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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어젯밤에 나한테 사진 보냈어요?"

"설명 한 줄도 없이 당신이 보낸 사진이 뭐 길래 열리지도 않고 이러지?"

"사진은 무슨 사진? 나도 모르는 소리로 부자간에 아침부터 난리람."

 

대답하는 순간, 뒤통수가 뜨끔 하는가 싶더니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간밤에 아들이 밥 때를 넘겨 들어오는 바람에 찬이 마땅찮아 동네 식당에서 간단히 사 먹인 것이 사단이었습니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느라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생겼기에 다 먹을 때까지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다 싶어 화장실에 가는 척 슬그머니 일어났습니다. 그 식당은 무료 인터넷 서비스를 하는 곳이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이메일을 체크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자리를 뜨면서 그만 로그아웃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식당 측에서 15분이 지나면 사용 중인 사이트가 자동으로 닫히도록 해 놓았지만 그 전에 컴퓨터 앞을 떠났으니 제가 일어나자 누가 바로 장난을 쳤던 모양입니다.

 

제 이메일에 저장되어 있는 주소를 무작위로 클릭하여 무슨 사진을 전송한 모양인데, '보낸 메일함'을 확인해 보니 발송 실패를 제외하고도 이미 열댓 명 앞으로 메일이 간 상태였습니다. 그 중에는 짐작컨대 "무슨 회신을 이 따위로 한담", "그간 소식 한 자 없다가 뜬금없기는?", "참 별 싱거운 여자 다 봤다"라고 할 만한 사람도 더러 있었으니 낯이 후끈 뜨거워질 밖에요.

 

"정말 오랜만이구나. 나는 요즘 한 외국계 회사에 다니고 있어. 그런데 지금은 사무실이라 사진을 열어 볼 수가 없네. 퇴근해서 집 컴퓨터로 볼게."

 

아니나 다를까 그 날 오후, 하도 오래 돼서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은 기억도 없던 대학 동창생으로부터 기어이 답신 한 통이 날아들었습니다. 이후 또 몇 사람한테서 '사진이 안 열리니 다시 한 번 보내 달라'는 정중한 답메일이 온 걸로 봐서 다행스럽게도 사진은 누구한테도 열리지 않았지 싶습니다.

 

'안 열어 봐도 되거든, 다시 보낼 수도 없거든.'

 

생각할수록 황당하고 아찔한 소동이었습니다. 사실 별탈 없이 넘어갔으니 지금에사 '소동'이라 하는 거지 만약 그 사진이 '얄궂은' 것이기라도 했다면(장난 메일이었으니 아마 그랬겠지요) 상당히 난감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한 장도 아니고 여러 장이었으니.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며칠 후에 또 비슷한 '사고'를 쳤습니다. 편집을 맡고 있는 한 신문의 작업을 마치고 이메일을 또 그냥 열어둔 채 그 회사 사무실을 나왔던 것입니다. 그 생각이 나자마자 부랴부랴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이메일 좀 닫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연속 '일을 치고' 나니 또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어 겁이 납니다.

 

사실 인터넷이나 이메일과 관련한 골탕 먹기는 이번 뿐이 아닙니다. 갑자기 패스워드가 생각나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보안 상의 이유라면서 패스워드를 바꾸라고 할 때마다 혼란스럽고 짜증이 납니다. 외울 만하면 또 바꾸라 하니 나름 잔꾀를 내서, ' I love you' 하던 것을 'I hate you'로 한다거나, 'he will go'로 쓰다가 'he has gone'으로 변경하는 식의 '수법'을 씁니다.

 

'단수 높은' 어떤 분은 일단 바꿨다가 이내 다시 바꾼다고 하시더군요. 예를 들어 패스워드를 'I love you' 로 쓰고 있었는데, 바꾸라는 사인이 뜨면 아무 걸로나 일단 새로 만들었다가 즉시 'I love you' 로 다시 바꾼다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 계속 같은 패스워드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아주 괜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 저도 다음에는 그렇게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것이 어찌 이메일이나 인터넷 사이트 접속 패스워드 뿐이겠습니까. 제 나이 이상이면 비밀번호를 요구하는 자동 인출기나 숫자 입력을 기다리는 내 집 현관문 앞에서 망연자실하니 서 있는 일이 한 번쯤은 생기기 마련이지요.

 

특히나 숫자에 약한 저는 제 집 전화번호나 핸드폰 번호가 이따금 생각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때도 있습니다. 제가 제 자신에게 전화할 때는 없으니 남들이 제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을 확률이 더 높지 않겠습니까.

 

처음 이야기에서 너무 번졌지만 한 마디만 더하고 글을 마치겠습니다.

 

지금은 카드를 갖다 대면 문이 열리는 시스템이지만 전에는 숫자를 누르게 되어 있던 서울의 친정 아파트에서 어머니는 참으로 기발한 현관문 번호를 지정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저희들에게 의뭉스럽고도 장난스레 그 번호를 알려주셨는데, 그 숫자는 바로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의 네 자리 수인번호였습니다. 20년 옥살이를 하면서 이감 때마다 번호가 바뀌기는 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오래 불렸던, 그래서 온 가족이 꿈에서조차 외울 수 있는 아버지의 수인번호 0000번.

 

남들은 가족의 생일, 전화번호, 주민등록 끝자리 등을 딴 '개성 없는' 번호를 짜 맞추고 있을 때 당신은 독창적이게도 지아비의 수인번호를 당신 집 현관문 따는 데 활용하실 생각을 했으니!

 

하지만 어머니는 더 이상 그 번호가 필요 없으니 이번에는 제가 패스워드를 변경할 때 써 먹을까 합니다. 그 번호라면 죽을 때까지 안 잊어버릴 자신이 있으니까요.


태그:#패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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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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