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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쿠데타가 일어나던 해(1961년) 앨범사진인데요. 그 해에는 보름이 멀다하고 저희 동네 공설운동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습니다.
 5·16쿠데타가 일어나던 해(1961년) 앨범사진인데요. 그 해에는 보름이 멀다하고 저희 동네 공설운동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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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저에게 가장 먼저 했던 선물은 등굣길이 즐겁기만 했던 학교를 옮기라는 '전학통지서'였습니다. 당시 용어로는 '학구제개편'이었는데요. 박정희는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생활을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했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멀리 떨어진 구암초등학교로 전학했는데요. 한옥에 기와를 얹어놓은 것 같은 본관 건물과 처음 만난 학우들이 낯설기만 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바라보면 지붕이 'W' 모양으로 내려앉았고, 어른처럼 목소리가 굵고, 턱에 검은 수염이 나있는 급우들도 여럿 있었으니까요.

다행히 자주 놀러다녔던 고향동네 친구가 몇 명 있어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는데요. 조개껍데기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집과 송아지 울음소리, 무릎까지 자란 벼들이 물결처럼 너울대는 들녘이 새롭기도 했습니다.

신기했던 '교통경찰대 완장'  

전학해서 얼마 되지 않아 '어린이 교통경찰대'로 뽑혀 경찰서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박정희가 준 두 번째 선물이었지요. 보안과장이 "여러분은 이제 교통경찰이 되었습니다. 운전수가 교통법규를 위반하면 어떤 차든지 세워서 지적하고 차 번호를 적어서 경찰서에 신고해주세요"라고 할 때는 갑자기 높은 사람이 된 것처럼 우쭐해지기도 했습니다.  

교육을 마치니까 경찰마크가 박힌 하얀 띠와 완장을 나눠주더군요. 팔에는 완장, 허리와 어깨에는 하얀 띠를 두르고 학교 앞에서 교통정리를 했습니다. 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정도로 좁고, 먼지가 푸석푸석 나는 자갈길이었는데요. 내 지시에 따라 차가 직진하고 좌·우회전 하는 게 신기했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등교해서 교통정리를 했습니다. 차가 귀하던 시절이라서 버스 한 대가 지나가는 날도 있었는데요. 그래도 직원과 자녀만 이용할 수 있었던 고려제지(페이퍼코리아) 버스는 매일 다녀서 항상 반가운 친구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루는 고려제지 버스 기사가 직진 표시를 안 하기에 팔을 들어 정지 신호를 했더니, 버스를 세우고 창문을 열기에 왜 직진 표시를 안 하느냐고 했더니 큰소리로 혼을 내더군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릅니다. 그 아저씨 아들이 같은 반이었는데 지금도 만나면 그때 그 일을 얘기하며 웃습니다.  

갈수록 더했던 사상교육

전학을 하고 날이 갈수록 박정희 군사정권의 사상무장 교육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고, 변화해갔습니다.

반공·방첩으로는 부족했는지, 초중고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군가를 부르게 했으며 혁명공약을 외우도록 했습니다. 등·하교 때는 학생들이 특정한 장소에 모인 다음 기를 들고 군가(용진가)를 부르며 열을 지어 다녀야 했지요. 어린 학생들조차 개인행동을 금지했던 것입니다.

선생님들도 북한 '인민복'을 떠올리게 하는 '재건복'을 입고 수업했습니다. 개인 취향을 깡그리 무시한 것이지요. 공무원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재건복을 입으라고 다그치니까, 당장 입에 풀칠할 돈도 없는데 옷을 맞춰 입으라고 한다며 불만이 많았는데요. 오죽하면 '북한에는 인민복, 남한에는 재건복'이라는 말이 나돌았겠습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해서 70년대 초부터는 모든 공책과 참고서에 새마을 마크와 국민교육헌장, 국기에 대한 경례 낭독문, 반공방첩 등의 문안이 등장했지요. 박정희가 얼마나 국민을 바보로 만들고 우롱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고유의 민속명절인 설은 물론 제사문화까지도 참견했던 희대의 독재자 박정희를 생각하면 '멍석 깔아 놓으니까 미친놈이 와서 춤춘다.'는 속담이 떠오릅니다. 대학생, 시민 어린 학생들까지 피를 흘려가며 겨우 찾은 민주주의를 혼자서 죽는 날까지 농단했기 때문이지요.    

국민 정신건강을 멍들게 했던 박정희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모든 게 바뀌고 이상하게 변했습니다. 계엄령이 내려진 거리에는 낮에도 어깨에 총을 멘 군인과 경찰들이 오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문했고, 우측통행을 하면 잡아서 길에 세워두곤 했지요. 어머니는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면 골목 밖으로 못 나가게 했습니다.

교과서에 적혀 있던 '우리의 맹세'는 '혁명공약'으로 바뀌었고, 공무원들 정장도 북한 '인민복'과 비슷한 '재건복'으로, 인사도 "안녕하세요?"에서 "재건합시다!"로, 2교시가 끝나면 운동장에 모여 하던 '국민 보건체조'는 '재건체조'로 바뀌었습니다. 1년 후에는 돈도 바뀌어 경제에 엄청 손실을 주었는데 듣기 좋게 '화폐개혁'이라고 하지요.  

초등학교를 50년대에 다닌 분들은 지금도, '어깨동무 내 동무', '동무들아 달마중 가자'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정겨운 동요이지요. 그런데 '동무'가 북한에서도 사용된다는 이유로 무서운 단어가 되어버렸고, '공작' 시간도 없어지고, '단기'도 '서기'로 바뀌고, 운동회 때 '홍군, 청군'이 '청군, 백군'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군정 기간을 연장해가면서까지 장기집권의 틀을 마련했던 박정희의 교육방침은, 인민을 사상으로 무장시켰던 북한 김일성의 통치방식과 놀랍도록 흡사한데요. 국민을 통치 대상으로 만들려고 온갖 술책을 부렸던 쿠데타 권력에 충복 노릇만 했지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선생님을 보기 어려웠다는 게 더욱 속상하게 합니다.

오늘날 여론조사를 할 때마다 가장 훌륭한 대통령, 가장 강직하고 검소했던 대통령, 부패하지 않은 대통령으로 꼽히는 이유는 바르게 가르쳐야 할 교육자들이 앵무새 노릇만 했던 영향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추운 날 오뎅(어묵)을 사먹을 때 옆에서 구경하는 친구와 뜨거운 국물을 나누어 마시던 추억이 그립고, 도시락을 석탄 난로 위에 올려놓았다가 태워 먹었던 추억, 봄이면 남의 못자리 다 버려놓으면서 송사리 잡던 추억에 급우들과 운동장 풀밭에 누워 혁명공약을 외우던 추억도 잊을 수가 없는데요. 속상했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되나 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초등학교 , #박정희, #5.16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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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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