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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가르며 대한민국 지도를 바꾸어 놓은 백릿길(33,9km), '새만금 방조제' 준공 이후 군산은 공단입주 기업과 관광객이 크게 늘고 인구도 꾸준히 증가하면서 서해안 시대의 희망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 8일(금) 오후 2시 군산 대학로 거리에서 펼쳐진 퍼레이드를 시작으로 오는 24일까지는 월명종합경기장, 은파관광지, 해망동 수산물센터, 비응항 광장 등지에서 '2011 군산 새만금축제'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군산에서는 매년 벚꽃 개화시기에 맞춰 벚꽃예술제, 수산물축제, 체육대회 등 크고 작은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군산시는 올해부터 행사를 하나로 묶어 '군산 새만금축제'로 통합, 관람객과 함께할 수 있는 25개 축제 및 행사가 열이레 동안 이어진다.

 

한편 '새만금 국제마라톤 대회'는 12000여 명의 달리미들이 비응항 광장을 출발, 야미도, 신시도, 배수갑문을 지나 방조제 중간지점을 돌아오는 코스로 새만금 축제 마지막 날(24일) 개최되며 마라톤을 끝으로 축제가 마무리된다.

 

부족한 농지 대책으로 시작한 사업, 정치적으로 이용해

 

새만금 방조제는 1991년 11월 노태우 정부에서 착공하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쳐 추진되었으며, 2010년 4월27일 역사적인 준공식을 거행하고 8월2일 세계 최장 방조제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새만금'이란 명칭이 처음 선보인 시기는 1987년 11월2일로 전해진다. 당시 정인용 부총리 주재로 열린 관계 장관 회의에서 황인성 농수산부 장관이 '서해안 간척사업'을 처음으로 '새만금간척사업'으로 사용했던 것.

 

새만금 사업은 전북 옥구군 옥서면을 중심으로 한 금강, 만경강, 동진강 하구를 둘러싼 갯벌을 개발하려는 '옥서지구 농업개발계획'에서 주변 농경지 배수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1단계(금강하굿둑 건설)와 2단계(김제지구 방조제 축조)로 나누어 출발하였다.

 

그러나 1987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바람에 국가적 명분을 퇴색시켰다. 농지부족 대책을 위해 시작한 사업임에도 낙후된 전북 지역의 개발을 명분으로 언제 들어설지도 모를 공업 용지를 늘려놨기 때문.

 

김철규 전 전북도의회 의장에게 듣는 '새만금' 이야기

 

 

전북일보 기자 시절(1978년) 신문 지면을 통해 '새만금 사업'을 최초로 공론화해서 화제를 모았던 김철규(72세) 전 전북도의회 의장(1991-1993)에게 새만금 사업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 의장님 안녕하세요. 고향이 섬이라고 들었습니다. 

"예, 야미도에서 태어나 주변 섬들과 수평선만 바라보며 자랐어요. 섬 산봉우리에 올라 나는 언제나 육지에 갈 수 있을까? 하고 수없이 생각했지요. 군산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육지에 발을 디뎌본 적이 없는 '쌩' 섬 놈이었어요." (웃음)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에 육지로 유학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교육열이 높았던 아버지 덕으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럼에도, 안강망 어업을 하던 아버지는 제가 중학에 입학하자 재산을 모두 팔아 군산으로 이사해서 살았습니다."

 

-언제부터 새만금 사업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는지요?

"집에 작은 목선이 한 척 있었는데, 뭍으로 나오려면 무척 불편했어요. 야미도에서 밀물에 맞춰 출발해서 바람이 잘 불어주면 좋지만, 그렇잖은 경우엔 수로를 따라와도 수심이 낮아 운항을 못하고 배를 만경강 중간지점에 세워 놓고 밀물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때 어른들은 망둥이나 숭어 낚시를 하면서 언젠가는 만경강을 막아 육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바다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는 불편을 여러 번 겪으면서 저도 어른들과 생각을 같이 하게 되었어요. 걸어서 갈 수는 없을까? 하고."

 

-새만금 관련 기사를 쓰게 된 동기는?

"익산역 열차 폭발사고(1977년 11월)로 익산 주재기자를 할 때였어요. 당시 '새 이리'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수습이 잘 되어가니까 시간에 여유가 생기더군요. 해서 익산지방 국토관리청에 들러 청장과 국토 개발문제를 놓고 의견교환을 했어요.

 

그때 군산에서 고군산을 거쳐 변산반도까지 막으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제시했더니 청장이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하더군요. 국토 확장은 물론 식량안보 해결의 핵이라고 판단되어 그동안 가슴에만 담아두고 있던 생각들을 공론화하기 위해 기획취재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상황과 기사 내용을 조금만 설명해주세요.  

"데스크와 국장단 동의를 얻어 1978년부터 '서해안 지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방지이지만, 전북의 가장 유력지였기 때문에 국책사업으로 책정될 때까지 꾸준히 기획기사를 내보내기로 했지요.

 

기사는 제1차, 제2차 사업으로 나눠 내보냈습니다. 1차 사업은 군산시 비응도에서 야미도, 신시도를 이어 변산반도까지 연결하고, 2차 사업은 100년이 걸리더라도 충남 마서면에서 군산시 옥도면 개야도, 선유도, 전남 광양까지 연결하는 대단위 국토확장 사업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썰물 때면 만경강, 동진강의 수로를 빼고 모두 갯벌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제방만 쌓으면 엄청난 농토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그런데 미친 짓이라며 핀잔도 많이 들었습니다. 당시엔 편집국에서도 허무맹랑하다고 했으니까요."

 

- '새만금' 뜻을 모르는 사람이 많던데요?

"군산~부안을 연결하는 33.9km의 방조제와 광활한 농지 예정지를 상징하는 '새만금'은 김제·만경의 농지를 새롭게 확장한다는 뜻이 담긴 신조어입니다. 예부터 김제·만경 들녘을 '금만평야'라 했는데 '금만'을 '만금'으로 바꾸고, 새롭다는 뜻의 '새'를 붙였기 때문입니다. 금만평야 같은 옥토를 일궈내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지요. 제가 처음 기사를 쓸 때도 서해안 국토확장을 위한 '대단위 간척사업'일 뿐 특별한 명칭이 없었습니다."

 

- 취재를 시작하고 언제 보람을 느끼셨는지?

"정부가 검토하기 시작한 1983년으로 기억합니다. 그 후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태우 후보가 공약사업으로 내세웠으나 당선 후 의지표명이 없자 1991년 7월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노 대통령과의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약속을 받아냈지요.

 

그해 11월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에서 노 대통령을 포함한 관계부처 장관, 전북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했는데요. 당시 저는 도민을 대표하는 전북 도의회 의장으로 참석해서 테이프커팅을 했습니다. 처음 기사를 다뤘던 언론인 출신으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새만금 사업은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새만금 사업은 경제, 문화, 환경 등 중요하지 않은 게 없는데요. 첫째 통일에 대비해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량 쪽에 무게를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이야 쌀이 남아돌지만, 훗날을 생각해야지요. 식량이 넉넉해야 경제도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다음으로는 세계인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국제공항, 최첨단 과학단지와 농업·산업 복합도시, 국제 해양 관광단지, 글로벌 물류 허브를 위한 항만 배후단지 조성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먼저 육지와 연결되었던 섬(야미도) 출신으로 어느 날 통일이 되면 국토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리라 예견해왔다는 김 전 의장. 그는 "새만금 사업은 최대의 보람이며 좌절을 안겨주기도 했다"라며 "내 인생과 더불어 25년을 함께 해왔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김철규 전 의장은 경희대학교 법학과를 졸업(1965년)하고, 전북일보 편집부국장, 논설위원(1968~1990), 제15대 대통령선거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후보 중앙당 유세위원회 부위원장(1997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중앙선대위 유세연수본부 부위원장(2002년), 금융결제원 상임감사(2003년~2006년) 등을 지냈으며 2010년 3월 정계를 은퇴하고, 지금은 <군산뉴스> 편집인으로 후배 언론인들을 돕고 있다. '기자수첩' <아니다, 모두가 그렇지만은 않다> 외 네 권의 칼럼, 논문집을 펴냈다.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새만금사업, #새만금축제,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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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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