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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화 기업호민관이 17일 아침 서울 종로구 수송동 기업호민관실에서 기자들을 만나 사퇴 배경을 밝히고 있다.
 이민화 기업호민관이 17일 아침 서울 종로구 수송동 기업호민관실에서 기자들을 만나 사퇴 배경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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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로마시대 호민관들은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대부분 순교하거나 암살당했다."   

로마시대 '민중의 대변자' 호민관처럼 정부 안에서 중소기업 목소리를 대변해온 이민화 기업호민관이 물러나면서 뼈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3년 임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갑작스런 사퇴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이 호민관은 17일 아침 서울 종로구 수송동 기업호민관실에서 기자들을 만났다.  

벤처기업가 출신인 이 호민관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도 "호민관의 독립성이 훼손되면 규제 개혁은 안 된다"면서 "호민관실이 통제받는 시점이 내가 물러날 시점"이라고 단호하게 밝혔다. 도대체 그동안 기업호민관실에선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호민인덱스 추진 과정에서 독립성 훼손" 

기업호민관('중소기업 옴부즈만')은 지난해 7월 중소기업의 규제 애로를 발굴해 정부 정책에 반영할 목적으로 마련됐다. 국무총리가 위촉하는 초대 기업호민관에는 의료기기 벤처기업 메디슨 창업자인 이민화 KAIST 초빙교수가 선임됐다.

자체 직원 없이 중소기업청에서 파견된 10여 명의 공무원들로 꾸려진 기업호민관실은 태생적 한계에도 지난 3월말 10년 묵은 공인인증서 의무화를 폐지하고 민원인 보복 금지 정책을 마련하는 등 중소기업 규제 해소에 다양한 역할을 해왔다.(관련기사: 공인인증서 뚫은 스마트폰, 다음은 '인터넷 실명제')
    
특히 기업호민관실에서 지난 7월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사례를 바탕으로 내놓은 공정거래 대안들이 9월 29일 정부의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추진대책'에 상당 부분 반영되면서 이른바 '9.29 선언'의 산파로도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현 정부와 밀월 관계는 여기까지였다. 지식경제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 기관들이 9.29선언에 따라 동반성장위원회 구성, 동반성장지수 개발 등 '대중소기업 상생' 전면에 나서면서 기업호민관실의 입지가 애매해진 것이다. 당장 호민관실에서 지난 7월부터 대중소기업의 공정거래 수준을 평가하기 위해 준비해온 글로벌 평가 지수인 '호민인덱스'에 불똥이 튀었다.

호민관실에서 10월 12일 호민인덱스 공청회를 열기로 했으나 정부에서 동반성장지수와 비슷하다며 중단을 요청한 것이다. 이미 공지된 행사여서 공청회는 예정대로 열렸지만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하지 못했다.

당시 호민관실에선 '호민인덱스'가 동반성장지수의 일부로 포함되길 바란다며 5대 기업(삼성전자·현대자동차·포스코·KT·SK텔레콤)을 대상으로 한 시범 조사도 유보하기로 했다. 

이 호민관은 "당시 동반성장지수 개발이 연말까지 완료된다는 조건으로 시범 조사를 유보했지만 올 연말까지 어렵고 내년 상반기 안에 끝내도 다행이란 걸 알게 됐다"면서 "내년 상반기가 지나면 9.29선언으로 모처럼 달아오른 분위기가 냉각될까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실제 이미 많은 중소기업들이 11~12월 대기업과 단가 협상을 앞두고 불공정거래가 되살아나고 있다고 호소해 왔다는 것이다. 

"상부 지시 받은 호민관실 파견 직원들이 업무 거부"

이민화 기업호민관
 이민화 기업호민관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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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민관이 사퇴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중소기업청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의 조직적인 '태업'이었다. 이 호민관은 호민인덱스 시범 조사 필요성을 확인하려고 최근 14만 중소기업과 이메일로 소통해온 '호민 레터'를 통해 서면 실태 조사에 나서려 했지만 파견 직원들이 이를 거부했다. 

이 호민관은 "상부의 지시를 받은 파견 직원들이 이메일을 보내라는 지시를 거부해 내 개인 메일로 보냈다"면서 "공청회 관련 요청과 시범 실시 보류는 수용했지만 실태조사 금지는 수용할 수 없었다"며 직접적 사퇴 이유임을 밝혔다.

호민관실 파견 직원들이 중소기업청 소속임을 감안할 때 지원 부처인 중소기업청 문제로 볼 수도 있지만 이 호민관은 특정 개인, 부처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 부처 전체의 문제임을 강조했다.  

이 호민관은 "그동안 중소기업청의 적극적 지원으로 타 부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문제부터는 우리가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독립성이 훼손됐다"면서 "호민관실이 특정 부처 통제에 있다고 생각하면 타 부처에서 그 부처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중소기업청은 직접 통제를 안 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밝혀 중소기업청 윗선이나 타 부처 개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민화 "엄청난 상부 지시" vs. 중기청 "호민관 월권"

특히 이 호민관은 이 과정에서 "엄청난 상부의 지시가 떨어졌다"고 밝혀 청와대가 개입한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이 호민관은 "대통령의 의지는 100% 믿는다"면서도 "(호민인덱스 문제와 관련) 청와대에 몇 번 항의하기도 했지만 네거티브(부정적)했다, 포지티브(긍정적)했다면 그만둘 이유 있나"라고 밝혔다.  

또 한편에선 호민인덱스뿐 아니라 그동안 중소기업 입장에서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온 호민관실에 반감을 품은 대기업이 개입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 호민관은 "주변에서 대기업 역할론을 우려하는 얘기도 있지만 그렇기야 하겠느냐"면서 그 가능성은 일축했다.

박치형 중소기업청 대변인은 이날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기업호민관은 중소기업 규제 정비와 민원 처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호민인덱스를 개발하는 건 법적인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라면서도 "동반성장지수와 겹치는 문제 때문에 파견 직원들이 만류하고 기다려 달라고 요청한 것이지 조직적인 업무 거부는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 호민관은 "이번 일을 계기로 호민관실이 독립적으로 운영되길 바란다"면서 호민관실 인사와 예산 독립을 법적으로 보장하고 무급 비상근 호민관을 상근 호민관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아울러 차기 호민관도 중소기업 단체 추천을 받아 선출하는 등 호민관실을 반관 반민화해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표면적으로는 호민인덱스 개발을 둘러싼 부처 간 갈등 문제지만 한편으론 민간 전문가를 초빙해 놓고도 독립성 보장이나 현실적 지원에는 인색한 현 정부 '생색내기 정책'이 한계에 부딪힌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호민관은 "어제 총리실에 사퇴서를 제출했더니 내용을 잘 모르는 것 같더라"면서 "어제 오늘 정부에서 보인 반응은 청와대 중소기업비서관이 '계속 해달라'는 전화 한 통 한 게 전부"라고 섭섭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용경 창조한국당 의원은 이날 논평에서 "형식은 자진 사퇴지만 정부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라면서 "불공정거래의 현실을 호민인덱스라는 이름의 지수로 만들어 발표하겠다는 호민관의 의욕이 불편했던 모양"이라고 현 정부를 꼬집었다.

기업호민관은 중소기업 규제 애로를 해소할 목적으로 지난해 7월 설립됐다.
 기업호민관은 중소기업 규제 애로를 해소할 목적으로 지난해 7월 설립됐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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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기업호민관, #이민화, #중소기업청, #대중소기업동반성장, #대중소기업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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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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