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의 계서당(溪西堂)은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선생의 집으로 현재 13대 종손부부가 살고 있다. 최근 다시 행랑채 공사를 시작하여 가뜩이나 어수선한 집이 더 정신없어 보였다.

              

도로에 인접해 있지 않고, 앞쪽은 논과 밭이 있고 좁은 길을 따라 1~2분 걸어가야만 언덕 아래에 집이 있는 관계로 도로 옆에 간신히 차를 세우거나 최근에 마련된 집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들어가야 한다.

 

담장이 없고 본채와 행랑채, 사당이 있는 계서당은 좌측에 우사가 있고, 바로 앞에도 논과 밭이 있어 전반적으로 문화재로서는 높은 가치를 인정받기 힘든 측면도 있는 곳이다.

                

하지만 계서당은 특이한 것이 몇 가지 있는 한옥이다. 현대의 아파트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사랑채에는 툇마루 천정에 일부지만 우물 정(井)자 모양의 문양이 있고, 우측 끝에는 남자용 소변기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사랑채 아래의 벽면에는 다양한 문양이 있는데, 어른이 웃는 모습을 닮은 형상과 날개 짓하는 모습 등이 있어 눈길을 끈다. 한옥을 공부하는 사람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다는 특이한 형상이라고들 한다. 고건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가볼만한 곳이라 하겠다.

    

조선 최고의 국문 소설 가운데 하나인 <춘향전>의 초반부는 당시 유행하던 판소리나 민간설화에서 따온 듯하고, 후반부는 성의성의 스승인 산서 조경남 선생이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어사'를 모델로 글을 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경상도 봉화와 영주에 살았던 성의성이 이몽룡이라는 학설은 <춘향전의 형성과 계통> <춘향전 비교연구> 등의 굵직한 저서를 출간한 연세대 국문학과 설성경 교수의 30년 넘는 춘향전 연구의 결과물이다.

 

계서당은 지난 1984년 국가지정문화재 민속자료 제 171호로 지정되었다. 계서당의 원주인은 성이성(1595∼1664)) 선생으로, 선생은 평생 청렴, 결백하여 검소하게 살았던 인물로서 사후 홍문관 부제학에 추서되었으며, 1695년 숙종21년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1786년 정조10년 오천(梧川)서원에 주향되었다.

 

계서당은 광해군 때 남원부사를 지낸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1561∼1629)의 아들 성이성이 광해군 5년인 1613년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인 추측은 열아홉에 안동에서 온 부인 금씨를 얻어 분가를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에는 그가 과거에 장원 급제해 어사로 부임할 당시 임금이 직접 내린 어사화, 어사 출두 시 얼굴을 가리고 직분을 행할 때 쓰는 얼굴가리개인 사선(紗扇) 및 창녕 성씨 족보 등 수 십 여점의 유물이 보관돼 있다.

          

건물은 정면 7칸, 특면 6칸의 ㅁ자형으로 되어 있고,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계서당과 중문으로 연이어 있다. 건물 우측에는 선생을 추모하는 계서당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부친 부용당 성안의 선생은 1561년(명종16년) 경남 창녕 출신이다. 고려 말의 충신인 두문동 72현 중 성만용의 7대손이다. 1591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32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관이 되었다.

 

퇴계의 수제자 가운데 한사람이며, 퇴계의 아들과 사돈이었던 영주출신의 경상우도 관찰사 백암 김륵 선생의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백암 선생은 당시 홀아비였던 성안의의 학문의 깊이와 사람 됨됨이를 믿고 자신의 종손녀(김계선의 딸)와의 혼인을 주선한다. 성안의는 재혼 직후 부모, 형제 전부를 고향 창녕에서 처가인 영주시 이산면지역으로 피난시켰다.

 

전쟁 후 영해부사, 남원부사에 제수되어 3년을 재직하고(이 때 성이성의 나이 13-16세로 춘향전과 연관된다.) 광주목사로 승진하였으나 얼마 후 영주로 돌아가 10여 년 간 후학을 가르쳤다. 1614년에는 처가 인근에 있는 이산서원 원장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봉화의 계서당이 1613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이 시기 정도까지는 처가나 처가 인근인 영주시 동면 문단리,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신암리 지역에서 터를 잡고 성안의 일가가 살았을 것으로 추측 된다.

 

혹은 아들 성이성은 결혼 후 분가하여 봉화군 물야로 가고, 부친 성안의는 영주시 이산면지역에서 계속 살았던 것 같다. 영주시 이산면에서 봉화군 물야면까지는 대략 20~30리 길로 집을 두 채 정도 소유하지 않고는 왔다 갔다하면서 생활하는 것은 불가능한 거리다.

 

계서 성이성 선생은 1595년(선조28년) 임진왜란 중 영주시 동면 문단리에 있는 선성 김씨 집성촌인 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친이 터가 좋다는 친정에 몰래 들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니 대단한 일이다. 부친이 남원부사를 지내던 시기인 1607년부터 3년여 동안 남원에서 부친과 함께 생활하였다.

 

인조5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홍문관 교리, 응교를 역임하였다. 선생이 35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으며 39세에는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43세에 경상도 진휼어사, 호서 암행어사로 나섰으며 45세에는 병조정랑, 교리, 사간 등으로 배명받았으며, 46세와 53세에 호남 암행어사 등 네 차례에 걸쳐 어사를 지냈으며 46세에 합천현감, 54세에 담양부사 59세에 창원부사, 60세에 봉화로 돌아왔다. 61세에 진주목사, 66세에 강계부사 등, 다섯 고을에 대한 선정을 베풀자 고을민들은 송덕비로 답례하였다.

 

1660년 평안감사 임의백이 '관서지방의 살아있는 부처'라고 극찬하였지만, 슬하에 6남3녀를 두고 선생은 1664년 현종5년 향년 70세로 계서당에서 돌아가셨다.

           

말년에는 영주시 이산면 신암3리에 있는 계서초당에서 한동안 생활을 했다고 한다. 부엌이 없고 방 2칸과 툇마루만 있는 초당은 공부와 손님의 숙박 정도만 해결이 가능한 관계로, 이때도 외가나 외가 인근에 있던 부친의 옛집에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선생의 묘는 외가 인근이며, 부친의 묘와 가까운 영주시 이산면 신암3리 손향원(巽向原)에 있다. 특히 선생의 다섯째 아들 문하(文夏)는 젊은 나이에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하기도 하는 등 학문이 뛰어난 집안이다.

           

현재 성이성 관련 유적은 봉화군 물야면의 계서당을 비롯하여, 말년에 그가 머물며 공부했다는 영주시 이산면 신암3리의 계서정(초당)과 무덤이 있다. 특히 계서정의 현판은 당대의 문사 채제공 선생의 기문(記文)으로 알려져 있다.

 

계서당을 지키고 있는 종부는 "시집 와서 30년 넘게 시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님께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의 조상이라고 알고 있다"라며 "몇 년 전 선성 김씨 종가에 가서 족보를 확인해 보니 부용당 할머님이 그 집에서 왔다는 기록도 확인했고, 그 집에서도 늘 이몽룡의 어머니가 우리 집안 할머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들었다"라며 "원작과 달리 성씨가 다른 것은 당시 양반 문화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많아 남녀의 성씨를 바꾸어 표기한 때문" 이라고 이몽룡 설화의 주장을 보충 설명했다.

 

두 집안의 이야기를 익히 들은 나는 사실이 100% 정확하다고 확신을 한다.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 이몽룡은 분명 계서 성이성 선생이다.  


태그:#봉화군, #영주시 , #계서 성의성, #춘향전, #이몽룡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