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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언명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겠다. 언어는 그의 품격과 교양과 신분과 세계관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마련이겠다. 따뜻한 말 한마디는 절망에 빠진 누군가에게 한줄기 위로와 희망이 될 수도 있겠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해 있다. 용산 참사, 쌍용차 노동자들의 집단 해고, 화물연대의 생존권 투쟁,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가중되는 고통, 영세 자영업자들의 몰락, 탤런트 장자연의 자살, 급기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분향소 철거와 서울광장 폐쇄에 이르기까지, 아, 북핵 위기도 있다! 내가 이걸 빼먹으면 하이에나 같은 무리들이 달려들어 너도 빨갱이지? 하고 딲지를 붙이겠다. 위기에 처한 한국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말 한마디, 아니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수경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 없는 다독거림,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 사회는 증오를 부추기는 말들이 횡행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무서운 일이다.

 

시인 안도현은 그의 시에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너에게 묻는다>. 뜨거운 열정도 없이 관성처럼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속물성과 허위의식을 꾸짖는다. 그는 계속하여, <우리가 눈발이라면>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고 노래한다. 잠 못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 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고 노래한다.

 

새삼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 땅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 중의 한 존재일 뿐인 나는 진즉에 세상에 대한 결기를 놓아버려서, 작년의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때도 그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만 '바라 보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정부 쪽 사람들의 아전인수식 해석대로 '말 없는 다수'의 편에 서 있었던 건 결코 아니다. 대학의 시간 강사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나는 그 다음날 일찍부터 몇 군데 강의를 나가야 했기 때문에 함께 참여하지 못했을 뿐이다. 가끔 써 왔던 오마이뉴스 기사도 바쁘고 시간 내기 힘들어 오랫동안 쓰지 못했다. 내겐 세상에 대한 결기 못지 않게 속되고 비루한 일상일망정 포기하거나 방기할 수 없는 절실함을 느낀다. 그게 나의 생존 조건이다. 그러니 어쩌랴.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뉴스를 듣고 참담한 심경이 되었던 것은, 나 역시 그분에 대한 애증이 있었던 탓이다. 국민장이 열리기 하루 전날 밤, 혼자 먼 길을 달려 봉하마을 그의 빈소에 흰 국화 한송이 바치며 비통한 심경으로 엉엉 울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도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 눈물을 펑펑 흘렸지 싶다. 세종연구소장이라는 자는 지에미 애비가 죽어도 그럴까 하고 물었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겠다. 그 사람은 지에미 지애비가 죽어도 그러지 않을지 모르겠다.

 

나는 노사모도 아니고 정당에 가입해서 활동한 적도 없다. 그에게 투표했을 뿐이다. 한국 사회의 비주류인 그를 아낌없이 지지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종종 말의 품격을 잃어버렸다고 나도 믿었고, 특히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제의할 때, 나는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어찌되었건 박연차의 돈을 받았다고 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들이 뇌물 수수와 연결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실망스럽고 무척 아쉬웠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가서 농사짓고, 사람사는 세상 만들어 보자고 연구하던 유일한 사람이다.

 

나는 그분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창문가의 편지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는 그저 평범한 한 존재일 뿐이었으므로. 그저 전두환이와 비교하면, 그리고 한나라당 대선 후보들에 비하면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을 가지고 너무 고통을 당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패륜적인, 증오의 말들을 서슴지 않는 이들을 지켜보며 나는 다시 세상에 대한 결기를 느낀다. 바로 그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에 광분하는 이들을 보고서도 분노가 치민다. 그의 말은 그른 것이 없다.

 

조갑제여, 나는 당신이 지칭한 '전라도 사람'이다. 대한민국을 선택하든가 김대중을 선택하든가 양자택일을 하라고? 세상에 그런 폭언이 어디 있는가? 그렇게 뿌리깊은 증오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너무 기뻐서 울었던 사람이다. 오랜 정치적 탄압과 시련을 이겨내고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의 인간 승리에 감격했을 뿐이다. 당신의 말을 듣자니 80년 5월의 기억이 상기도 새롭다. 5.18때 계엄군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갔던 광주교도소에서 나는 무참한 집단 구타를 당하면서 군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너, 김대중에게 돈 얼마 받고 데모에 나섰어?" 나? 그때까지 김대중 얼굴도 보지 못했던 사람이다. 5.18때 왜 우리가 총을 들었는지 조갑제, 그리고 지만원, 변희재 따위, 그리고 전여옥 지지모임들, 당신들은 아는가? 그것은 거대한 국가폭력을 목도한, 그저 평범한 시민들의 윤리적 분노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뿐이다.

 

오늘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애도는 5.18때의 심정과 크게 다를 게 없겠다. 그러니 말을 삼갈 일이다. 증오를 부추기는 패륜적이고 폭압적인 언어로는 오늘 한국 사회를 더욱 분열과 대립 속으로 몰아갈 뿐이다. 붉은 상처 위에 더 이상 소금을 뿌리지말라.


태그:#조갑제, #변희재, #전여옥, #증오의 말들, #노무현대통령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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