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되면서 초등학교는 반 임원선거와 전교 임원선거로 활기가 넘쳤습니다. 전교 회장과 부회장을 뽑는 선거는 아이들끼리 공약을 짜고 피켓도 만들어 운동원들이 후보자 선전을 하는 등 간섭과 제약 없이 진행되는 즐거운 잔치 분위기입니다.

올해 우리 아이는 친구의 선거운동을 도왔습니다. 자신이 피켓 구호를 생각해 냈다며 좋아했습니다. 아침마다 이른 시간에 등교해 구호를 외치며 선거운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아이가 밀었던 친구는 부회장으로 당선되었고 아이는 "걔는 착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니까 잘 할거야"라며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우리 아이가 반 임원이 되는 바람에 아무런 지식 없이 들어간 학부모회에서 겪은 갖가지 일때문입니다.

아이가 임원됐는데, 왜 엄마가 더 바쁠까

소싯적에 잘 나갔던 나도 기껏 해본 게 부반장이었는데, 내가 낳은 아이가 반장(요즘은 회장이랍니다)이 됐다니 참 뿌듯했습니다. 선생님이 후보자를 지목하지 않고 원하는 사람이 출사표를 대신하는 연설을 한 후 아이들의 비밀선거를 통해 뽑았다고 합니다. 저학년까지는 2주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회장, 부회장을 하더니 고학년은 직접 선거로 반 임원을 뽑고 한 학기 동안 반 대표를 맡는다고 합니다.

제 어릴 적에는 아무나 반장 후보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선거 전날 점심시간에 "내가 반장이 되면 점심시간을 두 시간으로 늘리겠습니다!"라고 획기적인 출사표를 던져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던 당돌한 아이는 정작 선거 당일에 후보자로도 오를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적순으로 후보자를 미리 칠판에 적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시절은 달라졌고 학교도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중학교만 가도 '스펙 쌓기'의 일환으로 임원이 되려고 안달이라지만 아직까지 초등학교는 성적순으로 후보자를 제한하지도 않고 선생님의 강압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후보자를 선택하고 표를 던져 자신의 투표권을 당당히 행사합니다. 인기투표와 크게 다를 바 없긴 하지만….

아이가 반장이 되고나니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습니다. 듣자하니 임원 학부모들은 학교에 자주 가야 한다는데 직장을 다니면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을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음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교장은 금지한 것들, 왜 학부모들은 하려고 하나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부회장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학부모회의를 해야 하는데 회장 엄마가 왜 가만히 있냐고 하더군요. 모임 자리에 저와 여자 부회장, 남자 부회장 어머니가 모였습니다. 남자 회장 어머니는 집안 사정으로 학부모 활동을 할 수 없다면서요. 그러니까 제가 그 모임을 이끌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교실에 화분도 놔야하고 선생님 드실 차도 챙겨야 해요."

"어린이날, 스승의 날도 있잖아요."

"현장 학습 가는데 반티 맞춰야 하지 않을까요?"

"때때로 아이들 간식도 넣어야 해요."

학부모회 경험이 있는 엄마의 지도 아래 챙겨야 할 것들이 죽 열거됐습니다. 물론 다 돈으로 해야 할 일들입니다. 이건 아니다 싶어 한마디 건넸습니다.

"선생님까지 우리가 챙겨야 하나요?"

"올해 새로 오신 교장 선생님은 현장학습 때나 행사 때 선생님들 도시락 챙기지 말고 선물도 절대 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잘됐구나 싶었는데 반론이 쏟아집니다.

"선생님들이 하지 말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돼요."

"선물 사양하는 선생님 본 적 없는 거 같은데…."

"단속이 심해지니까 그렇게 말한 모양인데 '하지 마라'가 진짜 '하지 마라'가 아닐 걸요. 몰래 하라는 거지!"

그 말에 엄마들이 박장대소했습니다. 따라 웃기는 했지만 동의할 수는 없었지요. 설왕설래 끝에 임원 엄마들만 10만 원씩 걷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다른 반에서 간식 넣었다는 얘기 들으면 조바심만

남편, 자식 속도 몰라 헤매는데 이젠 선생님 속내까지 알아야 한다니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선생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것이 우둔한 짓이라니 할 말이 없었습니다. 어찌되었든 반티는 맞춰야 하고 간식 비용도 필요했으므로 돈 추렴은 해야 했습니다. 남으면 임원 엄마들 저녁식사나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회의 뒤에도 엄마들은 수시로 문자를 보내 다른 반이 어떤 물건을 사다 반에 비치했는지, 어떤 간식을 넣었는지 제게 부지런히 전해 주었습니다. 다른 반에 밀리지 않게 알아서 잘 하라는 뜻입니다.

사무실에서도 수시로 엄마들의 문자를 받았고 행사가 있을라치면 며칠 전부터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현장학습 가는데 몇 반은 선생님 도시락 준비한다고 하는데 우리 반은 어쩔 거냐는 것이지요. '안 하면 안 되냐'고 하면 그랬다가 선생님들끼리 밥 먹는 자리에서 우리 반 선생님만 도시락 없으면 안 되는 거라고 합니다.

선생님 도시락 준비하지 말라는 학교장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몇 통화가 오고 간 끝에 결국 오색 색깔의 과일과 야채를 준비해 선생님께 전해야 했습니다. 스승의 날 선물은 각자 알아서 했습니다. 고민 했지만 결국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물론 흔쾌히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뇌물로 비치지 않도록 선물 가격을 조절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가치관과 현실 사이에서 타협한 셈인데 잘했다는 생각은 결코 들지 않았습니다. 다른 반에서 간식을 넣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저절로 조바심이 났으며 학기말에 간식을 보내고 나서야 좀 안심이 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이 하지 말란 건, 진짜 하지 말란 게 아니다?

저를 찾는 사람은 반 임원 엄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퇴근길 버스에서 졸고 있는데 얼굴도 모르는 전교 학부모회 임원이 전화를 했습니다. 반 임원 학부모들은 저절로 전교 학부모회 구성원이 됐습니다.

"전교 학부모회 임원회의를 했는데 결과를 알려드려야 해서요."

"네… 무슨 일이신지요."

"반 임원들은 회비로 10만 원씩 내기로 했습니다. 강제적인 것은 아닙니다."

"반에서도 걷었는데, 또 따로 내야 한단 말인가요?"

"네, 학교 일에 써야 하는데 예산이 없어서요."

"저는 그것이 아이들은 위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약간 억양이 높아진 저에 비해 시종 차분했던 그분은 마지막까지도 쿨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불법 거출인데다가 그 용도도 명쾌하지 않을 테니 강제적으로 걷을 수 없겠지요. 너무 어이없는 일이라 여기저기 수소문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전교 학부모회 임원은 훨씬 많은 액수를 내기로 했답니다. 그러니까 반 임원 학부모들에게 배당된 10만 원은 약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회의 결과는 과거 임원들의 의견이 전폭적으로 반영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선생님들이 하지 말라는 것은 정말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폈고, 경험 없는 부모들은 그저 따르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전해들었습니다.

저학년 때도 학부모 총회에 나온 몇몇 엄마들이 모여 2만~3만 원씩 반 회비를 걷어 반티를 맞추고 아이들 간식도 준비한 적이 있기에 반 회비를 걷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고학년이 되니 선거를 통해 임원을 뽑아서인지 임원 학부모가 회비를 준비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여러 명이 걷던 것을 3~4명이 걷으니 액수가 높아진 점이 부담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고학년이 되면 전교 학부모회 회비까지 내야한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습니다. 그것도 학교 측에서 엄연히 금지하는 일인데 말입니다.

'학부모 회비 거출'로 험악해진 학교 분위기

마음이 통하는 몇몇 학부모들에게 회비를 걷는 일과 그것을 거절한 얘기를 했습니다. 대부분 깜짝 놀라는 분위였지만 더 큰 아이가 있는 학부모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학부모회 임원들이 돈 걷는 것은 오랜 관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아이가 임원이 되어도 아예 학교에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동네 엄마들과 이러쿵저러쿵 하는 동안 학교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끼리끼리 뒷담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둔한 저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뭣도 모르는 초짜 엄마들 때문에 힘들다'는 전교 학부모회 임원의 푸념은 직접 내 귀에 전해졌고, 다른 학년에서도 회비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학부모회 담당 선생님에게 항의까지 했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분위기가 살벌하다 느꼈는데 회비 거출이 학교장에게까지 보고되었던 것입니다. 학부모회 담당선생님은 학부모회 회의 자리에서 전교 회비는 물론 반 회비도 일절 걷지 말 것을 공식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우리반은 통장으로 입금했던 반 회비를 모두 돌려주기로 했고 꼭 필요하면 그때그때 모아서 하자고 결론을 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잘됐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전해듣기로, 전교 학부모회 임원회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고 합니다. '비겁한 밀고자' 성토대회가 열렸답니다. 임원 중 한 명은 회비 거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분위기가 너무 험악하고 계속 얼굴 봐야 하는 학부모들 사이에서 '밀고자'로 소문날까 봐 소신을 펼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학교 분위기가 워낙 좋지 않아 거출 범위를 좁히기로 했고 전교 학부모회 회장과 부회장, 총무와 감사만 회비를 내기로 했답니다. 그렇게 모은 회비는 학교행사 데코용 화분을 사 나르는 데 썼고 나머지는 선생님들의 선물비용으로 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학교 발전의 걸림돌 혹은 종결자, 학부모

자식이 임원 되는 덕에 덩달아 들떴던 저는 임기 내내 눈치와 뒷담화, 경쟁이 난마처럼 얽힌 학교 풍경을 목격했습니다. 학교가 달라졌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순진하다'는 비아냥을 들어야했습니다.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직장에 아쉬운 소리 하는 것보다 교사와 학부모들의 이런저런 소문과 뒷담화를 듣고 신경 쓰는 게 더 고단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떳떳하지 못했습니다. 임기가 끝나자 패잔병의 쓰라림이 느껴졌습니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새 학년이 된 아이에게 앞으로 학교 임원 선거에 절대 출마하지 말 것을 종용했습니다. 해결책을 찾지도 못하고, 고발할 용기도 없으며, 독야청청하기도 어려운 학부모는 그저 학교를 멀리하는 게 상책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올해 전교 학부모회는 임원으로 선출된 아이의 학부모가 대거 불참하는 바람에 다른 분들이 학부모 임원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반 임원 학부모들 중에도 여러 가지 핑계로 학교에 아예 오지 않은 사람도 많았답니다. '하지 말라는 말이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챙겨주는 거 싫어하는 사람 없다'는 말이 다시 학부모회의 금과옥조가 된다면 지난해 같은 일은 무한 반복될 것입니다.

학부모들끼리 몰래 벌이는 일이므로 교사의 책임도 없으며 당국에서도 간섭할 근거가 없습니다. 회비를 흔쾌히 내지 못하는 학부모는 아이가 임원이 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일 뿐입니다. 학교에 무엇인가를 제안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돕고 싶어도 이런저런 눈치가 보여 지레 포기합니다.

동네마다 학교 분위기가 다른지 어떤 학교는 회비 거출을 학부모 선에서 중단시켰다고 합니다. 학교운영위원회 위원이던 학부모가 회식비 운운하는 선생님께 '회식비 준비 안 하셨어요?'라고 용감하게 되물었답니다. 이후 교사들의 회식비가 학부모 지갑에서 나오는 일은 없어졌다고 합니다.

물론 여러 번 고비가 있었을 것이며 또 다른 일화를 만들어내면서 교사와 학부모들이 서로 바라고 대접하는 분위기를 없앴으리라 생각합니다. 공교육이 발전하고 학교가 바뀌는 데 학부모는 걸림돌이 될 수도, 종결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나쁜 관행을 깨는 행동으로 인해 아이가 입을 수도 있는 피해 앞에 둔감할 수 없는 '새가슴' 학부모가 대부분이라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