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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태생인 저는 혼자 대처로 유학을 나왔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였지요. 한 날 저녁, 등잔물 아래에서 도회지로 유학을 가겠느냐고 부모님이 물었을 때,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무려면 시골보다 도시가 낫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혼자 잘 지낼 수 있겠느냐고 다짐의 말을 들었을 때도 도리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고개를 끄덕였던 소극적인 동의가 저의 인생에 있어서 잘한 일일까, 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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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제가 대처로 와서 기대에 차서 보낸 날은 닷새 정도였습니다. 고가 위에 올라 책 사진으로만 보던 긴 기차도 보고, 차가 다니는 길과 사람이 다니는 길이 분리되어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해서 하릴없이 쇼윈도우가 늘어선 중앙통 인도를 따라 멀리 걸어갔다 되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엿새째 되던 날부터, 저는 시골의 부모님이 그리워서 눈물짓기 시작했습니다. 낮 시간에도 혼자인 시간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밤 시간은 슬프고 외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자정쯤 저의 베개를 짜보았다면 아마 한 종지쯤의 눈물은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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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유학을 가겠느냐는 부모님의 물음에 제가 고개를 끄덕였던 저의 머리가 하도 미워 제 머리를 벽에 찧기도 했습니다.

 

이런 눈물의 밤낮을 보내는 세월은 그 후 3년쯤 계속 되었습니다.

 

저의 낙은 부모님을 뵈러 갈 수 있는 토요일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제게 가장 미운 날은 다시 도회지로 되돌아가야하는 일요일 오후였습니다. 그 시절 유일하게 저를 성장시킨 것은 외로움과 향수였습니다. 이처럼 슬픔도 때로는 좋은 거름이 됩니다.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었던 부모님은 아들에게만은 좀 더 나은 배움의 기회를 주겠다는 염원으로 저를 유학 보낼 결심을 하셨습니다. 저를 할아버지 몰래 대처로 보내고 공부보다는 농사를 짓는 것이 최고라고 여기신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얼마나 큰 꾸지람을 들었는지는 제가 고등학생이 되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알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는 말짱 헛것이라 여겼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당연히 절기를 알게 되고, 그 절기에 맞추어 열심히 일하면 절로 알아지는 것이 공부라고 여겼습니다.

 

 

중국에서 공부는 '노동자' 혹은 '짬'이나 '노력' 등의 의미로 쓰이고 일본에서도 '일꾼' 또는 '궁리窮理'나 '생각' 등의 의미를 함축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공부의 원뜻이 되는 불가에서는 수양에 진력하는 것을 뜻하지요. 할아버지께서도 '열심히 일하다 보면 궁리가 나고 그 궁리가 바로 공부다'라는 공부의 원뜻과 매한가지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터무니없다, 고 여겼던 할아버지의 생각에 요즘은 차츰 동의해가고 있습니다. 헤이리로 이사 오고 나서, 교과서와 참고서를 바라보는 15도쯤의 시야에 갇힌 제도권교육에 묻혀서 제가 얼마나 많은 젊음을 허비했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제게 얼마나 큰 공부이며, 청소를 하면서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들의 끈을 잡고 씨름하는 것이 얼마나 큰 궁리인지를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시간은 감정을 치료하는 탁월한 효험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고향의 부모님 곁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던 간절한 바람도 점점 농도가 옅어져서 중학교 2학년 때쯤부터는 혼자도 살 만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과 고향이 그립다는 그 절박함도 점차 묽어져서 고등학교 때쯤에는 오히려 부모님 일손을 돕기 위해 주말에 고향을 다녀와야 한다는 것이 성가시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고향에 부모님이 계시고 선산은 여전히 그대로이지만 이제는 오히려 고향이 낯선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알만한 어른들은 세상을 버렸고, 시간을 공유하는 기회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과는 얘기를 이어갈 만한 공통점을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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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지난주 토요일, 고향 선산의 벌초를 하기로 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토요일, 저의 처는 회사에 임시 휴가를 신청한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첫째 딸, 나리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날이었으며, 둘째 딸은 워크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예정보다 일찍 프랑스로 떠나버렸습니다. 아들 영대는 토요휴무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참여한 전시가 시작되는 헤이리의 축제가 오픈되는 날이며, 한 달 전쯤에 모두 예약이 끝난 주말의 모티프원을 비울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처는 고향에 가져가기 위해 챙겨두었던 가방에서 배터리 10개를 꺼내 다시 박스로 포장하고 약간의 현금을 찾아 우체국으로 갔습니다. 배터리는 에너지가 소진되어 다른 사람의 외침도 못 듣는다고 타박 받았을 아버님의 보청기를 위한 것이며, 현금은 저 대신 할아버님의 산소들을 벌초하느라 수고할, 줄곧 고향을 떠나 본적이 없는 제 친구 보용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의 잡초를 벨 발걸음조차 어려운 아들을 둔 부모님. 만약 당신이 저의 부모님이시라면 저를 대처로 내보냈던 40여 년 전의 결정이 옳았을까요? 만약 당신이 저라면, 부모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던 저의 동의가 옳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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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홈페이지 www.motif1.co.kr 과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고향, #벌초, #희곡, #외골, #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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