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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게 산을 오르고 하산을 준비하면서 마시는 맥주한잔의 시원함을 아는지…….
 치열하게 산을 오르고 하산을 준비하면서 마시는 맥주한잔의 시원함을 아는지…….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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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저녁, 서재 밖,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도열한 헤이리 가로등이 일제히 구배진 길을 밝히고 있지만 그 길을 가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가 찾아오기에는 좀 늦은 시간인 듯했습니다. 그 가로등불에 눈길을 주며 그 한적함을 만끽하고 있을 때 전화가 왔습니다.

"안수야, 나야!"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완전히 경계를 푼 이 저녁시간의 이완된 마음을 다시 추슬러야할 필요가 전혀 없는 목소리였습니다. 수십 년 묵은 대학친구, 상준이었습니다.

"나 지금 일산인데, 직장 동료와 헤이리 공기 좀 쐬고 싶어서…….  지금 가도 되니?"

상준이는 자주 보지 않아도 잊힐까 염려되지 않는, 만날 때마다 수십 년 전의 그 시간으로 절 데려가는 친구입니다.

졸업 후에는 초지일관 은행원으로 지내고 있지요. 지금, 오랫동안 서울 시중은행의 한 지점을 책임 맡고 있습니다.

30분쯤 뒤에 서재 앞에 나타났습니다. 저는 더 밝게 불을 밝히고 그를 맞았습니다. 저와는 첫 대면인 두 사람과 함께였습니다.

상준이는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온 캔 맥주 몇 개를 테이블에 꺼내놓았고, 저는 대전의 윤성중 선생님이 보내주신 껍질째 먹는 청송사과를 잘라내었습니다.

"일산의 연수원에서 지점장들, 부정기 연수를 받고 있어.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고, 적적해서 함께 나왔다."

남자 셋은 어떻게 담배를 끊게 되었는지를 그리고 여태 담배를 피우는 이유를, 여자는 독신으로 사는 홀가분함을 얘기했습니다. 이렇듯 우리 4명은 전혀 주요할 것 없는 소재로 몇 시간의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중간의 시간을 토막 내어 덜어낸 것처럼 시간이 흘렀습니다. 마치 시간이 '물처럼' 흘러 밤이 이슥해진 것입니다.

상준이와 상준이의 동료들은 여전히 서울의 강남의 한 구역씩을 책임지고 있는 지점장이었지만 은퇴를 준비해야할 시점의 나이들이었습니다.

노년으로 기운 중년의 여가들을 한준이는 낚시를 통해 삶의 가치를 되새김하고 있고, 신사동 지점장님은 산에 오르면서 하산 길의 편안함과 그 길에 마주치는 풍경들에 경탄하고 있고, 청담동의 여지점장님은 식물의 세밀화를 그리면서 그동안 전체를 보면서도 보지 못했던 것들의 특징들을 찾아내고 있었습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노자는 물을 선의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항시 낮은 곳으로 흐르지요.

이 밤도 물처럼 아래로 흐른 시간들이었기 때문에 찰나처럼 지나가 버렸나 봅니다.

오르기 위해 다투는 시간은 길고, 흐름에 몸을 맡기면 시간과 투쟁할 필요가 없으니 삽시간입니다. 삶이라는 흐름에서 '물'은 '마땅한 이치나 도리'이겠지요. 그러한 삶의 흐름을 '순리(順理)'라고 합니다. 근심과 걱정은 물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이 은행에는 전국 약 1천여 개의 지점이 있고 900여 개는 남자가, 100여 개는 여자가 지점장을 맡고 있다고 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상선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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