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사람들 포스터

▲ 성난사람들 포스터 ⓒ 김현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18살 난 아들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슬럼가에 사는 이 아이는 폭력과 절도로 전과만 5범이며 아버지로부터 상습적인 구타에 시달렸다. 아들이 살해하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도 나타났다. 경찰은 이 소년에게 살인추정시간에 어디서 무얼했느냐고 물었지만 영화를 봤다고만 말할 뿐, 어느 영화, 어느 배우가 나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모든 정황은 소년을 유력한 용의자로 몰아가고, 변호사는 이렇다 할 반대논리도 펼치지 못한 채 재판은 종료된다. 이제 12명의 배심원들에게 이 사건은 넘어갔다. 유죄라면 이 소년은 사형이다.

 

12명의 배심원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다 유죄를 주장한다. 빨리 야구를 보러 가기 위해 서두르는 사람도 있고, 이 당연한 사건에 시간을 끌기가 아깝다며 재촉하는 사람도 있다. 더군다나 모두들 그 해 들어 가장 더운 날씨에 모두 지쳐 있다. 하지만 한 배심원이 내뱉은 한마디가 모든 정황을 뒤집는다. "이 사건에는 의심 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그가 유죄를 부정하는 이유다. 그리고 차근차근 되짚어 가는 와중에서 성난 사람들은 서서히 마음을 움직인다.

 

자신들이 내세웠던 당연한 증거들이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으로 증폭되고 있다. 차츰 무죄로 흐름이 기울자 끝까지 유죄를 고집하던 사람들은 흥분하고 격노한다. 왜 그들은 화를 내는가. 그들은 자신의 분노에 못이겨 가난한 아이에 대한 편견이나 사적인 경험을 떠올리며 유죄에 대한 믿음의 실체를 드러낸다. 즉 그들은 그 소년이 죄를 저질렀는가보다 슬럼가의 소년이었다는 사실이, 공부를 못한다는 사실이 유죄를 가르는 더 중요한 기준이었다. 결과는 역전. 소년은 무죄다. 죄를 저질렀다는 가능성보다, 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 이 사건을 무죄로 만들었다.

 

이 영화가 지금도 주목받는 점은 50년대 흑백영화이지만 민주주의에서 사법권의 의미를 잘 보여줬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년은 살인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범죄자를 풀어준 꼴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유죄일 가능성보다 무죄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우리는 의심을 해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다. 10명의 피의자를 놓치더라도 1명의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이 무죄추정의 원칙이 검찰과 언론의 편의에 의해 쉽게 훼손되어온 점은 바로 딱 영화와 현실간의 거리만큼의 괴리가 한국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내가 화나서 화내는 게 무슨 문제냐고? 문제는 우리의 분노가 분노로 그치지 않고 언론은 이를 토대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며 대중을 선동한다. 사건때마다 사형제가 거론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 씬. 법정을 나오며 그 최초의 무죄를 주장했던 사람에게 같은 배심원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묻는다. "당신 이름이 뭐요?" 그들은 사건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서로 상대방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들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러면서 그들은 다퉜고, 싸웠으며, 결국에는 의견을 모아 소년을 석방시켰다. 민주주의 사법체계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50년전의 영화보다 얼마만큼 왔을까. 대중분노, 파시즘, 마녀사냥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돌아다니고 있는 지금,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에게 필요한 건 너무도 단순한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일지도 모른다.

2009.12.13 13:35 ⓒ 2009 OhmyNews
성난사람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