 넘어뜨리고 부러트리는 것이 효과를 보았다. 병사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총질했다. 잡으면 무조건 팔을 벽이나 바닥에 대고 돌이나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연행한 후에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고통을 주었고, 훈방시킬 때도 반드시 부러뜨린 후 내보냈다. 그렇지만 그 때뿐이었다.

조상 다윗이 팔레스타인인으로 국적변경을 했는지 놈들은 양손에 돌을 쥐고 태어났다. 오른팔을 부러뜨리면 왼팔로 돌을 던졌다. 그것도 부러뜨리면 입으로 돌을 물어 날랐고, 전쟁영화 주인공처럼 온몸에 총알을 몇 개나 맞고도 죽지 않았다.

그렇다고 램프에 다시 집어넣기 위해 허구한 날 주문만 외울 수도 없었다. 이러다가는 야훼께서 말씀하신 '카이로에서 유프라테스까지'는커녕, 현재의 영토조차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었다. 상당수가 정신질환에 시달렸으며, 제대나 소집 해제 후에는 집에 돌아가서도 자기 가족들을 팔레스타인인들처럼 취급했다.

심지어 밀폐된 공간은 어디든 점령지인줄 착각하고 여자들을 성추행했고, 창문 밖으로 던져 죽이는 놈들도 속출했다. 그래야 다른 놈들이 자기를 무서워한다고 자랑했다.

이런 식의 통치방식은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이야. 라빈은 생각했다.

미국이 매년 30억 달러씩 지원했고, 때로는 1백억 달러의 뭉칫돈을 뒷주머니에 쑤셔주기도 했지만, 점령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동족들이 미국정부를 쥐락펴락해도 직접 모든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국제사회의 비난에 민감한 그들은, 총만 쏘지 말고 다른 방법도 좀 찾아보라고 충고했다.

더 큰 문제는 식민지의 저항이었다. 예전에는 어떤 문제도 하루나 이틀이면 해결되었다. 그저 탱크와 불도저로 밀고 들어가 총을 몇 방 쏜 후에, "너야?" 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만사 오케이였다.

그런데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래, 나다!"하고 모두가 손에 짱돌을 들고 튀어나왔다.

좋다! 짜증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겠다. 너희가 지니라는 것을 자백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요술램프를 만들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겠다. 그것이 남아공 백인정부가 고안해 낸 '반투스탄 자치정부*'였고, 공식 명칭은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였다.

주민들을 몇 개의 도시형 수용소*에 분산 수용한 후 현지인 수용소장으로 하여금 동족들을 책임지도록 한다. 그리고 스스로 메뉴를 정해 밥해먹고 햄릿공연을 준비할 자치를 부여한다. 나머지 문제는 프로크루스테스침대를 사용해 해결하겠다.

넘치면 추방하고 모자라면 더 부화시키겠다. 그렇지만 후자의 가능성은 없었다. 계속 수용소 크기를 줄여 가면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수용소장은 정해져 있었다. 후원금이 없어서 '잊어지고 있는 영웅*' 야세르 아라파트였다. 그는 다 뜯어먹어, 남은 것이라고는 뼈다귀밖에 없는 가지지구 일부와 예리코를 봉토로 하사받은 후 함께 외국에서 생활했던 부하들을 데리고 금의환향했다.

비록 점령자들처럼 무조건 총부터 쏘지 않았지만 점령군을 대신하여 동족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불법 감금과 고문을 일삼았으며, 정적들을 암살하고 비판적인 신문은 발행을 정지시켰다.

아라파트가 "후세 역사가 알아줄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슬로 평화프로세스의 핵심은 간단했다.

수용조건은 개떡 같아도 천국처럼 여기며 살아라.

우리들은 최소한의 현실에서 최대한의 꿈을 꾸면서, 영원히 만족하고 살아야 했다. 그것이 하마스와 이슬람지하드,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이 목숨을 걸고 '평화협상'을 거부하는 이유였다.

검문소의 뒤편 언덕 꼭대기에는 붉은색 지붕의 불법정착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죽은 파리의 몸에서 밀려나온 알 덩어리 같았다. 눈살이 찌푸려진 사피나는 쥐고 있던 손수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택시 안에는 기사를 포함해 여덟 명이나 타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아라파트를 옹호하던 뒷자리의 50대 초반 남자는 파타당원이었다. 머리에 두른 검은색 체크무늬 케피예로 알 수 있다.

지금 그것은 자치정부의 표식이지만, 한 때는 군인들의 사격용 표적지였다. 그것을 두른 자는 누구든 쏴죽이라고, 총리가 직접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조국영토를 상징하는 녹색과 인민의 피를 상징하는 적색, 순결한 흰색과 암흑과 투쟁하는 의지를 표현하는 검은색이 들어간 모든 것은 불법이었다. 그것들은 팔레스타인 국기를 상징했다.

파타당원이 신음처럼 내뱉은 말은, "그래도 아라파트는 우리의 지도자요."였다. 그 말은 희망 잃은 자의 처연한 울음으로 들렸다.

논쟁을 벌이던 상대방 남자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작년 12월 둘째 아들을 잃었다고 한다.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에서 이스라엘 관광장관 레하밤 지비를 암살한 후였다. 샤론은 직후 살해범들을 내놓으라며 자치도시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탱크와 아파치 헬기, F-16 전투기를 동원하여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아라파트 역시 라말라 정부청사에 감금되었고, 지금까지 갇혀 있다. 

민족통합당 당수였던 지비는 그들 내부에서조차 극단의 인종주의자로 기피되었던 인물이다. "아라파트는 히틀러이니까 집에 있을 때 통째로 폭사시키고, 팔레스타인인들은 데야르 야신에서의 경험을 살려 최대한 제거한 후 나머지는 국외 추방하자!" 그의 주장이었다. 당연히 샤론은 박수치며 호응했다.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이 그를 암살했던 것은 해묵은 개인적 원한 때문이거나 더러운 인종주의자여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샤론정부가 <능동적 방어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국가테러의 필연적 결과였을 뿐이다.

샤론은 점령지에 대한 무차별 살육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또 다른 도발수단을 찾아냈다. 바로 독립투쟁단체 지도자들에 대한 표적살해였다.

무장 저항했거나, 할 것으로 의심되는 조직의 지도자나 인물들을 찾아내 먼저 죽여라.

혐의만으로 살해하는 행위는 국제법상의 국가테러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대부 미국은 이스라엘을 테러국가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부시는 감금된 아라파트를 향해, "거기 숨어있지 말고 빨리 나와 테러리스트들이나 단속해!"라고 다그쳤을 뿐이다.

비열한 자들. 아라파트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가.

아라파트가 우리들에게 저항을 중단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그냥 두 발 달린 짐승으로 살자고 강요할 수 있을까. 지도력을 상실한 지 오래된 그에게, 동족들을 살해하는 일에 떨쳐나서라고 요구하는 저의는 분명했다.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함으로써, 무제한적 폭력의 빌미로 삼겠다는 것. 그것은 '평화'라는 이름으로 평화를 짓밟는, 침을 뱉는, 그리고 그것을 증오의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 1960년대 남아공화국 백인정권이 반투족을 격리하고 인종분리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설정한 보호령이다. 남아공정부는 특정지역에 원주민을 몰아넣고 국가로 독립했다고 인정해주었다. 그리고는 원주민들을 필요할 때마다 끄집어다가 사용했다. 식민지주민에 대한 책임은 전혀 지지 않고 노동력만 착취하는 가장 악랄한 지배방식이었다.

* 68년에 입안된 노동당의 알론계획에는, 점령지의 40%를 병합하고 나머지 땅에 원주민들을 몰아넣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리쿠드당은 단 한 뼘도 줄 수 없으므로, 주민들을 모두 제거하거나 시리아나 이라크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92년에 수립된 샤론계획은 점령지를 11개의 고립되고 단절된 구역으로 나누어 몰아넣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  제1차 걸프전 당시 아라파트는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을 지지했다. 그 결과 그는 걸프국가들로부터 출입금지조치를 당했고, 매년 수억 달러에 이르던 후원금조차 모두 끊어졌다. 또한 쿠웨이트에 살던 40만 명의 팔레스타인 동포사회는 궤멸되어 대부분 국외 추방되거나 '대이라크 협력자'로 몰려 체포되고 피살되었다.


태그:#팔레스타인, #오슬로협정, #아라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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