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슬람 왕국의 퇴각로를 따라 가다 만난 시에라네바다 산맥

알함브라 궁전에서 바라 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바라 본 그라나다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코르도바에서 점심을 먹고 이슬람 왕국의 퇴각로를 따라 그라나다로 향했다. 두 도시간의 거리는 160㎞로 두 시간쯤 걸린다. 그라나다가 가까워지면서 시에라네바다의 산줄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가까운 곳이 올리브 등 유실수로 초록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반면, 더 멀리 높은 산봉우리에는 하얀 눈이 뒤덮여 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최고봉은 물라센(Mulhacen)산으로 높이가 3,478m나 된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에는 해발 3,000m가 넘는 고산이 20개나 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은 일 년의 절반 이상을 하얀 눈이 뒤덮고 있어서 스키 등 겨울 스포츠의 천국이다. 안달루시아 지방을 관통해 흐르는 과달키비르 강이 이곳 시에라네바다 산맥에서 발원해 북쪽 사면을 따라 그라나다 평원으로 흘러든다. 그라나다 사람들은 이 강을 헤닐(Genil)이라 부른다. 시에라네바다 산자락 헤닐 강변에 자리 잡은 그라나다는 해발이 738m나 되며, 인구는 23만 8천 명이다.

석양의 알함브라 궁전
 석양의 알함브라 궁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그라나다가 본격적으로 커지게 된 것은 1238년 그라나다를 수도로 하는 나스르 왕조가 열리면서부터다. 일명 그라나다 왕국이라고 불리는 이 나라는 이후 250여 년간 고유한 이슬람 문화를 만들어나갔다. 이들 문화의 결정체가 14세기 중반 만들어진 알함브라 궁전(La Alhambra)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중세 이슬람 건축의 백미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다.

우리는 그라나다 시내를 지나 알함브라 궁전으로 향한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라나다 남동쪽 아사비카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경사진 길을 올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올라가는 길에 그라나다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그라나다는 무슬림과 유대인들의 거주지인 알바이신 지구와, 기독교도들의 거주지인 레알레호와 알카이세리아 지역으로 크게 구분된다. 여기서 잠깐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애증 속에서 번성했던 그라나다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압딜은 이사벨과 페르디난드에게 그라나다의 통치권을 넘겨준다.

그라나다 왕국의 영역
 그라나다 왕국의 영역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1228년 알 모하드 왕조의 왕자 이드리스가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자, 귀족이던 이븐 알 아마르가 실권을 잡고 카스티야의 페르디난드 3세와 타협해 1236년 코르도바를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그 반대급부로 1238년 그라나다를 수도로 왕국을 세우고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무하마드 1세 이븐 나스르다. 그는 1272년까지 그라나다, 알메이라, 말라가 등 시에라네바다 산맥 전역을 통치하면서 나스르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그라나다 왕국은 북아프리카와 유럽을 잇는 교역에 주력하면서 경제적으로 번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스르 왕조는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카스티야 왕국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해야 했고, 1400년대 들어 왕위계승 분쟁을 겪으면서 점차 약해졌다. 1480년대 들어 해안의 중요도시인 말라가와 알메이라를 잃었고, 1492년 무하마드 12세(일명 보압딜: Boapdil)는 카스티야와 아라곤 연합 왕국에 그라나다의 통치권을 넘기고 북아프리카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보압딜의 어머니는 우는 아들을 향해 "네가 남자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더니 마치 여자처럼 우는구나"라면서 한탄했다고 한다.

그라나다 왕국의 최후
 그라나다 왕국의 최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그라나다 왕국을 정복하고 레콘키스타를 완성한 에스파냐 왕국은 처음에는 무슬림과 유대인들과 공존정책을 폈다. 그러나 카스티야 지역에서 기독교도들이 들어오면서 점차 기독교화 돼 갔다. 모스크들은 기독교 교회로 바뀌었고, 빕 람블라 광장 주변에 대성당과 왕실 예배당이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 왕실 예배당에는 그라나다를 정복한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드 왕 그리고 그들의 딸과 사위인 후아나 여왕과 펠리페 1세가 묻혀있다.   

알카사바 요새의 전망

우리는 알함브라 광장에서 내려 에스파냐 현지 가이드와 만난다. 그들이 이미 표를 사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구아 탑을 통해 바로 궁전 안으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우리 가이드로부터 알함브라 궁전의 중요유적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듣는다. 먼저 알카사바와 카를로스 5세 궁전을 보고 나사리 궁전으로 간다. 나사리 궁전은 알함브라 궁전의 중심으로 이슬람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여름궁전인 헤네랄리페로 가서 건축과 정원의 조화를 살펴볼 예정이다.

산타 마리아 성당
 산타 마리아 성당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알카사바로 가는 길에 우리는 산타 마리아 성당과 카를로스 5세 궁전을 지난다. 알카사바는 알함브라 궁전을 지키는 요새로 안으로 들어가려면 비노문(Puerta del Vino)을 통과해야 한다. 이 문을 지나 알히베스 광장에 서면 요새의 성벽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표를 찍고 알카사바의 망루인 쿠보탑으로 올라간다. 이슬람 건축에서는 탑으로 올라가는 길이 계단이 아닌 경사로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쿠보탑에 오르니 알바이신 지구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 완벽하게 조망된다. 그리고 가까이 나사리 궁전의 외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탑을 내려온 나는 알카사바의 안마당인 아르마스 광장을 지나 아르마스 탑으로 올라간다. 이곳에서는 궁전의 남쪽지역을 완벽하게 조망할 수 있다. 멀리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봉우리들이 보인다. 궁전을 감싸고 있는 숲을 이루는 활엽수들은 겨울이라 그런지 잎을 모두 떨군 채 가지들만 앙상하다.

벨라탑에서 바라 본 알바이신 지구
 벨라탑에서 바라 본 알바이신 지구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이들을 거쳐 마지막에 올라간 탑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벨라탑(Torre de la Vela)이다. 이곳은 전망대이자 종탑으로 알함브라 궁전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이다. 동쪽으로 가까이 나사리 궁전과 카를로스 5세 궁전이 보이고, 서쪽으로 조금 멀리 시내 중심에 있는 대성당과 왕실예배당이 보인다. 그리고 남쪽으로 저 멀리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보이고, 북쪽으로 가까이 알바이신 지구가 보인다. 전망대에는 유럽연합,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그라나다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카를로스 5세 궁전의 색다름

카를로스 5세 궁전
 카를로스 5세 궁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알카사르를 내려와 우리는 카를로스 5세 궁전(Palacio de Carlos V)으로 간다. 이 궁전은 신성로마황제가 된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5세의 명으로 건축가 페드로 마추카(Pedro Machuca)가 1528년부터 짓기 시작했다. 이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전위적인 양식이었다. 궁전 입구의 벽면 장식을 통해 매너리즘적 요소도 확인할 수 있다. 건물은 가로, 세로 63m의 정사각형이며, 그 안에 원형의 중정(中庭)을 배치했다.

입구를 보면 가운데 큰 문이 있고 양쪽으로 두 개의 작은 문이 있다. 이들 문 사이와 양옆으로 네 개의 부조가 있는데, 가운데 두 개는 천사의 축복을, 가장자리 두 개는 이슬람 군대를 물리치는 에스파냐 군대를 표현했다. 기둥의 양식은 1층과 2층이 다른데, 1층은 투산식이고 2층은 이오니아식이다. 또 벽의 모양도 1층과 2층이 다름을 알 수 있다. 1층이 타일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마감을 했다면, 2층은 콘크리트를 바른 것처럼 좀 더 인공적으로 마감했다.

카를로스 5세 궁전 내부(원형)
 카를로스 5세 궁전 내부(원형)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궁전 밖에서는 안이 원형으로 되어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안으로 들어가야 원형의 회랑이 건물을 감싸고 있으며, 그 가운데가 완전한 원형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건축 구조는 판테온 같은 로마시대 건물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회랑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1층의 기둥은 도리아식으로 2층의 기둥은 이오니아식으로 되어 있다. 이 원형 공간은 또한 소리가 잘 들리도록 음향을 고려해 만들어졌다. 그래서 원형의 한 가운데서 말을 하거나 소리를 내면 그 소리가 회랑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크게 잘 들린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카를로스 5세는 이 궁전에 한 번도 살지를 못했다. 그는 정치와 경제 등에서 에스파냐를 부흥시키느라 그라나다를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도 1561년 수도를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옮기면서 남쪽으로 내려올 일이 거의 없었다. 이때부터 그라나다는 역사 속에서 점점 잊혀져가는 도시가 되었다.

마티스전을 알리는 표지판
 마티스전을 알리는 표지판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현재 카를로스 궁전은 예술박물관(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층에서는 10월 15일부터 2011년 2월 28일까지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전이 열리고 있다. 여기 와서 앙리 마티스 그림을 만나게 되다니. 20세기 초 미술계를 대표하는 세 개의 유파가 입체파, 야수파, 표현파다. 입체파의 대가는 에스파냐 출신 피카소고, 야수파의 대가는 프랑스 출신 마티스며, 표현파는 러시아 출신 칸딘스키다. 그러나 단체로 왔으니 나만 이 전시회를 볼 수는 없다. 아쉽지만 나는 카를로스 5세 궁전을 나와 알함브라의 하이라이트인 나사리 궁전으로 향한다.


태그:#그라나다, #나사리 왕조, #알함브라 궁전, #알카사바, #카를로스 5세 궁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