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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면 창덕궁에 봄꽃이 만발합니다. 겨울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지요. 꽃이 피고나서야 삼삼와와 칠분서, 승화루 주변에 홍매화와 능수벚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겨울철 대조전화계는 썰렁하여 굴뚝만 무심히 바라보고 지나칩니다. 성정각 담 모퉁이에 있는 매화나무는 연륜 덕에 눈길을 끌지만 그 옆 진달래는 아무도 봐주지 않습니다. 매화, 산수유, 앵두, 철쭉꽃이 피기 전에는 낙선재 앞마당의 인기는 낙선재 꽃담에게 고스란히 내주고 맙니다.

봄철 창덕궁은 산수유, 앵두나무, 매화나무, 철쭉이 꽃 릴레이를 펼치는 낙선재 앞마당과 삼삼와와 칠분서, 승화루 영역이 가장 좋습니다.
▲ 삼삼와와 칠분서 홍매화 봄철 창덕궁은 산수유, 앵두나무, 매화나무, 철쭉이 꽃 릴레이를 펼치는 낙선재 앞마당과 삼삼와와 칠분서, 승화루 영역이 가장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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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서 4월까지 창덕궁에서는 꽃 릴레이가 벌어집니다. 선두주자는 후원관람지 생강나무와 낙선재 앞마당 산수유입니다. 대조전화계와 주합루 주변 앵두나무가 다음 주자로 대기합니다. 진달래가 곳곳에서 응원을 합니다. 이 놈들은 먼저 뛰었는데도 폐활량이 좋아 그 다음 주자인 매화나무, 능수벚나무와 내내 같이 합니다.

낙선재 매화나무와 삼삼와, 칠분서 주변 홍매화가 옆에서 도와줍니다. 이 놈들은 보기에는 좋으나 지구력이 약합니다. 곧 능수벚꽃에게 바통 터치를 합니다. 매화꽃이 최고의 힘을 발휘할 때 능수벚꽃은 이제 막 뛰려고 대기하고 있지요. 그래서 두 놈이 같이 뛰는 장면을 우리는 잘 볼 수 없습니다. 능수벚꽃이 힘을 다 쏟을 즈음 새로운 주자 낙선재 철쭉이 바통을 뒤로 내밀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주자 철쭉이 결승선을 통과하고 3-4월 꽃 릴레이대회는 막을 내립니다. 5월 릴레이 대회에는 감나무와 모란꽃이 새로운 주자로 나설 겁니다.

창덕궁 꽃은 우리산천에 있는 그런 꽃입니다. 궁궐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궁궐에  핀 꽃은 좀 달리 보입니다. 지붕, 굴뚝, 담, 화계와 함께 하여 더욱 아름다워지고 우아해집니다. 특히 꽃이 담과 같이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철쭉도 아름다운 지붕과 함께 하여 더욱 우아하고 고상해집니다
▲ 철쭉과 낙선재지붕 우리가 흔히 보는 철쭉도 아름다운 지붕과 함께 하여 더욱 우아하고 고상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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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에 꽃이 박혀 진짜 꽃담이 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무늬나 그림을 넣어 장식한 담을 통틀어 꽃담이라 합니다. 생화가 담에 붙어 무늬를 내는 진짜 꽃담을 흔히 우리가 말하는 꽃담과 구별하여 '생화담(生花墻)'으로 부를까 합니다.

전에 꽃을 박으면 꽃전이 되듯이 담에 꽃이 박혀 꽃담(생화담)이 됩니다. 꽃전에 진달래 꽃전, 장미꽃전, 국화꽃전이 있듯이 4월 '생화담'에는 앵두꽃담, 산수유꽃담, 매화꽃담, 진달래꽃담, 능수벚꽃꽃담, 민들레·제비꽃담이 있습니다. 꽃이 없는 겨울철에는 쑥갓이나 대추로 꽃 모양을 만들어 꽃전을 부쳤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꽃담은 전에 비유하자면 겨울꽃전이겠지요.

4월 대조전 화계 주인공은 앵두나무입니다. 화계 맨 꼭대기층에 한 그루 앵두나무가 하얀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빗살무늬 담에 바짝 기대어 펴서 앵두꽃담이 되었습니다. 담에 빗살무늬를 사용하는 것은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친다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대조전화계 꼭대기층에 담에 기대어 핀 앵두꽃이 앵두꽃담을 만들었습니다. 마귀를 물리친다는 빗살무늬 담에 환한 앵두꽃이 피어 마치 행운을 가져다 줄 듯합니다.
▲ 앵두꽃담 대조전화계 꼭대기층에 담에 기대어 핀 앵두꽃이 앵두꽃담을 만들었습니다. 마귀를 물리친다는 빗살무늬 담에 환한 앵두꽃이 피어 마치 행운을 가져다 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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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담의 무늬와 앵두나무의 하얀꽃이 참 잘 어울립니다. 요망한 것을 물리친 다음 다시 하얀 꽃처럼 좋은 운수가 가득하길 바라는 모양입니다. 실제로 이런 빗살무늬 담 중간에 꽃 모양을 장식하여 길상(吉祥)의 의미를 담았는데 이 담에서는 앵두꽃이 이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대조전을 나와 성정각과 삼삼와, 칠분서쪽으로 가봅니다. 성정각 자시문 모퉁이에 나이든 홍매화가 있습니다. 명나라 때 들어왔다고 하니 꽤나 오래되었습니다. 예전 글에서는 노매(老梅)라 이름지었는데 고매(高梅)라 고쳐 부를까 합니다. 품격이 높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보다는 명진 스님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명진 스님이 어느 강연에서 노승(老僧)이라 소개받고는 반은 농담으로 이왕이면 고승(高僧)으로 부르지 하며 섭섭해 하는 장면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꽃담의 백미, 자경전 서쪽 꽃담 중 매화무늬판입니다. 늙은 매화나무 가지에 둥근 보름달이 걸려 있고 새 한 마리가 놀러 와 앉아 있습니다.
▲ 경복궁 자경전 매화무늬판 꽃담의 백미, 자경전 서쪽 꽃담 중 매화무늬판입니다. 늙은 매화나무 가지에 둥근 보름달이 걸려 있고 새 한 마리가 놀러 와 앉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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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가 드리워진 매화꽃담은 꽃담 중에 으뜸입니다. 경복궁 자경전 서쪽 꽃담에 있는 매화무늬판을 그대로 옮겨 온 것 같습니다. 둥근 보름달과 새는 상상하여 넣었지만 자경전 꽃담은 이 담을 보고 만든 것 같습니다.

매화나무품위가 속되지 아니하고 훌륭하여 고매(高梅)라 부르고 싶습니다. 고매와 같이하는 매화꽃담을 보고있으면 자경전 매화무늬가 떠오릅니다
▲ 매화꽃담 매화나무품위가 속되지 아니하고 훌륭하여 고매(高梅)라 부르고 싶습니다. 고매와 같이하는 매화꽃담을 보고있으면 자경전 매화무늬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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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담과 비슷하게 문살에 꽃무늬를 장식하여 꽃문을 만듭니다. 화려한 절집 꽃문처럼 '고매(高梅)' 옆 자시문은 이 매화로 인해 꽃문이 되었습니다. 항시 닫혀 있어 문이 아니라 벽과 같이 느껴지지만 이 매화 꽃이 드리워진 4월의 자시문은 닫혀 있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자시문은 항상 닫혀 있어 문이라기보다는 벽같이 느껴지지만 매화꽃이 박히면 아름다운 꽃문으로 변합니다
▲ 매화꽃문 자시문은 항상 닫혀 있어 문이라기보다는 벽같이 느껴지지만 매화꽃이 박히면 아름다운 꽃문으로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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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시문 옆 진달래가 담 밑에서 수줍어합니다. 4월이면 진달래가 우리의 산하를 붉게 물들입니다. 우리 곁에 항상 같이하지요. 그래서 진달래는 우리와 무척 친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도 합니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 날 쓰러져 간 젊은 같은 꽃 사태가...'로 시작하는 진달래 노래가 그 날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죠.

진달래는 우리의 슬픔과 기쁨을 같이합니다. 우리의 애환이 담긴 진달래가 담을 쉬엄쉬엄 넘어 궁궐에 내려앉아 꽃담이 되었습니다.
▲ 진달래꽃담 진달래는 우리의 슬픔과 기쁨을 같이합니다. 우리의 애환이 담긴 진달래가 담을 쉬엄쉬엄 넘어 궁궐에 내려앉아 꽃담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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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은 한 영역과 다른 영역을 경계짓는 역할을 할뿐 서로의 정서까지 차단하지 않습니다. 궁궐의 담을 넘어 민간의 정서가 들어오고 담을 넘어 궁궐의 의사가 전달됩니다. 우리의 애환이 담긴 진달래가 담을 쉬엄쉬엄 넘어 궁궐에 내려앉아 꽃담이 되었습니다. 진달래꽃담입니다.

승화루 담을 타고 길게 내려 뻗은 능수벚꽃이 눈부십니다. 보통 벚꽃은 위로 향하는데 이 벚꽃은 아래로 향합니다. 아래로 향하는 마음이 기분을 좋게 합니다. 아래로 아래로 축 늘어진 벚꽃은 하늘하늘한 능수벚꽃담을 만듭니다. 바람결에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이 질서정연한 직선무늬 담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능수벚꽃은 아래로 향합니다. 아래로 향하는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흐물흐물 담을 타고 내려와 멋진 능수꽃담을 만듭니다
▲ 능수벚꽃꽃담 능수벚꽃은 아래로 향합니다. 아래로 향하는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흐물흐물 담을 타고 내려와 멋진 능수꽃담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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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수벚꽃 옆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노란 수를 놓은 산수유가 고귀해 보입니다. 산수유꽃담입니다. 산수유꽃담 배경이 되는 사선무늬 꽃담은 대조전 꽃담과 같이 온갖 악귀를 물리치려는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 노란 산수유꽃이 더하여져 행운을 비는 길상무늬가 됩니다. 연노랑이라 잘 드러나지 않지만 화려하지 않고 은은한 꽃담과 잘 어울립니다.

연노랑색이라 튀지 않습니다. 고상합니다. 사선무늬로 귀신을 물리치고 뭔가 좋은 조짐이 있도록 노란 꽃으로 길상무늬를 만듭니다
▲ 산수유꽃담 연노랑색이라 튀지 않습니다. 고상합니다. 사선무늬로 귀신을 물리치고 뭔가 좋은 조짐이 있도록 노란 꽃으로 길상무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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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외벽은 사고석담으로 쌓았습니다. 그 밑에 민들레와 제비꽃이 옹기종기 피어 있습니다. 민들레·제비꽃담입니다. 장중하고 엄격해 보이는 사고석담은 금새 이 꽃들로 한결 가볍고 부드러워집니다. 항상 우리와 같이하는 꽃이라 더욱 기분이 좋습니다.

사고석담 밑에서 민들레와 제비꽃이 수줍어합니다. 이 꽃과 함께 하는 사고석담은 금새 부드러운 꽃담으로 변합니다.
▲ 민들레·제비꽃담 사고석담 밑에서 민들레와 제비꽃이 수줍어합니다. 이 꽃과 함께 하는 사고석담은 금새 부드러운 꽃담으로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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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말하는 꽃담은 꽃보다 아름답다고 합니다. 꽃담은 늘 한자리에서 같은 향기를 뿜고 있는 반면 꽃은 쉽게 시들고 향기를 잃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꽃이 피고 향기를 내뿜는 4월에는 꽃담은 '생화담'에게 잠시 자리를 내줘야 할듯합니다.    


태그:#창덕궁, #꽃담, #낙선재, #매화나무, #능수벚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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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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