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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이라는 공간은 본래 분주함과 무관심으로 가득찬 공간이다. 그 속에서 저마다의 목적지로 바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주변의 것들에 큰 관심을 주지 않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하철역에 설치된 사랑의 열매 모금함에서 지난 한 달간 모여진 모금액은 100만 원에 달한다. 누군가에게는 바쁜 와중에도 나눔을 실천한 여유가 있었다는 말이다. 모금회의 전체 모금액에서 지하철 모금액이 차지하는 비율은 높지 않다. 하지만 분명 의미 있는 수치이다. 지하철 모금함이야 말로 생활 속 나눔을 실천하는 가장 대표적인 창구이기 때문이다. 대다수가 무심코 지나치는 모금함, 여기에 소소하지만 따뜻한 나눔을 실천하는 주인공을 직접 만나기 위해 기자단이 나섰다.

 

 '기부자'를 찾다


취재는 명동역에서 이뤄졌다. 가장 많은 모금액이 회수되는 역 중 하나이자, 잠복 여건이 가장 좋은 이유 때문이었다. 빨간 사랑의 열매 로고가 유난히 돋보이는 명동역 모금함은 개찰구를 빠져나오면 바로 정면에 보이는 기둥 앞에 자리 잡고 있다. 기자단은 모금함 주변이 잘 보이는 카드 정산기 뒤의 좁은 공간에서 기부자를 기다렸다.

 

취재 당일 서울의 아침온도는 영하 10도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신문지 몇 장을 깔고 앉은 바닥은 차갑기만 했다. 명동역에서 근무하는 이명승(서울메트로 주임)님은 "아직까지 제 눈으로 모금함에 돈을 넣는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라며 말을 건넸다. 막 취재를 시작한 기자단에게는 힘 빠지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분명히 모금함에서 돈이 회수되었던 만큼 오늘 취재를 통해 그 주인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되새기면서 잠복을 시작했다.

 

오전 6시 반. 이른 아침의 명동역은 한산했다. 일찌감치 출근하는 직장인들만이 총총걸음으로 지나다닐 뿐이었다. 방금 명동역을 떠난 열차와 곧 도착할 열차 사이의 한산한 풍경의 명동역은 새로운 느낌이었다. '명동역의 발견'이랄까. 러시 아워가 절정에 다다르기 시작하면서 명동역에 도착하고 떠나는 열차의 횟수도 증가했다. 덩달아 수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렸다. 대부분 모금함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는 11시. 명동역 지하상가의 점포들도 하루 장사를 시작했다. 비로소 본래 명동역의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드러난다. 한국 사람들과 외국인 여행객들, 점포 직원들이 뒤섞여 분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때껏 모금함은 비어있는 상태였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모금함 주변을 맴돌지만 모금함에 눈길을 주지는 않았다. 모금함이 시민들의 짐 선반으로 활용되고 있는 모습도 종종 포착되었다.

 

오후 4시. 명동역은 사람으로 한가득이었다. 수많은 젊은이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하상가에서 쇼핑을 하는 사람들, 약속한 이를 기다리며 서 있는 사람들로 역 안은 만원이었다. 종종 모금함 앞을 서성거리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들이 눈에 띄었지만, 성금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안타까운 모습(?)이 계속 포착되었다.


'기부자'를 발견하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시계는 오후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때, 드디어 모금함에 기부를 하는 시민이 등장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홍콩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박총채씨었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단에게 그는 "크게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인터뷰까지 하느냐"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겨우 설득해서 박총채씨를 붙잡고 어떤 생각으로 여기에 모금을 했는지 물었다. "특별한 동기는 없어요. 그냥 모금함이 보이기에 돈을 조금 넣었을 뿐입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습니까"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현재 사업차 살고 있는 홍콩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기부할 수 있는 기회가 많으며 이것은 당연하고 일상적인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에서 부쩍 이슈가 되고 있는 기부문화에 대한 생각을 묻자, "기부는 엄청난 큰 일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직까지 한국인들에게 나눔이 일상화 되진 않은 것 같지만, 앞으로 계속 좋아질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더 이상의 인터뷰는 사양하겠다며 수줍을 미소를 보인채 역을 빠져나갔다. 짧은 대화였지만 여운을 남기는 말들이었다.

 

첫 번째 기부자를 만나 부쩍 밝아진 기자단은 두 번째, 세 번째 주인공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취재를 이어나갔다. 두 번째 기부자는 오후 7시께 나타났다. 강원도 인제에 살고 있는 방혜경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개찰구를 빠져나와 순식간에 성금을 하고 지나가는 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하마터면 주인공을 놓쳐버릴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기자단의 인터뷰 요청에 놀란 것처럼 보이던 그녀는 이내 "나눔에 대해서는 항상 마음에 가지고 있었어요. 적은 액수이지만 기부(유니세프나 ARS)를 꾸준히 해왔습니다"라며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평소에 지체장애우 복지시설인 애향원에서 정기적으로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 따뜻한 마음은 서울에서도 이어져, 약속이 있어 방문한 명동역에서도 모금함을 보고 바로 돈은 넣었다고 말했다.

 

"아직 우리사회의 나눔과 기부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날씨도 꽤 추워졌는데 이럴 때일수록 관심과 나눔 실천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에서는 나눔을 이어나갈 거예요" 마지막 한 마디를 멋지게 남겨준 그녀에게서, 인자한 우리네 엄마와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음을 나누다


어느덧 시간은 밤 10시가 넘어가 있었다. 취재를 마무리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껏 인산인해를 이루며 정신이 없던 명동역은 이미 꽤 조용해진 시점이었다. 아침의 모습과는 반대로,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개찰구로 들어가 명동을 떠나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더 이상 새로운 기부자가 나타나지도 않았고 취재도 마무리되어 갔지만, 새롭게 시작될 내일과 그 이후에도 이곳에 기부를 할 사람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오늘 만큼은 두 명의 기부자가 있었기에 빛났던 명동역이었다. 두 기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두 주인공 모두 '일상 속에서의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나눔이 몸과 마음 모든 면에서 익숙해져 있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당연한 것을 취재하겠다고 나선 기자단이 이상해 보일 만큼 말이다. 취재를 마친 기자단의 얼굴에는 먼지가 붙어 있었고 목은 따끔따끔했다. 하루 종일 지하철역에서 먼지를 마신 까닭이었다. 하지만 두 기부 주인공을 만날 수 있었기에 웃으면서 명동을 떠날 수 있었다.

첨부파일
명동취재.jpg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나눔#사랑의열매#명동역#모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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