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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20대에 대해서 인터넷 커뮤니티나 혹은 SNS에서 늘 강조되는 말은 청춘답지 않다는 것이다. 한참 청춘일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 청춘답지 못하다는 꼬리표가 늘 붙어있다.

그렇다면 대관절 청춘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일찍이 민태원은 <청춘예찬>이란 글에서 청춘이란 그야말로 생동하며 약동하는 것이며 끓는 피이며 순수한 존재라고 외친 바 있다.

순수하고 이성적이며 열정적인 것, 그것이야 말로 유년도 노년도 가지지 못한 청춘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앞서 지금의 20대에게 너희가 청춘이 맞나? 라고 묻는 기성세대의 물음에도 민태원의 <청춘예찬>에서 말하는 청춘은 살아있다. 그들의 비난은 곧 지금의 20대는 순수하지 못하며, 들끓는 열정이 없다는 말이다. 이는 곧 순수하고 이성적이고 열정적이지 않은 청춘은 청춘이 아니니 지금의 20대는 청춘이 아니란 의미이기도하다.

청춘이 앞서 언급한 그런 것이라면 분명 지금의 20대는 청춘이 아니다. 생존권을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 앞에 학습권을 이야기하고 생존권만큼 우리의 학습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20대. 사회학 서적 대신 기꺼이 토익 책을 들고 공무원 수험서를 들고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20대는 민태원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노년이지 결코 청춘이 아니다. 그래서 일면 성장과 지성인으로서의 대학생, 청년으로서의 대학생이란 담론에서 20대를 바라본다면 지금의 20대는 한심하고 미약하며 나약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정말 지금의 20대가 그러한가? 어찌되었건 오늘날의 20대는 도시의 빌딩 숲 사이에서 숨 쉬고 바삐 움직이고 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대학생이란 이름으로 대학도서관에 있고 수강생이란 이름으로 학원가를 누비고, 아르바이트생 혹은 인턴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의 현장에서 그들은 서있다.

20대는 실존하고 있고, 상당부분 우리사회는 그 20대를 주축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제 20대를 읽어내는 담론으로 옮겨가야 하지 않을까? 즉, 우리는 지금의 20대는 왜 순수한가? 열정적이지 않은가? 아름답지 않은가? 를 물을 것이 아니라 왜 우리 사회는 20대를 바르게 보지 못하는가? 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바로 이 문제에 전면으로 대응하고 있다. 저자가 20대의 대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하면서 얻은 나름의 결론을 정리한 이 책은 20대를 위한 언어와 20대를 바로보기 위한 틀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이는 저자가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덕성여대와 연세대 원주 캠퍼스의 학생들과 나눈 소통의 결과이므로 이를 일반화하기는 이를 것이다. 또한 혹자는 사례의 협소함을 들어 이것이 20대는 아니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 수록된 오늘날을 살아가는 20대의 생(生) 목소리는 사례의 협소함이나 일부의 목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시사하는 바가 너무나도 크다.

그들의 목소리가 외치는 것은 그들은 기존의 세대와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이다. 실질적인 민주화는 미완성일지 모르나 이미 민주화가 완성된 시대에 태어났고 텍스트의 세계가 아닌 영상의 세계에 태어난 20대에게 기존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나 텍스트에 대한 찬양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름을 기성세대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그런 세대에게 기성세대들은 그들이 청춘시절 열광했던 잣대들로만 지금의 20세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20대가 말하는 불만은 여기에 있다. 결국 문제는 틀에 있다.

이 책은 그런 20대를 위한 틀 찾기라고 할 수 있다. 20대가 제 언어를 가지고 제 틀을 찾아간다면 20대를 보는 시각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음을 이 책의 저자는 몸소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저자는 다른 틀로서 20대를 보고자 함으로서 이 세대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징과 다른 점들을 발굴하였고 이를 통해 이 세대를 이해하고 있다.

게으르다 나태하다. 현실적이다, 지나치게 아이 같다는 잣대 대신에 치열하다, 호모루덴스 적이며 정치를 몰라서가 아니라 정치를 알아서 염세나 부정으로 세상을 보는 세대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의 평가가 100% 옳은 것은 물론 아니다. 또한 그 잣대만으로 현재의 20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른 잣대를 가지고 옴으로써 20대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잘못된 것은 지금의 20대인가 아니면 지금의 20대를 보는 낡은 시각인가?

어린세대, 젊은 세대를 향한 기성세대의 비판은 늘 존재해 왔다. 허나 그 비판이 비난이 아닌 비판으로 가능했던 것은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의 잣대로는 이해 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40,50대에게 그런 아량이 있는지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닌가? 라는 말이 단순한 물음이 아니라 절규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에 수정 후 게재됩니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

엄기호 지음, 푸른숲(2010)


태그:#서평 , #책읽기,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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