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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649년의 끝자락. 찬바람이 문풍지를 때리는 밤. 김육은 잠에서 깨었습니다. 흠뻑 젖은 저고리가 악몽을 되살렸습니다. 꿈에 이원익을 봤습니다.

이원익. 키작은 재상이라 불리며 평생 작은 초가집 한 채 외엔 재물엔 관심도 두지 않았던 그는 거대한 농장을 가진 청렴한 도덕주의자 사림들에게 '왕안석이 되려 하는가?' 하는 비판에 휘청거려야 했습니다.

이원익은 '민중주의자'입니다.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임금이 위기의 순간마다 그를 재상으로 중용함으로써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그의 성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실력있는 민중주의자의 폭발력이란 예나 지금이나 굉장한 법이니까요.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달리 나온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그도 결국 '왕안석주의자'라는 사림파들의 맹공격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그를 공격한 사람들은 광해군의 실용정치를 무너뜨리고 다시 성리학적 이념정치를 통해 복고주의로 회귀하는데 성공한 사림파들이었습니다. 인조반정을 통해 이황계열의 남인과 이이계열의 서인이 연립정권을 이룬 사림파는 반성리학적 경향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념적 순혈주의를 내세우며 병적인 결벽증을 내보였습니다.

전쟁으로 가장 괴로운 사람들은 전세, 공물, 부역이라는 세가지 세금을 집중적으로 내야 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세금이 직접세적인 조세로서 부자와 빈자의 형평성을 고려하지 못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조선시대 후기 세금체계는 심각할 정도로 인두세적인 성격이 강해져갔습니다. 인두세는 아시다시피 머릿수대로 세금을 매기는 것입니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 버거운 시대가 백성들을 억눌렀던 것이지요.

선조가 전쟁의 책임을 지고 사림파들이 줄줄이 낙마한 뒤 그 뒷수습을 맡을 사람이 필요했을 때, 사림파들의 명분론 때문에 늘 자리가 위태로웠던 광해군이 새로 왕위에 올랐을 때 그랬던 것처럼 광해군을 무너뜨리고 반정을 통해 임금이 된 인조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았습니다.

백성이 없는 나라란 존재하지 못한다고 믿는 민중주의자의 가치가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만 이원익에겐 너무 큰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유한 선비들이었지요. 이미 땅은 부의 척도였고, 부의 축적수단이었으며, 매매의 대상이 되어버린 시대였으니까요.

이원익은 그런 부자들에게 민감한 문제인 세금문제에 정면 도전했습니다. 바로 '대동법'의 실시를 주장한 것입니다. 인두세적인 공물제도를 직접세의 형태로 바꾸는 내용이 포함된 조세제도개편에 기득권층은 벌컥 뒤집혔습니다.

2.

공물제도는 아시다시피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백성에게 조달해 쓰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이 종이며, 먹이며, 벼루를 만들어 바칠 수는 없는 법, 이를 대신하는 방납인이 생겨났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사설 불법 조달청쯤 될까요?

방납인은 온갖 명목으로 백성들을 수탈했습니다. 공물은 매점매석의 표적이 되었고, 방납인이 공물을 대행하면서 받아먹는 수수료인 인정, 작지세가 공물보다 더 커졌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인정, 작지세에 기생하는 관리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원래 인정이라는 것은 구실아치들이 무급 봉사직이다 보니, 백성들이 인정을 베풀어 그들이 굶지 않고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던 관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전들은 인정이 넘치면 공물을 받아들였고, 인정이 모자라면 '퇴점'을 놓았습니다. 퇴점을 맞은 공물은 관청에서 수납해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인정을 듬뿍 얹는 편을 선택했지요.

방납하는 사람들과 짠 아전들이나 관청 소속 노비까지 인정을 이용해서 배를 불렸습니다. 관행이다 보니 관리들도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합법적인 뇌물인 셈이죠. 그래서 영조 때의 실학자 성호 이익은 차라리 급여를 현실화하고, 뇌물이나 부정행위를 엄격히 금지하는 법 개정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방납인들이 미리 사놓은 인삼을 사서 공납을 하다보면 상인들은 폭리를 취하고, 아전들은 퇴점을 무기로 인정을 챙기게 됩니다. 결국 잣 한자루 값이 산지에서 열 말이었다면, 공납할 때는 인정까지 얹어 서른 말이 됩니다.

여기에다 작지세가 보태집니다. 작지세는 백성들이 부담하여야 하는 간접세적 성격을 지닌 일종의 부가가치세로 세금을 낼 때 그 세금을 수납하는 관청에서 '장부책을 구입할 때 보태쓰십쇼'하고 내는 종이값입니다. 작지세가 세금보다 작은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가령 강원도 특산물인 밤을 한양의 서옹원에 낸다고 해보면,

먼저 동네 수령에게 수납(작지세 첨부)+배에 선적(작지세 첨부)+배에서 하적(작지세 첨부)+수레에 선적(작지세 첨부)+수레에서 하적(작지세 첨부)+사옹원수납(작지세 첨부)+사옹원창고에서 수랏간으로 이동(작지세 첨부)….

궁중의 사옹원 내시들부터 마을 동헌의 구실아치까지.... 10말의 세금을 내면 나라의 곳간에는 고작 두말이 들어갈 뿐이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문 먹이사슬의 끝에선 백성들의 삶은 고달픔 그 자체였고 나라도 가난하여 불타버린 경복궁을 다시 세울 엄두도 못 냈습니다.

공물의 인두세적인 성격 때문에 결국 야반도주하는 백성들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임진왜란 이후 밤길은 그런 백성들로 가득 찼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이원익은 대동법을 내놨던 것입니다.

3.

대동법이 최초로 제기 된 것은 조광조때였습니다.

원래 공물은 지방의 수령이 중앙정부에 보내는 선물 성격을 가지기도 했는데, 연산군때에 이르러 한몫을 보려는 수령들이 앞 다퉈 희귀한 것들을 올려 보내면서 폭력적인 세금으로 변질했습니다.

수령이 한 번 정하면 그것을 바꾸는 일은 어지간하면 이루어지지 않다보니 여름에도 물고기를 잡아 바치기 위해 얼음을 준비해야 하고, 어찌어찌 임금님 수랏상에 오른다고 해도 그 고기에 젓가락 한 번 올라갈 일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율곡 이이가 황해도 해주에 수령으로 있을 때는 고라니를 구하기 위해 농번기에 장정들이 농삿일을 팽개쳐야 하는 일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고라니와 노루를 구분하기 쉽지 않아 노루란 노루는 죄다 잡아들여야 했던 것이지요.

보다 못한 이이는 공납제도의 개혁을 주창하였으나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다시 유성룡이 전쟁으로 공납물품목록도 엉망이 되고 피난을 가고 오느라 마을마다 인구변동상황도 심한 것을 이용하여 새로운 공납법인 '대동법'을 주장함으로써 이 새로운 법안은 최초로 그 이름을 얻습니다.

대동법은 말 그대로 온 나라가 한데 뭉칠 수 있는 법이라는 뜻입니다. 세금 때문에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반목하는 것을 보다 못한 유성룡의 명쾌한 작명센스인 셈이지요. 대동법은 처음 선혜법이라고도 불리고, 그래서 선혜청에서 관리하였는데 이 역시 공평하고 은혜로운 세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축복받은 세금이었지만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유성룡과 이원익에 의해 추진되었던 대동법은 곧바로 반대에 부딪혀 폐기되었습니다.

이원익은 다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영의정에 올라 대동법을 추진하였습니다. 하지만 공납에 기생하던 아전, 관리, 상인, 내시, 관노비 등은 물론이고 부유한 농장주들인 선비들에 의해 정권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반대에 직면하였습니다. 결국 경기도에서만 실시하는 것으로 매듭지으며 열렬한 반대파들의 소리를 잠재워야 했습니다.

대동법의 이념적 기반을 성리학에서 찾아내는 일은 '조익'이라는 관리가 성공했습니다. 그는 율곡 이이의 후계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섬세한 감각과 뛰어난 논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인조반정 첫해에 민심을 달랠 목적으로 세금을 깍아주기 위해 만든 관청인 재생청의 실무자로 뽑힌 조익은 대동법이 단순히 편리한 제도라는 실용성에 입각하여 반대파를 설득하기보다는 근본적인 논리를 제시한 유명한 자신의 상소를 통해 반대파의 침묵을 이끌어냅니다.

그는 세금의 기본원리를 유교의 정전법에서 찾았습니다. 우물 정井에서 유래한 이 체계는 땅을 아홉등분해서 가운데 공동밭이 세금형식으로 나라에 바쳐지던 시대를 유교의 이상정치시대로 삼으면서 나온 이념적 조세제도입니다. 이미 지방에서 지주로 성장한 사림파들은 이것을 까먹은 것처럼 행세했지만 조익은 이것을 세련된 정책과 이념으로 발전시켜냈던 것이지요.

부자 사림들의 반격은 당연하게 거셌습니다. 공물제도는 가가호호 분배되는 간접세적 세금이지만 대동법은 재산에 따라 부과되는 직접세입니다. 당연히 부자들에겐 세금폭탄으로 여겨졌습니다. 마을의 향교, 서원, 유향소 등을 기반으로 여론을 장악한 부자 선비들의 저항은 불보듯 뻔 했습니다.

대동법에 반대하는 지방 사림들을 무마하기 위해 최명길 등에 의해 주도된 법안은 '호패법'입니다. 호패법은 결국 주민등록일제정리나 호구조사와 같은 것이라서 야반도주하는 백성들의 행렬을 저지함으로써 세금을 쥐어짜내겠다는 노골적인 의사표시였습니다.

이제 대동법은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명분도 나라의 곳간을 채워줄 것이란 실리도 다 잃고 높디높은 절벽위에 깃발만 위태롭게 나부끼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두문불출하던 이원익은 결국 왕안석주의자라는 사림의 공격에 항복을 선언합니다. 세 임금에 걸쳐 영의정에 올랐던 명예를 한순간에 잃어버리면서까지 철저한 민중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일까요? 조익의 열정적인 변호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은 폐기되었고 그렇게 묻히는 듯 했습니다.

4.

성균관 유생시절, 학생운동인 공관운동을 주도하다 퇴학당한 김육은 이후 경기도 가평에 있는 잠곡에 들어가 숯을 구워팔고 남의 집 품을 팔며 연명하는 지독한 하류인생을 살았습니다. 공관운동은 유생들이 일시에 성균관을 비우는 단체행동이니 일종의 수업거부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균관은 태학이라 불리는 왕립대학. 임금이 수시로 이들을 불러 성적을 점검하는 곳이니 그들의 단체행동은 광해군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혈기왕성한 김육은 서른 살에 쫓겨나 마흔 다섯 살이 되도록 하루하루 힘겨운 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친구들의 도움으로 다시 한양에 돌아왔고 과거에 응시 장원급제하며 벼슬을 시작한 김육은 늦은 나이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고 글을 읽게 해주었던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벼슬길에 나선 관리가 진실로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백성들을 반드시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는 소학의 한구절을 자신의 사표로 함으며 쓸개를 씹듯이 견뎌온 삶. 가장 낮은 곳에서 바라보았던 백성들의 삶을 바꾸는 것, 그 꿈이 그가 밤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글공부에 매달릴 수 있게 해준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독특하기 이를 데 없는 공리주의자에 의해 꺼져가던 대동법의 불씨가 다시 되살아나게 됩니다.

한양으로 되돌아온 후 김육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최명길, 장유와 함께 어울리던 조익을 만났습니다. 더불어 대동법이 흥망성쇠하는 과정을 지켜봅니다. 이원익이 왕안석주의자로 몰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김육의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사림들에게 왕안석주의자는 한나라당 당내에서 '극좌 빨갱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던 때입니다. 인터넷도 없던 때이니까요.

그러나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해, 대동법이 얼마나 효율적인 시스템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백성도 편안해지고 나라도 부강해지는 유일한 해답. 그로서는 무척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겠지요. 조선시대 역사상 가장 추진력 있는 인물인 김육에게 가장 많은 고뇌의 시간이 흘렀을지도 모릅니다.

충청도는 사림파의 성지나 마찬가지입니다. 송시열, 김집 등 장차 서인집권기를 열어갈 인물들은 김육을 예의주시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서인이었으나 시골 산림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던 김육. 그래서 그를 일컬어 한양파란 뜻으로 한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김육의 공리주의가 무르익은 것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부터였습니다. 명나라 수도에서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 임금이 언 땅에 머리를 세 번 찢어 피가 배어나오는 이마를 짚고 항복문서를 바쳤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 속에서 부국강병의 길을 꿈꿨습니다.

다시 사신단을 이끌고 간 곳은 청나라의 첫 번째 수도인 심양.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잠시 귀국하는 조건으로 세자의 아들인 원손을 모시고 들어가는 임무를 맡았던 것입니다. 심양에서 김육은 명나라의 항복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의 위용을 보았습니다. 부국강병의 힘. 그것은 상업과 과학기술과 활발한 국제교류의 산물이란 것을.

심양에서 짧은 시간 김육은 봉림대군과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김육과 조선후기 역사를 바꿔놓았습니다.

5.

힘없는 나라의 왕자로서 비극을 몸소 겪은 봉림대군은 왕위에 오르자 김육을 찾았습니다. 김육의 부국강병책만이 나라를 살릴 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조익을 비롯한 대동법 찬성파를 대거 이끌고 김육은 효종 제1기 내각의 실세로 입각합니다.

사림파의 영수 김집은 배수의 진을 치고 효종임금을 압박했습니다.

'김육과 김집 가운데 한사람을 선택해서 국정을 운영하시오!'

김집을 선택하면 효종임금의 앞길은 탄탄대로입니다. 산림정치시대로 접어든 이때 선비들의 좌장이며, 유림들의 교황인 김집을 반대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김육을 선택한다면 빗발치는 상소 때문에 매일 두통에 시달릴 것이 뻔했습니다.

사림들이 자신에게 왕안석주의자의 낙인을 찍으며 몰아세우자 김육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겨울날, 꿈을 꿉니다. 이원익이 그랬듯이 자신이 왕안석주의자가 되어 선비들 사이에서 난도질당하는 꿈….

임금 사랑과 나라 걱정은 죽은 자나 산자가 한 가지인데
이 얼마나 행운인가, 오늘밤 꿈속에서 이원익 대감을 뵈었네.
그때에 왕안석이란 끝없는 비방은
지금도 아이들의 멋모르는 노래 속에 담겨 있는데.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어둠은 걷히지 않았습니다. 깊은 산속의 초가집에 홀로 앉아 있으려니 너무도 조용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대로 눈 속에서 잊혀가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효종이 폭넓은 보수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김집을 포기하고 김육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마침내 대동법은 최후의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서인은 철저히 보수적인 집단이었지만 그들의 비판은 김육의 계산 속에서는 늘 배제되었습니다. 자신의 지지기반과 타협하기보다 백성과 소통하기를 원했기에 늘 서인집단과 갈등을 빚었지만 결국 역사적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김육이 세상을 떠난 뒤 효종임금은 송시열 앞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근래에 한 사람도 국사를 담당하는 사람이 없어서 시사가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다. 이에 대해서 대신들은 마땅히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전에 대동법을 시행할 때 김육이 홀로 담당하면서 뜻을 견고하게 가져 흔들리지 않아 성사시키고 말았던 것을 내가 잊지 못하고 있다. 견고하고 확고하기가 김육과 같은 사람을 얻고자 하나,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6.

효종은 봉림대군 시절 외로운 왕자의 말벗이 되어주었던 김우명과 사돈관계를 맺었습니다. 김우명은 늙은 아버지 김육을 따라 심양에 갔다가 봉림대군을 만난 것이지요. 소현황후는 김우명의 딸이고 그 사위는 훗날 현종이 됩니다.

더불어 큰 아들 김좌명, 손자 김석주까지 영의정에 오르는 몇 안 되는 3대 정승 가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철저하게 몰락했던 청풍김씨 가문은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발돋움했습니다.

영의정에 오른 뒤, 김육은 처음으로 한양에 집을 지었습니다. 평생 셋방살이를 하던 고관대작이라니…. 그의 집에 집들이를 간 사람들은 한 번 더 놀랐습니다.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에 올랐고 세자빈의 할아버지인 그의 집은 놀랍게도 지금의 강남이랄 수 있는 북촌이 아닌 남촌, 즉 남산 그것도 달동네격인 산골이었지요. 앞에 달아놓은 현판의 '구루정'이란 이름답게 정승의 집은 남루한 초가집이었습니다. 구루정은 허리를 꺾어야 들어갈 수 있는 정자란 뜻입니다.

그가 죽고 난 뒤 공조 참판 민응형이 민심을 임금에게 아뢰었습니다.

"조정에서 실제적인 혜택을 받도록 힘쓰면 백성들이 모두들 감격하여 떠받드는 법입니다. 근래에 호서의 사민들이 상신(相臣) 김육(金堉)의 초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앞다투어 부의하였는데, 김육의 집에서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온 도에 통문을 돌려 경계 지점에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한 상신이 남긴 은혜도 오히려 잊지 못하는데, 더구나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푼다면, 사람들이 깊이 감동함이 또한 어떻겠습니까."

비석은 지금 전북 익산에 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태그:#대동법, #소통, #김육, #왕안석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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