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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는 언제나 반갑다. 그런데 그런 목소리는 대개 일방적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운전 중인데 전화가 왔다. 번호가 낯설어서 무시할까 했지만 뭔가 느낌이 있었다. 차를 세우고 받았는데 역시, 느낌이란 틀리는 법이 없구나 싶었다.

 

 "사람이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형님은 혹시 생각해본 적 있으십니까."

 

 전화기 저편에서 후배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너무 뜬금없는, 기습적인 질문이라서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그는 또 무슨 말을 했는지 이런 것들은 지금 하나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남은 것은 다만 하나 이것뿐이다.

 

 "그럼 형님, 어머님 모시고 행복하시고요. 안녕히 계십시요."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는가? 아니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예정인 것인가? 너무나도 궁금하고, 느낌이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걸려온 전화번호로 내가 다시 전화를 걸고자 했지만, 그쪽에서 받을 수 있는 전화가 아닌 것 같았다. 핸드폰이 아닌 일반전화였고, 공중전화라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훔쳐먹은 삼립빵의 추억 그리고 괴로움

 

 내가 이 집으로 이사를 올 무렵의 어느 하루 집수리를 돕겠다고 달려온 후배가 저녁에 아주 진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형님에게 고백할 것이 있다고, 들어주시겠느냐고, 그런 전제를 달고 시작한 일종의 고해성사 같은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 동생과 함께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빵을 훔쳐 먹었는데 그 빚을 서른다섯 살에 갚았다는 내용이었다. 서른다섯 살에 이르러서야 그날의 일이 생각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고, 그래서 공사장 막노동을 하고 받은 임금을 들고 찾아갔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구멍가게는 연전에 학교가 폐교되어 개점휴업 상태였지만 젊은 아주머니가 백발의 할머니로 바뀐 것 외에 주인은 그대로였다고 했다.

 

 "계산을 해보니까 이십팔 년 전이더라고요. 빵값에다가 이십팔 년 동안의 이자를 복리로 쳐서 드렸어요. 그리고 제 양심의 무게를 돈으로 환산한다는 게 우습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돈으로 쳐서 드렸는데 할머니가 그러시는 거예요. 어디 하늘나라에서 살다고 오시었소? 하고, 그러시는데 그때 어찌나 부끄럽던지, 그렇지만 이제는 편안합니다, 예, 제가 그동안 세상을 살면서 줄곧 괴로웠던 원인이 바로 이십팔 년 전의 그 일 때문이었구나 싶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래서인지, 지금은 얼마나 편안하지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그는 헤헤, 하고 천진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흡사 마지막 남은 숙제 하나를 해결한 사람의 그것 같았다. 그는 아마 이십팔 년 전에 훔쳐 먹은 빵 값을 치른 것만으로는 뒷맛이 개운치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마치 대자보라도 써서 붙이듯이, 증거라도 남기듯이 자신의 비행을 자기 입으로 확인해두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자네는 역시 속세간에서는 살아가기 어렵겠구만."

 "속세간이 반성을 해야 할 부분은 없는 걸까요?"

 "꿈도 크다."

 

 대학 선생이 자기 체질에 딱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알게 된 지도 벌써 십 년이 다 되어간다. 그는 그 무렵에 대학원 박사 과정 다니던 것을 접고 외가에 내려와 있었다. 외가에 머물며 책을 보다가 외출을 했는데 발길이 미당 서정주 생가에 닿았다고 했다. 거기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내 얘기를 들었고, 만나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처음 만나던 날부터 그는 마치 자신의 내장을 꺼내 보이듯이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갔는데 역전 근처 사창가 중심이었다는 이야기, 부모가 이혼을 하는 바람에 중학교 2학년에서 학교를 중단하고 공장 생활을 했던 이야기,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얻은 뒤에 방송통신대에서 국문학을 공부했다는 이야기 등등을 그는 마치 오래 헤어져 있었던 아우가 형을 만나 '형 나 이렇게 살았어' 하듯이 술술 아무 거리낌 없이 꺼내놓고 있었다.

 

 방송통신대를 마친 뒤에 그는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시장에서 반찬 가게를 하는 등으로 어지간히 자리가 잡힌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서해 연구로 석사 논문을 썼는데 그것이 아주 우수하고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지도교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그 자신도, 어머니도, 지도교수와 선배들도 모두 그가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성장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대학교수, 그것은 마치 예약된 극장표처럼 아주 가까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의자인 것처럼 여겨졌다. 지도교수는 말했다. 우수한 선배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그 안에서 답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선배들은 가끔 그를 대동하고 지도교수나 학과장 댁을 방문하곤 했다. 그때마다 선물꾸러미가 있었다. 선배들의 수첩에는 지도교수나 학과장의 생일이며 주요 일정이 적혀 있었고, 가족의 이름과 생일 등이 또 적혀 있었다. 선배들은 그것을 서로 꺼내놓고 맞춰보기도 했다. 그리고 후배에게도 그것을 받아 적어놓으라고 했다.

 

 "공부보다 중요한 게 그것이라고 하는데 그것 참,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뭐냐고 했더니 이게 상식이라고, 그러는데 뭐랄까요, 완전히 혼돈 속으로 빠져 버렸다는 기분이더란 거죠. 흔해빠진 말로 진리탐구를 위해, 그러니까 마음속의 갈등과 알 수 없는 것들을 해소하고자 학교를 갔는데 더 많은 갈등과 알 수 없는 것들이 쌓여버린 형국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는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다가는 갑자기 헤헤, 하고 천진한 아이처럼 웃고, 또 갑자기 자신의 입술을 뜯어먹을 듯이 질끈 깨무는가 싶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댔다.

 

 "우리가 먹는 굴비는 한 마리에 삼천 원짜리도 사실 어려운데요. 그런데 한 마리에 오만 원이 넘는 굴비도 있더라고요. 처음 알았어요. 그런 굴비를 선배들이 사서 들고 찾아가는 거예요. 자기들은 어떤 경우에 버스비도 떨어져서 걸어가는 그런 형편이면서 말이에요."

 

 그는 치욕이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때 그가 느낀 것은 극도의 치욕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치욕이 치욕으로 인식되지 않고 상식으로 해석되는 세상이었다. 그는 그러한 일상 속의 상식을 너무 빨리 알아버렸다. 아니 어쩌면 너무 늦게 알았다고 해야 맞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빨랐거나 늦었거나, 어쨌거나 시기를 놓친 형국이 되어버린 그는 갑자기 공부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머리나 좀 식힌다는 명분으로 외가에 내려왔지만, 다시 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농자 천하지대본을 따르고자 했으나

 

 그는 외가에 머물며 마을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짓기로 했다. 외가의 식구들이 모두 서울로 떠나 버렸기 때문에 집은 비어 있었고, 따라서 농사든 뭐든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농법은 전혀 현실에 부합되지 않았다.

 

 다들 제초제를 쓰는 시대에 그는 그것이 고엽제라 해서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논이건 밭이건 풀이 지천이었다. 쌀농사를 짓는 것인지 풀농사를 짓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새벽부터 저녁 어스름녘까지 뽑고 또 뽑아도 풀은 잡히지 않았다.

 

 풀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고추는 탄저병이 들기 시작했고, 주렁주렁 열린 것들이 채 익기도 전에 모두 죽어 버렸다. 벼농사 역시 잎마름병으로 이삭이 나오기도 전에 낙엽처럼 타 들어갔다. 일찌감치 농약을 친 주위의 다른 논밭들은 멀쩡했다. 그가 빌린 땅에만 무슨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 같았다. 땅 주인은 땅 다 버린다고, 당장 내놓으라고 야단을 치고 있었지만 그는 태연했다.

 

 "지난 수십 년간 농약에 의존하다 보니 작물들이 스스로 견디는 내성을 잃어버린 거예요. 이것은 사실 인간의 범죄행위가 되는 건데 말이에요. 이제라도 되돌려야 해요. 초기의 손해는 당연히 감수해야 하고."

 

 그야말로 꿈도 야무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을 어떻게 끌 것인가. 수확을 한다고 했지만 소작료에도 미치지 못했다. 계약은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결국 어머니에게 돈을 빌려서 소작료를 지불해야만 했다. 아들이 미구에 대학교수가 된다는 믿음으로 여기저기 아는 사람마다에게 소문을 뿌려놓은 어머니로서는 벼락도 그런 벼락이 없었을 터이었다.

 

 처음에는 아들이 일 년 정도 저러다 말겠지 하는 믿음으로 지켜보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 년 동안 그 고생을 다하고도 아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어머니는 결국 약간의 논과 밭을 아들 명의로 사 주었다. 그래라, 농사꾼들 속에서 보고 듣고 그러면서 글이나 써라, 하는 쪽으로 말하자면 전략을 수정하신 거였다.

 

 "우리 아들이 쓴 논문이 국회 도서관에도 있다는디, 아 그런디 저놈의 속이 당최 뭔 속인지 모르겠어라."

 

 어머니는 열흘이 멀다고 아들을 찾아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그렇게 노심초사하기를 삼 년여, 이제는 끝났구나 싶었던 것인지 어머니는 결국 아들을 따라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말았다. 아들과 함께 살겠다는, 아들과 함께 농사를 짓겠다는 어머니의 의지는 너무도 확고해서 아들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아들이 뭔가 좀 하려고 하면 "너는 들어가서 책 봐라" 하시고, 또 뭔가 하려고 밖으로 나오면 "너는 들어가서 글 써라" 하시는 거였다.

 

 아들은 궁리 끝에 어머니를 잠시 속이기로 했다. 내 손으로 직접 농사를 짓고 그 결과를 글로 쓸 것이라고 상세하게 오랜 시간에 걸쳐 설명을 하고 이해를 얻었다. 그것은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고, 따라서 어머니를 속였다고 보기만도 어려웠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와 아들이 사이좋게 농사를 짓게 되었지만,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충돌이 도처에 잠복해 있었다.

 

 어머니는 최소한의 농약은 필요하다는 쪽인 반면 아들은 담배를 끊듯이 단숨에 끊어야 한다는 쪽이었고, 어머니는 작물 외의 풀들은 한 포기도 남겨서는 안 된다는 쪽인 반면 아들은 풀과 섞여서 자라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도 가깝고 영양성분도 아마 골고루 함유되어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크고 작은 의견충돌 속에서 일 년이 지나고 이 년, 삼 년을 넘어서는 동안 모자간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아들은 여전히 느긋하게 웃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전혀 아니었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대학교수 자리를 앉아보지도 않고 걷어차 버린 아들, 글이나 쓸까 했지만 그것도 아닌 아들, 저놈이 정말로 농사꾼이 되려나보다, 문득문득 생각이 들 때마다 한숨이 바가지로 쏟아졌다.

 

 어머니에게 있어 아들은 이제 사람이 아니었다. 이상한 놈이었다. 아들은 그런 어머니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자 나름 갖은 노력을 다한다고 해보았지만 어머니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 상태로 계속 나아가면 모자간의 관계는 회복불능이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 즈음 그는 돌연 사라져 버렸다. 쪽지 한 장 남겨놓지 않고 집을 나가버린 거였다.

 

 속세간을 떠나도 속세간

 

 나는 그가 집을 나간 지 보름이 지나서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어머니는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한밤중에 전화벨이 울려서 받았더니 거두절미하고 그런 말씀을 하셨다. "갸가 죽었다고 안 하요."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나는 깜빡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연락이라도 경찰에서 온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점쟁이의 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점쟁이마다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점쟁이는 찾아가지 마세요, 절대로 자살 따위에 의존할 사람이 아니니까 마음 넉넉하게 갖고 기다리세요,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그렇게 안심을 시켜드리고자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그 순간에는 "그럴께라? 그렇겄지요 잉?"하시면서도 며칠 지나면 다시 점쟁이를 찾아가고, 거기서 안 좋은 말을 들으면 "내 죄여, 내 죄여" 하시는 거였다.

 

 그리고 11개월을 넘어서던 어느 날 아침 다시 전화가 왔는데 어머니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갸가 왔어라, 왔는디, 중이 되어버렸어라."

 

 사흘 뒤에 그가 나를 찾아왔다. 정말로 승복을 입고 있었다. 사미계를 받고 동안거까지 참여했다고 했다. 동안거 해제하고 일종의 휴가를 나왔다는 얘기였다. 결국 갈 곳으로 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나 그는 편해 보이지가 않았다.

 

 "보통은 행자 생활 일이 년 정도는 해야 계를 받는다는데, 저는 공부할 준비가 이미 되어 있는 것처럼 비쳐졌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에 비해 엄청 일찍 계를 받았는데요. 그런데 계를 받고 다음 달부터 월급이 나오는 거예요."

 

 그는 특유의 천진한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그리고는 이내 침울한 표정으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한참 뒤에 이어진 그의 이야기는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기초생활 수급자에게 매달 지급되는 돈이 삼십 만 원이 채 안 되는 걸로 아는데, 그런데 중은 먹고 입고 잠자리 다 보장되어 있고, 떡이며 과일이며 과자며 군것질거리는 절에 또 얼마나 많은가. 꽃이 보고 싶으면 언제라도 꽃을 보고, 차가 마시고 싶다면 언제라도 차를 마실 수 있으며, 사우나가 필요하면 사우나, 찜질방, 컴퓨터 인터넷, 없는 게 정말이지 하나도 없는 게 이즈음의 절간 생활인데, 그런데 기초생활 수급자보다도 많은 매달 지급하는 그 돈을 어디에 쓰라는 것인지, 저축을 하라는 것인지, 저축이 필요한 삶이라면 굳이 중노릇을 할 필요는 또 있는 것인지, 물론 중이라고 해서 이슬이나 공기를 먹고 사는 존재는 분명 아니고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나 싶으면서도 뭔가 불합리하고 상식이 몰각되었다는 느낌, 생각, 물론 그런 현실을 안 보고, 보면서도 안 본 걸로 하고, 그렇게 목불처럼 수행에만 전념하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무수히 해보지만, 그런 생각 뒤에는 다시 수행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수행이란 말인가 하는 마구니 같은 생각이 들고 일어나서 춤을 춘다고, 그래서 괴롭다고, 그는 중언부언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뒤로 이 년여, 그동안 그의 월급은 올랐을 것이고, 그는 또 오른 월급을 받고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지난 겨울 동안거 끝나고는 어머니를 찾아뵙지도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자신도 알 수 없는 만행에 나섰다. 그리고 어느 비 오는 날 나에게 전화를 해서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지 형님은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그는 왜 그런 질문을 내게 했던 것일까. 만행 중에 얻은 중간 답이 무엇이었던 것일까. 시간이 갈수록, 날이 갈수록 그의 목소리가 귀에서 꿈틀거린다. 그의 얼굴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그것을 털어버리고자 고사리를 꺾는다는 핑계로 산속을 헤매고 다녀봐도 풀리지 않는다. 대체 그는 어디로 갔을까. 이 땅에서 그가 발붙일 곳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태그:#상식, #원칙, #자연, #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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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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