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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를 지나며

 

가난과 영화는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뜻대로만 되리요

나는 내멋대로 유유히 지내왔노라

고향 하늘 바라보니 천리길 아득하고

남녘을 떠도는 내 신세 허망한 물거품

술잔을 비삼아 쌓인 시름 쓸어버리고

달을 낚시삼아 시를 건져올리네

보림사와 용천사를 두루 돌아보니

속세 떠난 한가함이 비구와 한가지라

 

19세기 조선의 전국을 돌아다니며 시를 남기던, 희대의 묵객이었던 김병연. 그의 발걸음이 보림사에 다다랐던 때는 그의 인생도 황혼에 접어들어 그만 세상걸음을 멈추기 얼마 전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할아버지를 욕하였기에 스스로 부끄러워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떠난 지 어연 30년... 문방사우와 보따리로 살아간 그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어느덧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김삿갓이 마지막 여정으로 택한 곳은 남도의 사찰들. 보림사와 용천사가 그 대상이었기에 그는 쇠잔한 발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이곳으로 오게 된다. 그리고 이곳을 둘러보고 난 후 화순 땅으로 가서, 그의 파란만장하고도 바람과도 같았던 생애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운명에 이끌려 어쩔 수 없는 방랑생활을 하였고, 풍류를 느끼며 살아왔건만 결국 그의 마음  속에는 고향과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한 편에 쌓여있었으리라.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담아 보림사를 보고 휘갈겨 쓴 시는 후세에 남아 김삿갓의 애잔한 마음을 투영해준다. 이 시는 그러한 김삿갓의 마음을 담아 현재 보림사 동부도군 앞의 바위에 조각되어 길손들에게 보이고 있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노구를 이끌고 찾아 떠난 보림사. 이곳을 보고 죽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에 그는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으리라.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였던 보림사는 과연 어떤 절이었을까?

 

빨갱이들이 머물렀다고? 불을 싸질러라!

 

 

가지산 보림사는 신라시대 때 세워졌다고 전하는 역사가 깊은 사찰로서 우리나라에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온 가람이다. 본디 이곳에 터를 잡았던 스님은 원표대덕으로, 이후 보조국사 체징이 법을 전수받아 가지산문을 세웠다. 가지산문은 신라시대 대표적인 선종 사찰 9군데를 의미하는 구산선문 중 하나로서 현재 이 중에서 4곳의 사찰은 폐사된 상태이다.

 

구산선문이라는 이름에서 눈치 채었듯이 이 절들은 당시엔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규모 사찰이었고, 이곳에서 여러 훌륭한 스님들과 문화재들이 있었다. 장흥 보림사도 다른 절들 못지않은 연혁을 가진 유서 깊은 사찰이다. 하지만 그 이름이 생각보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한동안 이곳이 역사에서 지워진 곳이었기 때문이리라.

 

보림사는 신라시대 원표대덕 때 경덕왕이 장생표주를 세우도록 하였다고 한다. 장생표주란 신라와 고려시대에 사찰의 경역을 표시하기 위하여 사찰 주변에 세운 표지물로서 보림사의 것이 최초의 것이라고 하지만, 현재까지 전해지진 않는다.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조선시대엔 50여동의 전각을 중창하는 등 대찰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번창하였던 보림사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950년 가을, 전남 지역의 공산군 유격대가 가지산으로 집결하여 보림사에서 한 겨울을 났었다고 한다. 본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말리지 않는 절이기에, 이곳의 스님들은 그들에게도 넉넉한 인심을 베풀었으리라. 하지만 공산군이 떠난 뒤 군경토벌대가 '공비들의 본거지'라고 하여 불을 질렀다고 하며, 이 과정에서 20여동의 건물들이 모두 불타고 겨우 일주문과 천왕문만 변을 면했다고 한다.

 

이렇게 허무하게 천년의 역사를 지닌 대가람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리고, 한동안 이곳에서 머물던 공산군이 이곳을 나오면서 불을 지르고 나갔다는 이야기로 와전되어 전해졌었다. 폐사 위기까지 처했던 보림사는, 다시 스님들의 노력으로 가람을 하나둘씩 지으면서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으며, 지금은 어느 정도 구색이 갖춰져 있다.

 

익살스런 청룡의 조각, 보림사의 수호신은 아닐는지?

 

보림사는 문화재가 다른 사찰에 비해 많은 편이다. 국보가 2점, 보물이 8점, 전라남도 문화재가 15점이나 되니 그 오랜 역사를 간접적으로 알게 해준다. 이 중에서도 입구의 일주문과 천왕문은 역시나 오랜 세월을 머금었기 때문인지 다른 건물과는 남다른 느낌을 준다.

 

일주문은 팔작지붕에 다포를 올려 그 권위를 높이고 있다. 공포의 앞부분에 내민 부분인 살미는 양서형으로 하여 고풍스러운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그러면서 5단, 즉 오윤공까지 올려 격이 높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늘의 구름에서 색을 내어 바른 듯한 푸른 단청 또한 이 고풍스러움을 더해주지만, 더 눈여겨보아야 할 곳은 일주문 내의 청룡이다.

 

일주문의 청룡 또한 푸른 단청으로 색을 칠했다. 갈기는 초록색으로, 비늘은 파란색으로 칠하여 청룡의 인상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얼굴에 있는 대판 표현이다. 세세하게 비늘을 그려 얼굴에 색을 칠할 수도 있지만, 너무 그렇게 하면 약간 너저분해 보이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두자니 청룡의 멋을 낼 수가 없다. 도공은 이에 대해 의외로 간단한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붓으로 점을 찍어 푸른 점박이 청룡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푸른 점박이라는 이름에 청룡의 위엄스러운 인상에 어울리지 않으리라는 선입견이 들 수도 있지만, 이러한 표현은 의외로 청룡의 매력을 살리는 데 큰 일조를 한다.

 

청룡 또한 세월을 겪는지 그 이빨도 마모되고 풍파에 시들렸다. 위엄스러운 모습보다도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남아 이곳을 수호하고 있는데, 흔히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잠시 일주문 안에서 멈춰 서서 가람을 바라본 후, 이 청룡에 눈길을 주는 것도 제법 쏠쏠한 재미를 안겨준다.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용이라지만 이곳에선 왠지 특별하다. 이는 보림사 창건설화 중에서 용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아서이다. <신라국무주가지산보림사사적기>에는 신라의 고승인 원표대덕이 이곳의 용들을 쫓아내고 절을 세운 이야기가 나오며, 구전설화에서는 보조국사 체징이 이곳의 못을 메우려고 꾀를 써서 용과 이무기 등을 몰아내는데, 마지막에 청룡과 백룡이 남았다고 한다. 이 둘은 결국 다투며 승천하다가 백룡의 꼬리에 치여 청룡이 떨어지게 되고 이와 관련한 지명이 곳곳에 남아있다. 결론은 다들 용을 쫒아낸 이야기지만, 결국에는 그 용도 이곳으로 돌아와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이 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오백년간 이 곳을 수호하였노라

 

 

일주문이 사찰로 들어가는 불법세계의 입구라면, 이 사찰의 문지기는 바로 사천왕이 되겠다. 절의 입구마다 그 위엄어린 자태를 하며 길손들을 내려다보는 사천왕은 역시 보림사에서도 어김없이 볼 수 있다. 어김없이 볼 수 있다고 하기보다도, 다른 사찰들과 비교해서 더욱 특별한 사천왕이라 말 할 수 있다.

 

이 보림사의 사천왕은 나무로 조각한 것으로서, 목제 사천왕상 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초기의 작품으로서 임진왜란 이전의 것이라고 하니, 그 나이가 무려 5백년에 가까울 정도로 오래되었다. 오랜 연륜에도 불구하고 그 조각의 모습도 빼어나 문화재적으로 그 가치가 높기에 보물로까지 지정되었다.

 

하나하나 살펴보자면 우선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사천왕보다도 그들의 앞에 서 있는 금강역사이다. 양쪽의 금강역사는 머리가 크게 표현되고 뒤의 사천왕 때문에 키가 작아 보여 마치 어린아이 같다는 느낌마저도 준다. 부릅뜬 눈에 인상을 쓰고 있지만 그다지 무섭진 않고, 꽉 쥔 주먹은 정말이지 앙증맞다.

 

입구 기준으로 왼편에는 서방 광목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이, 오른편에는 동방 지국천왕과 남방 증장천왕이 자리 잡고 있다. 광목천왕은 부리부리하게 뜬 눈에 오른손엔 검을, 왼손엔 월도를 비켜들고 있어 위압감을 준다. 그 옆의 다문천왕도 눈을 부릅떴지만 옆의 광목천왕과는 다르게 입을 벌리며 웃고 있으며 오른손에 깃발을 들었다. 왼손에는 아무것도 들고있지는 않지만, 본래는 탑이 하나 들려져 있었으리라. 북방 다문천왕의 가장 큰 특징이 손에 들고 있는 탑이며, 이를 보고 방위를 구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국천왕은 아랫니를 드러내어 분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화가 차올라서 내는 분노라기보다도 일종의 협박 같은 느낌을 준다. 사찰에 들어왔기 때문에 가벼운 행동을 하지 말고 부처님 앞에서 겸허하게 행동하라는 무언의 지시로 보인다. 이 사천왕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재미있는 모습을 한 분은 바로 남방 증장천왕. 웃고 있는 모습을 하며 비파를 들고 있는데 이빨이 아랫니의 앞니밖에 보이질 않는다. 그렇기에 존귀한 위엄보다는 약간 바보스러움마저 보여 마치 '헤헤'거리고 있는 듯하다. 이 미소에는 아마 객손들에게 인상부터 쓰려고 하기보다도 중생들에게 따뜻함을 보여주어 부처님의 자비를 표현하려던 깊은 뜻이 담긴 게 아닐까싶다.

 

이 남방 증장천왕의 발아래에는 마귀가 왼발을 떠받치고 있다. 사천왕의 도상은 마귀를 발로 짓밟고 있는 모습이 많기에 이런 모습은 약간 특이해 보인다. 게다가 마귀가 쓰고 있는 노란 두건은 마치 노란색 머리띠 같이 보여 마치 어린아이 같다.

 

이들은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 오백년간 이 보림사를 지키고 있다. 비록 한국전쟁 당시에는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자신들만 살아남았지만, 오히려 이들의 존재가 남아있기에 폐사되지 않고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2009년 4월 12일 장흥 보림사를 보고와서 쓴 글입니다. 보림사의 연혁과 일주문, 그리고 사천왕상에 대해 자세히 다루어 보았습니다.


태그:#보림사, #장흥, #일주문, #사천왕상, #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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