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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근'이란 이름을 아는지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면 '이춘근PD'라고 하면 어떤가. 맞다. <PD수첩> 광우병 편을 제작했던 바로 그 PD다. 아마도 이름이 특이해서 한번이라도 들었다면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김보슬'PD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처럼.

 

춘근이는 내 친구다. 고등학교 2, 3학년을 한 반에서 지냈고, 같은 대학을 다녔다. 내 기억에 춘근이는 고등학교 2, 3학년 때 모두 반장을 했다. 춘근이는 어느 반에 한두 명씩은 있게 마련인 '물건'이었다. 넘치는 끼에 재주가 많아 늘 주변에 친구들이 모이는 그런 친구였다. 게다가 공부도 잘했다. Queen의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긴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부를 정도로 팝송에 미쳐있던 기억도 난다. 학교에서 춘근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93년 겨울 본고사를 보기 위해 우리는 친구 몇몇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연세대로 향했다. 시험을 마치고 나와서는 '여우사이'라는 이름의 카페에 들러 저녁을 먹고 함께 당구를 치며 오랜만에 기분을 냈던 기억도 아련하다. 다행히 우리 둘 모두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서로 과도 단과대도 달랐지만 1학년 때는 동문회에서, 지하철역에서, 학생식당에서, 또는 학교 근처 호프집에서 가끔 마주쳤다.

 

2학년이던 95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을 중심으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사법처리해야 한다는 투쟁의 열기가 높아져갔다. 5.18의 상처를 안고 있던 전남 광주지역 대학생들은 물론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서울로 모여들었고, 투쟁의 거점은 우리 학교였다. 전두환 노태우가 연희동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앙도서관 앞 민주광장에서는 매일같이 집회가 벌어졌고 집회가 끝난 뒤에는 늘 교문 밖으로 나가 전경들과 격렬하게 대치했다. 교문 앞 8차선 도로에는 화염병과 쇠파이프, 지랄탄과 곤봉이 맞부딪쳤고, 캠퍼스 곳곳에는 교내 라디오방송국이 틀어준 투쟁가가 흘러나왔다. 80년대만큼은 아니었지만 90년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군중적인 투쟁이 벌어진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춘근이와 나도 그곳에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소위 '운동권 학생'이 되어갔고 춘근이는 군대에 갔다. 그리고 몇 년 뒤 학생식당에서 '운동권 학생'과 '복학생'으로 어색한 조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어색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이라는 정해진 길을 지나온 뒤로, 각자가 선택한 길을 걸어온 지난 몇 년 간 꽤나 많이 변한 서로의 모습이 낯설었을 뿐이다. 당시 나는 '피끓는 애국의 열정'으로 집을 나와 학생회실에서 생활하며 집회를 쫓아다니고 있었고, 춘근이는 착실하게 언론인으로서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또 몇 년 뒤 서점에서 우연히 MBC 신입 PD들이 낸 책을 들춰보다 춘근이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신입 PD들의 입사기쯤 되던 그 책을 통해 나는 우리가 만나지 못한 세월 춘근이가 얼마나 치열한 삶을 거쳐 방송국에 들어가게 됐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정확친 않지만 아마도 당시 나는 학생운동에 몸 담은 지 거의 7~8년째가 되던 해로,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연락이 끊어진 지도 이미 오래였다. 나중에 들은 애기지만 친구들은 내가 경찰에 쫓기는 거물급 수배자쯤 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 뒤로 나는 늦깎이 군생활을 마친 뒤 인터넷언론사, 출판사 등을 거쳐 지금의 회사에 들어왔다. 그 사이 춘근이는 <사과나무> <가족애> 등의 프로그램을 거쳐 <PD수첩>에 합류했다. <PD수첩>으로 가기 얼마 전에 술자리에서 만난 춘근이는 요즘 시사프로그램을 하려는 젊은 PD들이 없다고 안타까워하면서 그나마 자기 정도가 가장 '깨어있는' PD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춘근이가 만든 프로그램들을 일일이 챙겨보진 못했지만 삼성 구조본 관련 기사로 해직 당한 옛 <시사저널> 기자들의 투쟁을 다룬 프로그램과 광우병 쇠고기의 위험성을 파헤친 프로그램을 보면서는 마음 속으로 힘껏 박수를 보내주곤 했다. 종교 비리를 파헤치다 신변에 위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춘근이가 걷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은 길임을 새삼 느끼기도 했다. 비록 자주 만나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PD수첩>이라는 시사프로그램의 본령에 맞게 이 시대의 모든 권력에 맞서 국민과 약자의 편에 서있는 춘근이가 자랑스러웠다.

 

광우병 쇠고기 편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고 춘근이는 방송국 로비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나는 '권불오년'이라는 짧은 문자를 보냈을 뿐 아무 힘이 돼주질 못했다. 다행히 언론을 통해 접하는 춘근이는 늘 그랬듯 씩씩해 보였고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제 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났다. 곧바로 문자를 보냈고 동창모임을 주도하는 친구에게는 축하의 자리를 마련하자고 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누군가가 법원에서 나오는 춘근이를 붙잡고 인터뷰를 한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소감을 전하는 춘근이를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검찰이 기어이 항소를 할 것이라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그 동안 충분히 힘겨웠을 춘근이에게 또 어떤 위로를 해야할지 모르겠다. 권력에 맞선 댓가를 어떻게든 치르게 하겠다는 권력의 추악한 집착과 이를 부추기는 수구세력의 호들갑스런 몽니에 화가 치민다. 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이란 말인가.

 

이 글은 춘근이를 기억하기 위해 쓴 글이다. 친구이면서도 친구 노릇을 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쓴 글이자, 촛불항쟁이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잠시나마 대한민국 주권자로서의 짜릿함을 경험했던 모든 이들에게 쓴 글이다. 우리들 모두는 춘근이에게 큰 빚을 졌기 때문이다.

 

인터뷰 끝에 춘근이는 <PD수첩>을 없애려는 시도와 공영방송 MBC를 무너뜨리려는 음모에 맞서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달라는 당부를 전했다. 이 글을 읽은 독자분들은 앞으로 어느 이름 모를 PD가 아니라, 여러분과 똑같이 누군가의 친구이자 가족인, 우리와 동시대를 정직하고 치열하게 살아냈고, 또 권력의 반대편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시대의 고발자로 살아온 '이춘근'이라는 사람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그것은 춘근이를 위한 일이 아니라 어쩌면 나와 당신을 위한 일일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tooday.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PD수첩#이춘근#광우병쇠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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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2023),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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