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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남미 시단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시인으로 197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시성 네루다를 기억한다.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 네루다라는 이름은 그가 흠모하던 체코 시인 얀 네루다(1834-1891)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필자는 이제 지금까지 가장 많이 번역되고 사랑받고 있는 그의 두 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그와 함께 사랑하고 그와 함께 절망하는 마음으로 다시 읽어보려 한다.

 

네루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평생토록 그의 시와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얻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도발적이며 관능적이지만 고독과 죽음의 배경을 깔고 있는 그의 목소리는 그래서 푸른 관능의 환상을 보여준다.

 

사랑을 향한 스무 편의 좌절된 노력 뒤 절망이라는 울부짖음 한 편으로 끝맺고 있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사랑과 섹스에 대한 솔직하고 대담한 표현으로 가히 '연애시의 혁명'을 일으킨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

 

네루다는 전통적 연애 시와는 달리 여성을 우주 혹은 대지에 비유하며, 동시에 대담한 성적 묘사로 육체의 쾌락을 찬미한다. 그러나 그 쾌락은 슬프도록 푸른 비애를 낳는다. 광폭한 웃음이 때론 터지는 울음을 대신하는 것처럼 소름 돋는 사랑의 양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인의 육체, 새하얀 언덕과 허벅지

알몸을 내맡길 때 그대는 어김없이 하나의 우주

나의 우악스런 농부의 몸이 그대를 파헤쳐

대지의 밑바닥에서 아이가 튀어나오게 한다

              (중략)

살아남기 위해 나는 그대를 무기처럼

다듬었다.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시 <여인의 육체 1>중에서

 

그때, 그대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사람들 사이에 있었는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가?

내가 슬픔에 잠겨 멀리 있는 그대를 느낄 때

              (중략)

황혼 무렵이면 언제나 손에 들린 책이 떨어지고

상처 입은 개처럼 나의 외투는 내 발을 휘감는다.

              시<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10>중에서

 

이미 내 가슴을 난도질한 갈망

달이 미소 짓지 않는 곳, 다른 길을 갈 시간이다

              시<거의 하늘 밖에서 11>중에서

 

대지(땅)를 가는 "우악스런 농부"인 나는 "그대를 파헤쳐/ 대지의 밑바닥에서 아이가 튀어나오게"한다. 이러한 행위는 고독과 어둠을 주는 멀고 먼 사랑의 대상을 쟁취하기 위해,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내 안의 정열을 다듬는 동시에, 그대를 사랑하는 나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고통과 절규가 수반됨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절망한 사나이, 메아리 없는 언어/ 모든 것을 잃었으나 모든 것을 가졌던 사나이/ 아 묵묵한 여인이여"(시<하얀 벌이 잉잉 댄다>중에서)라는 절규가 그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일방적 동경이란 "난도질"당한 가슴의 아픔(시<거의 하늘 밖에서> 중에서)으로 그녀가 "미소 짓지 않는 곳, 다른 길을" 혼자 걸어가게 한다.

 

그러나 그녀의 실체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시집 곳곳에 나오는 '그대는 누구인가'라는 반문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네루다는 나이 60이 가까워졌을 때야 시에 나오는 시골 소녀는 마리솔, 도회지의 소녀는 마리솜브라라고 밝혔다.

 

오, 배의 검은 십자가

다만 하나

이따금 나는 새벽을 맞이하고 나의 영혼은 축축이 젖는다

먼 바다가 울려 퍼지고, 울려 퍼진다

이것은 항구

여기서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중략)

이미 이 낡은 닻처럼 나는 잊혀져 가고 있다

저녁이 정박하고 있을 때의 부두는 한층 쓸쓸하다

부질없이 굶주린 나의 삶은 지쳤다

나는 나에게 없는 것을 사랑한다. 그대는 그토록 먼 곳에 있다

                시<여기서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18>중에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에는 '배'의 이미지가 여러 곳에 등장한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르내리는 사랑의 항해, 그 사랑의 휘몰아침을 맞는 화자 자신을 네루다는 배의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 화자와 그녀와의 사이에는 바다처럼 막막한 거리가 놓여 있고, 따라서 그녀 곁에 가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래서 화자는 언제나 항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를 찾아 떠도는 배처럼 항해하지만 "나에게 없는 것을 사랑"하는 캄캄함 속에서 화자의 영혼은 비애에 "축축이 젖"는다. 그녀는 정박할 수 없는 폭풍 저 편의 땅, 네루다는 여기서 가장 긴 독백으로 사랑을 마무리 한다.

 

나는 쓸 수 있다. 오늘밤, 가장 슬픈 시를.

 

이를테면 이렇게, "밤은 별들로 빛나고

별들은, 멀리서, 파랗게 떨고 있다"

           (중략)

나는 쓸 수 있다. 오늘밤, 가장 슬픈 시를.

그녀가 내 여자가 아닌 것을 생각하며, 그녀를 잃었다는 것을

느끼면서.

           (중략)

이것이 그녀로 말미암은 마지막 아픔이긴 하지만,

또한 이것이 그녀를 위해 쓰는 마지막 시이긴 하지만.

                 시 <나는 쓸 수 있다 20>중에서

 

위의 시는 원래 32행으로 쓰여 진 가장 긴 시이다. 독백 형식의 묘미가 가장 두드러진 이 시는, "그녀를 위해 쓰는 마지막 시"라는 구체적 진술과 함께 "그녀가 내 여자가 아닌 것을 생각하며 그녀를 잃었다는 것을 느끼면서" "가장 슬픈 시"로 세상에 남는다. 화자의 절망이 잉태되는 순간이다.

 

절망

 

네루다 자신이 한 편이라고 명명한 '절망의 노래'는 사랑의 상실에 대한 마지막 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항구는 그녀에게 가는 염원의 땅이 아니라 사랑에 "난파된 자들의 잔인한 동굴"이다. 따라서 "새벽의 부두처럼 버림받은" 나는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을 맞게 되고, '짧았지만 가장 지독했고, 대담했으며 가장 탐욕스러웠고 야무졌던' 그녀에 대한 사랑이  "모든 것이 파멸일 뿐"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먼저/ 떠나야 할 시간, 오, 나는 버림받았다!"라는 절망의 절규는 그래서 "가장 잔인하고 냉혹한 시간"이 되어 화자를 가둔다.

 

그대 그날 밤을 기억하는가? 그곳에 나와 함께 있던 그날 밤을.

강은 이미 고질이 된 탄식을 바다로 잇고 있었다.

 

새벽의 부두처럼 나는 버림받았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 오, 나는 버림받았다!

 

나의 마음 위로 싸늘한 화관들이 떨어진다.

오, 쓰레기의 소굴, 난파된 자들의 잔인한 동굴!

              (중략)

그대에 대한 나의 욕망은 비록 짧았지만 가장 지독했던 것

비록 취하게 했지만 가장 대담했던 것, 탐욕스러웠지만 가장

야무졌던 것.

              (중략)

이것이 나의 운명, 그 속에서 나의 열망은 여행하였고

그 속에서 나의 열망은 쓰러졌으니 그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파멸일 뿐!

              (중략)

새벽의 부두처럼 나는 버림받았다

떨리는 그림자만이 나의 손아귀에서 뒤척이고 있다

 

아, 무엇보다 먼저, 무엇보다 먼저

 

떠나야 할 시간, 오, 나는 버림받았다!

              시 <절망의 노래>중에서

 

그 후

 

그의 작품들 중 가장 개인적이며, 남녀의 성을 다뤘다는 당시의 인식으로 오랫동안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바로 이 시집이다. 네루다는 이 시집의 원래 제목으로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시>를 제안했었다고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임과 동시에 여자와 남자라는 카테고리 속엔 성이라는 불멸의 주제 또한 비켜갈 수 없음을 내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예술이 반드시 범우주적이어야 하며 고상해야 한다는 정의는 어디에도 없다. 개인이 없는 우주는 있을 수 없으며 고상하지 못한 것이 없다면 고상한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 시집을 읽을 때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출판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관능주의'라는 최초의 충격과 그것에의 가치다. 그것은 시대를 앞서 포장된 허위를 조소하고 본질에 몰두한 네루다의 위대한 역사를 이해하는 것과 통한다.

 

네루다!

그대 아직 울부짖는가. 그 푸른 관능의 목소리로 아직도 그곳에서 포효하고 있는가.


태그:#네루다, #서석화, #사랑, #여인, #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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