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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4일

(PM 8:04) 출국심사를 마치고 탑승할 항공기 게이트 앞에 앉았다. 어머니 또래 단체관광객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그나저나 공항에 온 직후 봤던 환전소 여직원과 조금 전 마주했던 심사대 여직원 표정이 쌀쌀맞기 그지 없다. 말처럼 쉽지 않겠지만 숱한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첫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몫임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PM 8:15) 비행기 몸 안으로 들어왔다. 기내방송 중인 필리피노 스튜디어스의 발음이 약간 어색하다. 탑승 직전 무척 부산하고 고집스런 꼬마가 내 가방에 위에 놓아둔 물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아이에게 줄곧 화를 내던 젊은 엄마가 또 소리쳤다. "아줌마꺼야, 만지지마!" 33살이면 아줌마여도 무방한 나이지만, 기분이 좋진 않다!  
 
앞으로 4시간여 동안 나의 운명을 싣고 태평양 상공을 비행할 세부퍼시픽 항공.
 앞으로 4시간여 동안 나의 운명을 싣고 태평양 상공을 비행할 세부퍼시픽 항공.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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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라, 미스 필리핀 얼마나 이쁘노. 빵긋빵긋 웃으면서. 마술한다 아이가 잘봐라. 비둘기 나온데이. 한국 아들(여자들)보다 훨씬 이쁘다." 

안전수칙을 설명하는 현지 스튜디어스를 보고 바로 뒷좌석의 부산 아저씨가 농을 늘어놨다. 친구인 듯한 옆의 아저씨는 낄낄거렸다. 그리곤 이륙과 동시에 술판을 벌였다. 가뜩이나 작은 기내에 술과 안주 냄새가 진동한다. 몇 줄 앞칸의 금발의 외국인이 눈을 흘깃거린다. 속으로 이 아저씨들을 어찌 생각할까. 내 얼굴이 화끈거린다.

(PM 11:28) 잠에서 깼다. 텁텁하고 불쾌한 공기 때문에 환기 욕구를 느꼈다. 하지만 금세 몇 천 피트 상공에 있음을 깨달았다. 아저씨들의 '음주 민폐'가 계속이다. 세부퍼시픽 항공 내에서 발견한 특징 하나는 모든 먹거리를 판매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차 안 같다. 두 다리를 쭉 뻗고 싶다. 여행 중에는 사소한 바람이 진심으로 간절해진다.
 
출발한 지 4시간 15분. 드디어 막탄세부공항에 비행기가 안착했다.
 출발한 지 4시간 15분. 드디어 막탄세부공항에 비행기가 안착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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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5일

(AM 12:50) 곧 착륙을 앞둔 기체 창 밖으로 아래로 처진 반달이 보인다. 암흑을 뚫고 나온 땅 위엔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세부시내 야경이 펼쳐져 있다. 조급한 승객들이 벌써부터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안전벨트에 의지해 있다. 

(AM 1:00) 현지시각 자정. 드디어 막탄세부공항에 도착했다. 소음이 잦아들고 비행기가 멈춰섰다. 4시간30여 분 전의 삶과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삶의 연결고리가 '철컥' 채워지는 느낌이다.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 했다.   
 
세부에 있는 나흘 동안 묵을 게스트하우스
 세부에 있는 나흘 동안 묵을 게스트하우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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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2:00) 다시 입국 심사를 거쳐 수화물을 찾고 택시를 타고 숙소를 잡는 데 딱 1시간 걸렸다. 공항 앞에 대기 중이던 택시에 오르기 전 어학원 직원이 알려준대로 적정 요금을 받는 지 확인했다. 그리고 추천받은 세부시티의 한 호텔로 향하는 중에 기시가 저렴한 신축 게스트하우스를 귀띔해 주었다.  

행여나 방을 알아보는 사이 짐을 가로채려는 게 아닌 지, 괜스레 시간을 끌어 요금을 더 받으려는 심산은 아닌 지 의심했으나 기우였다. 외국인 여행객에 대한 사심없는 배려였다. 'Allson's Inn'이라는 이 숙소의 하루 숙박비는 790페소(한화로 약 2만 원). 구식 에어컨과 스프링 없는 물렁한 침대지만 제법 깨끗하고 아늑하다. 

여장을 풀고 한숨을 돌리니 깡 말라 커다란 눈이 움푹했던 택시기사의 말이 묵직히 떠올랐다. 필리핀을 찾는 일부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무례하진 않냐는 내 질문의 답이었다.

"녜, 욕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웃음)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한국 남자들 대부분이 필리핀 여자친구가 있어요. 여기 여자들도 필리핀 남자보다 한국 남자를 더 좋아해요. 그런데 한국 남자들은 바람둥이예요. 내 여동생이 한국 남자를 안 만나길 바라요." 

조금 전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현관에 있던 경호원이 에스코트를 해주었다. 야구공처럼 둥글고 작은 두상에 눈이 예쁜 젊은 청년이었다. 혹시나 해서 "팁을 줘야 하냐"고 묻자 내 어깨를 살짝 치며 "괜찮다"고 했다. 잇단 현지인들의 친절 앞에 손익 계산을 하고 있는 본인이 부끄러웠다.

오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 결국은 현실이 되었다. 어젯밤 궁금해했던 이곳의 냄새는 가벼운 비가 대지를 적신 한국의 초여름과 닮았다. 감기가 심했는데 따뜻한 날씨 덕에 좀 가라앉는 것도 같다. 세부에 있는 나흘 동안 줄곧 이 숙소에 머물기로 했다. 덕분에 할인도 받았다. 무거운 짐을 끌고 다시 길을 나서는 것도 귀찮거니와 그냥 그리해도 좋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twitter ID : sindart77 새로운 꿈을 향해 가는 혼자만의 여정에 매력적인 벗들과 멘토의 응원이 필요합니다.


태그:#세부시티, #한국인관광객, #민폐중년, #필리핀여행, #공정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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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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