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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편찮으세요?"

마트장을 보고 돌아오다 평소와 달리 허리를 구부리고 느린 걸음걸이로 마주오던 팔순이 넘은 동네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연세에 비해 허리도 꼿꼿하고 매일 걷기운동으로 동네 울타리 길을 도는 정정한 어르신인데 오늘은 어디가 많이 편찮으신 것 같습니다.  
    
"배가 막 아프지 뭐야. 병원에 갈려구."

조금 더 가서 큰 길만 건너면 바로 상가이고 병원은 상가 3층에 있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 오세요."

하얀 목련꽃이 구름처럼 피었지만 오늘따라 바람이 불고 조금 춥습니다. 그런데 어르신은 모자도 쓰지 않았고 머플러도 두르지 않았습니다. 외투만 입고 나온 것을 보면 배가 아파오자 경황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파마끼가 풀린 흰머리칼들이 바람이 불 적마다 흩날리는 뒷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그 뒷모습을 향해 소리쳐 물었습니다. 

"근데 왜 혼자 가세요? 며느님과 같이 안 가시구요."

대답이 없습니다. 어르신은 큰 길을 향해 느릿느릿 가고 있습니다. 몸이 불편할 때는 모든 것이 귀찮고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는 법입니다. 나는 그냥 돌아서서 가던 길을 갑니다.

아픈 배 움켜쥐고 꾸부정하게 서 계시던 어르신

어르신은 막내 아들네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막내 며느리는 효부입니다. 어르신이 울타리길 걷기운동을 나가서 제 시간에 돌아오지 않으면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보고 쫓아가기도 하는데 오늘은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입니다.

잔디밭이며 길섶에는 풀들이 파랗게 올라왔습니다. 냉이와 꽃다지가 그새 꽃대를 세우고 꽃을 피웠습니다. 망초풀과 보리뱅이는 탐스럽게 피었습니다. 장바구니가 은근히 무겁습니다. 장바구니 속에는 요즘 한창 나오고 있는 하얀 제주 무가 한 개, 동태 두 마리, 미나리 한 단, 모시조개 한 봉 그리고 남편이 좋아하는 노란 인절미 한 팩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어르신의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장바구니를 추스려 들고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어르신은 큰 길 횡단보도 앞에 서 지나가는 차들이 뜸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단지 아파트 안 상가 앞 길이라 승용차들이 많이 다닙니다. 물론 신호등은 없습니다. 가만 보니 어르신이 아픈 배를 두 손으로 누르고 느리게 횡단보도에 들어서려고 하면 승용차가 나타나고는 합니다. 매번 그래서 어르신은 한 걸음도 떼어놓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배가 고통스럽게 아프지만 않다면 어르신은 평소처럼 왼손을 높이 들고는 가볍게 길을 건너갔을 것입니다. 

보다 못한 내가 종종 걸음을 치는데, 그만 한 발 늦었습니다. 키가 큰 할아버지 한 분이 큰 길로 나서더니 왼손을 들어 저만큼에서 달려오는 승용차를 정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자, 건너요, 아주 천천히 천천히 건너도 괜찮아요."
"고마워요."

할아버지의 모습은 든든한 방패막이 같았습니다. 비슷한 연세인 두 분은 아는 사이로 보입니다. 어르신 옆에 선 내가 할아버지께 고맙다는 눈으로 목례를 하자 할아버지는 어서 건너가라는 손짓만 합니다.

나는 장바구니를 들지 않은 손으로 어르신의 손을 잡았습니다. 차거운 나뭇가지를 잡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도 일흔이 넘은 노인이지만 어르신 연세가 되려면 한참 멀었고 또 건강합니다. 내 건강한 체온을 나누어 주는 마음으로 어르신의 손을 조금 더 꽉 잡았습니다.

어르신의 느린 걸음대로 큰 길을 건너가면서 보니까 그새 왼쪽에 승용차들이 줄을 섰습니다. 중앙선을 넘어서자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달려오던 승용차가 조용히 멈추었는데 이내 그 뒤로 두 대의 승용차가 줄을 섰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느릿느릿 길을 다 건너갈 때까지 기다려 주었습니다. 요즘 말로 그야말로 '착한 승용차'들입니다. 

"냉이를 많이 먹었더니... 며늘애 돌아오기 전에 가야해"

상가 안으로 들어서자 훈기가 느껴졌습니다. 어르신은 잠시 서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머리칼들도 쓸어올렸습니다. 상가는 3층 건물이라 엘리베이터가 없습니다. 3층에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가정의학과가 있습니다. 뒤따라 온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오늘 왜 걷기운동 안 나오셨나 했더니 편찮으시군요."
"체했는지 배가 막 아파요. 병원에 가는 길이라구요."

두 어르신은 동네 울타리길을 도는 걷기운동을 하면서 알게된 사이였습니다. 햇살이 퍼진 따듯한 낮에는 동네 울타리 길을 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뭘 잡수셨길래?" 
"냉이가 눈을 밝게 해주구 변비에도 좋다길래 초고추장에 무친 걸 많이 먹었어요."
"아이구, 초고추장에 무쳤다니, 위가 놀랐겄네요. 우리 노인네들은 맵게 먹으면 안 되요. 다음부턴 된장에 싱겁게 무쳐서, 것두 조금씩만 드세요. 아무리 좋은 것도 과하면 해로운 법이라구요. 어서 가세요. 난 저기 문방구에 뭐 하나 사러왔어요." 
   
층계 앞까지 왔습니다. 어르신은 미안해 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습니다.

"이젠 혼자 가도 된다구."
"저도 같이 가 드릴게요."
"괜찮다니까. 하필 요런 날 며늘앤 몸살이 와서 찜질방엘 갔지 뭐야. 며늘앤 나 아픈 것도 모른다구"

며느리가 몸살이 온 것입니다. 며칠 전에 마트에서 며느리를 만났습니다. 김치가 떨어졌다고, 금 쪽같은 배추를 여섯 포기인 두 망은 사야만이 한동안 잊어먹고 먹을 수가 있다고 하더니 아마도 그 가녀린 몸으로 혼자서 김치를 해놓고 나서 몸살이 온 모양입니다. 

막 층계를 올라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어르신이 두 손으로 배를 움켜잡고 소리쳤습니다. 

"아이구 쌀 것 같아!"

화장실을 향해 뛰어가는 어르신의 모습이 어린아이만 같습니다. 얼마 후 어르신이 화색이 도는 얼굴에 아주 시원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펴고 화장실에서 나왔습니다.

"아무것두 아니었지 뭐야. 병원 안 가두 된다구. 집에 가서, 있는 위장약 한 병 마시고 배를 따듯하게만 하면 된다구."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진료를 받아 보세요"
"아무것도 아닌데 생돈을 왜 쓰나. 빨리 가자구. 며늘애가 돌아오기 전에 가야해. 며늘애가 요런 거 알면 걱정한다구. 아마 냉이도 다시는 안 사올거야."

어르신은 앞장 서서 상가를 나섰습니다. 나는 그런 어르신의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장바구니를 반대쪽 손으로 바꿔 들고는 어르신의 뒤를 따라 갑니다. 그런데 마음이 왜 그리 편치가 않는지를 모르겠습니다.    


태그:#어르신 , #냉이 초고추장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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