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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31일 새벽, 어둠이 채 거치기도 전에 다마얀(Damayan) 지역 곳곳에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떠나갈 줄 몰랐다. 길거리에 천조각을 엮어 만든 임시 대피소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그 때의 아비규환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도망쳤어요. 내 집, 네 집 할 것 없이 주위에 아이들이 보이면 무조건 들쳐엎고 높은 곳으로 도망쳤어요. 그러던 와중에 건넛집에 살던 세 살짜리 아이는 누구도 챙기질 못했답니다. 결국, 아이는 죽었지요…"

10월 말, 필리핀 기상 관측 상 최고의 강수량을 기록했던 태풍 '켓사나(Ketsana)'가 왔을 때도 비교적 냉정하게 대처했던 사람들은 한 달에 10여 개 가까운 태풍들이 지역을 통과하면서 겁에 질릴 때로 질려있었다. 그 때쯤, 태풍 '미리내'는 차오를 때로 차오른 라구나(Laguna, 다마얀 지역에 있는 필리핀 최대의 호수) 호수에 강한 비바람을 동반하고 찾아오고야 말았다.

태풍 '미리내' 때 잠겼던 집은 물이 빠지길 기다리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태풍 '미리내' 때 잠겼던 집은 물이 빠지길 기다리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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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풍이 오면 꼭 주민들의 곁에서 구조활동을 하겠노라 호언했던 가쿨라(Gacula) 따이따이(Taytay, 다마얀 관할지역 시) 시장은 이 지역 주민조직들에게 전화상으로 "당장 피하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주민조직은 수십통에 전화를 한 끝에 겨우 트럭 한 대를 구할 수 있었고, 그 트럭이 없었다면 아이들 몇 명이 더 세상을 떠났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자넨 우리가 저 사람을 믿는다고 생각하나?"

그로부터 일주일 후, 동이 트자마자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가쿨라 따이따이 시장과 그의 일행이 다마얀을 찾았다. 외국의 원조로 들어온 과자를 들고 나타난 가쿨라 시장은 그의 이름이 떡하니 박힌 웃도리를 입은 공무원들, 장전을 한 채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는 군인 및 경찰, 그리고 지역 방송국의 수많은 카메라 기자들을 대동한 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여전히 물에 잠긴 집을 뒤로 하고 제대로 된 거처 없이 떠도른 사람들이 태반인 동네지만, 다마얀 사람들은 그런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 해맑은 미소로 과자를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그 행렬에는 주민조직(낙다마얀, Nagdamayan) 부대표인 '오비나'씨도 섞여 있었다.

가쿨라 시장이 대동한 일행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티를 입은 공무원과 지역언론 방송기자,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과자를 받게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인 경찰이었다.
 가쿨라 시장이 대동한 일행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티를 입은 공무원과 지역언론 방송기자,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과자를 받게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인 경찰이었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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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시장님."
"아이고. '오비나' 씨 오셨네요. (나를 쳐다보며) 이 분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돈도 받지 않고 이 곳 주민들을 위해 일을 하죠."

오비나씨는 인사 한 번으로 몇 십분씩 줄을 서서 과자 한 봉지씩 받는 사람들의 시샘을 한 몸에 받으며, 시장에게 직접 한 박스의 과자를 받아들곤 사무실로 향했다. 오비나씨가 들어서자마자 주민조직 사무실에선 시장을 비판하는 목소리로 가득해졌다.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죽어갈 때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시장이, 외국에서 들어온 구호품을 마치 자기가 선심쓰는양 군인과 기자들까지 대동하고 와서 뿌려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넨 우리가 저 사람을 믿는다고 생각하나?"

난데 없이 주민조직(낙다마얀, Nagdamayan)의 대표인 루디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가쿨라는 최소 우리 말은 들어주려고 하거든. 처음엔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서로 얼굴 안보고 살 것처럼 그랬는데. 우린 현실적인 사람들이거든. 그렇게 해선 해결되는게 없더라고. 주민조직 사람들은 정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 때, 오비나씨가 받아온 과자 한 박스는 미쳐 사이렌 소리를 듣지 못했거나, 거동이 불편한 주민들을 위해 나누어지고 있었다.

수도 설치와 운영을 해내고야 만 다마얀 주민조직

다마얀 지역의 젖줄인 라구나 호수. 호수는 인근 지역의 개발과 산업화 등으로 잿빛으로 변했고, 주민들은 더이상 이 물을 마실 수 없게 됐다. 문제는 깨끗한 식수를 필요로 하는 주민들에게 수도 설치비가 없다는 데 있었다. 다마얀 주민 쥬니씨는 이런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97년, 수도가 민영화된 이후에 수도관, 계량기 등의 모든 설치비를 주민들이 부담해야 했어요. 한 가구당 보통 수도 설치비가 2천페소(약 5만 5천) 정도되는데, 그게 한 달 월급인 사람들이 태반이거든요. 4500여 가구 중 극소수만이 수도를 설치할 수 있었어요."

주민조직은 이 문제에 있어서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공동수도를 설치할 것을 생각해낸다. 그리고 25만페소(약 600만원)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서 이 일을 해내고야 만다.

"주민들로부터 십시일반 돈을 조금씩 모으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더 내놓는 방식으로 공동수도를 설치했습니다. 깨끗한 물이 필요하고, 주민조직을 믿는 사람들은 선뜻 공동수도 사업에 동의를 했었지요. 문제는 매달 수도 사용료로 25만페소(약 600만원)가 청구된다는 사실이었죠. 첫 달, 고지서를 받는 순간 막막하더라고요."

주민조직(다마얀 홍수지역 거주자 모임, Damayan Floodway Homeowers Association) 대표인 벨리아씨는 그렇게 기억을 더듬었다. 이 후, 주민조직이 운영하는 공동수도는 몇 차례 수도공급이 중단되곤 했다. 한 달만 사용료를 늦게 내더라도 물은 가차없이 끊기곤 했기 때문이다.

다마얀 주민조직의 공동수도 요금 고지서. 사람들은 22만 6천페소(약 540만원) 정도가 청구된 이번 달 요금은 비가 많이 온 탓에 2만 4천페소(약 60만원) 정도 줄어든 것이라 말했다.
 다마얀 주민조직의 공동수도 요금 고지서. 사람들은 22만 6천페소(약 540만원) 정도가 청구된 이번 달 요금은 비가 많이 온 탓에 2만 4천페소(약 60만원) 정도 줄어든 것이라 말했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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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수도에서 개별수도를 집까지 설치할 형편이 되는 주민들은 한달에 3백에서 4백페소(약 8천원에서 1만 1천원) 정도의 사용료를 내고, 그 형편이 안 되어 사무실 앞에서 물을 받아가는 사람들은 한 통에 2페소(약 55원)씩 사용료를 냅니다. 이런 식으로 운영해서 25만페소(약 600만원)를 매달 충당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더군요."

해외이주노동으로 비교적 가정형편이 나은 주민조직 대표 루디씨는 모자라는 돈을 채우기 위해 사비를 털기도 하고, 바랑가이(Barangay : 우리나라의 '동' 정도 행정구역) 장 선거 출마 경험 등을 바탕으로 지방정부로부터 돈을 지원받기도 했다.

다마얀 주민조직 사무실 앞 공동수도, 아이들은 한 통에 2페소(약 55원)짜리 물을 받기 위해 아침부터 이 곳을 찾았다.
 다마얀 주민조직 사무실 앞 공동수도, 아이들은 한 통에 2페소(약 55원)짜리 물을 받기 위해 아침부터 이 곳을 찾았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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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60에도 수도 설치를 할 능력이 되지 않는데, 주민조직 덕에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 됐어요. 한 통에 2페소(약 55원)를 주고 어디서 이런 물을 구할 수 있습니까? 나도 없는 살림이지만, 주민조직이 어떤 일을 한다고 하면 도와주고 싶어요."

다마얀 주민 준씨는 주민조직의 공동수도와 관련한 고군분투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었다.

연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다마얀 사람들

필리핀 사회운동조직들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적극적으로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적 불평등 해소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1987년 헌법과 1991년 지방자치법은 이들을 정치와 행정의 동반자고 규정하고 있어서 법적 기반도 확고하다. 필리핀 시민사회 활성화의 중요한 계기로는 1970년대 학생운동의 폭풍(반제, 반독재 운동)과 1983년 아키노 상원의원 피살로 분출되어 마르코스 축출에까지 이르는 피플 파워의 경험을 들 수 있다.
- 필리핀 사회복지와 NGO / 이영환 저 중 일부 발췌

4500여 가구, 다마얀 지역에는 두 개의 주민조직(낙다마얀, 다마얀 홍수지역 거주자 모임 / 행정 구역상 나뉘어짐)이 존재한다. 11월 초, 이들 주민조직 사람들은 필리핀의 수도 메트로 마닐라(Metro Manila)로의 출입이 잦았다. 태풍 피해 이후, 도시빈민 지역에 강제 철거가 진행되기 시작하자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으라'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 움직임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10여 년간, 강제 철거 이야기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이 지역에서 사람들은 왜 이 행렬에 동참하게 됐을까?

"퀘존(Quezon) 주 사람들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메트로 마닐라의 식수 문제와 관련된 댐을 짓는다는 바람에 원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쫒겨가게 생겼고, 루손 섬 북쪽에 있는 이사벨라(Isabela) 지역은 태풍 피해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사람들이 허다한데, 지방 정부가 아예 손쓸 생각조차 하지 않는데요. 이 지역 사람들 수십 명이 대통령 궁 앞에 몰려가서 목터져라 시위 해본들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겠지만,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몰려가서 함께해 주면 그 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십수년째 주민조직 대표일을 해온 벨리아씨는 그렇게 연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마얀 지역이 이 연대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축에는 NGO '씨오엠(COM, Community Organizers Multiversity, 지혁사회조직운동가 훈련기관으로 실제 조직사업을 병행하는 조직)'이 자리잡고 있다. 13년간, 메트로 마닐라와 주변 지역에서 빈민조직사업을 전개해온 씨오엠은 다마얀 사람들이 연대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갈 수 있게끔 역할을 하고 있다.

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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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다마얀 지역에 있는 라구나 호수에 제방사업 관련된 이슈가 생겼을 때, 주민들이 NGO와 주민조직을 통해 대다수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한다(위의 표 참조).

"제방사업에 있어서 정부는 주민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 씨오엠은 어려운 법안과 자료들에 대해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명해주고, 정부와 협상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진행될 때까지 씨오엠도 다른 NGO와의 연대를 통해 많은 것을 도움 받았고, 다마얀과 비슷한 지역에 꾸려진 주민조직 사람들이 시위 등이 있을 때 힘을 보태주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민들과 주민조직은 스스로 주권을 찾는 방법을 배우게 됐어요."

루디씨는 그렇게 씨오엠의 일련의 활동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날, 강제 철거 위협을 당하고 있던 메트로 마닐라의 디비소리아(Divisoria) 지역이 '현실적 보상조건을 제시하라' 구호 아래 인간 띠를 만들어 강제 철거를 막아냈다는 소식이 다마얀 지역에 전해졌다. 정부의 철거 정책과 관련한 토론회에 디비소리아 사람들과 함께 참여한 경험이 있던 다마얀 사람들은 마치 자기 일인양 축하한다는 문자를 그들에게 보내는데 여념이 없었다.

다마얀 지역의 주민조직은 매년 선거를 한다. 주민조직의 대표부터 임원까지 직선제로 선출하며, 연임은 가능하다. 주민조직은 주민이 스스로 만들고 운영하는 곳으로, 그 안에 대표와 임원은 월급이 없다. 다만 내 지역에 닥친 문제들을 좀더 현실적으로 고민하면서 봉사하고 싶은 사람들이 채워가는 공간인 것이다.

다마얀 인근 지역의 주민 토론회 모습, 이 지역은 의견 차이로 주민조직이 여러 개 설립되면서 문제를 겪고 있었다. 이들은 다마얀 지역 주민조직 대표 및 임원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경험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다마얀 인근 지역의 주민 토론회 모습, 이 지역은 의견 차이로 주민조직이 여러 개 설립되면서 문제를 겪고 있었다. 이들은 다마얀 지역 주민조직 대표 및 임원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경험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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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을 담당하는 씨오엠의 조직가 크리거씨는 "다마얀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주민조직의 활동이 왕성하고 주민들이 주민조직을 상당히 신뢰한다"며 "그들은 한 명의 주민으로서, 그리고 주민대표로서 다마얀 지역을 위해 노력하는 그 모습이 주민들에게 감동을 준 탓이라고 생각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오늘도 다마얀 주민조직 사람들은 필리핀 법안을 공부하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정부를 언제까지 욕만할 수 없기에, 내 스스로 주권을 찾는 일을 시작한 그들의 행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마얀' 마을은 어떤 곳?
다마얀(Damayan)은 필리핀 최대 호수인 라구나 호수 근처에 4500여 가구가 모여사는 마을이다. 다마얀은 호수 및 도시와 가까운 탓에 직업을 구하기 쉽고 먹을 것이 풍족했던 곳이었다. 그러던 다마얀은 지난 십수년간 가뭄과 홍수를 번갈아가면서 겪었고 개발과 환경오염의 폐해를 몸소 겪으면서 도시빈민지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태그:#필리핀, #주민조직, #다마얀, #라구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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