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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복날의 손수레 16

 

고개를 넘어간 두 사람은, 잠시 후 김밥전문점에 도착했다. '김밥이 좋아요'라고 간판되어 있는데, 그 상호 옆에는 김밥이 춤을 추는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다.

 

"어머, 기발하네요!"

"재미있지? 저런 재미난 발상이 손님들의 눈길을 끌 수 있겠지. 서점을 차릴 때 저런 재미난 간판을 구상해 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이 집에 한 가지 아쉬운 건 김밥집 이름을 '김밥이 춤을 추네'로 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거지."

"정말 그렇네요!"

 

두 사람은 김밥전문점 '김밥이 좋아요'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웬 어여쁜 아가씨랑 다 오시네요?"

김밥을 말던 아줌마가 웃으며 물었다.

 

"나의 제자올습니다. 초등학생 때 가르쳤는데 벌써 대학생이 되었네요."

"기특하시겠어요. 작가 아저씨 제자라니까 뭔가 다른 느낌이 드네요."

"내 제자라서가 아니라, 워낙 생각이 깊은 학생이에요."

"그렇게 생겼어요. 뭐 드릴까요?"

 

아줌마가 물이 담긴 컵을 가져다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물은 '셀프서비스'라고 씌어 있는데도 물을 챙겨주는 친절함이 달랐다.

 

"뚝배기불고기 둘 주세요."

아줌마가 밝게 웃으며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예에. 뚝불 둘!"

 

효진이가 주위를 돌아보더니 물었다.

 

"손님이 많네요."

"여기선 식후에 동전 안 넣고 커피를 그냥 뽑아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지."

"커피 제공하는 김밥집은 많지 않은데요."

"이 자리가 몇 년 전엔 빵집이었단다. 그 집엔 손님이 많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웬일인지 김밥전문점이 들어서니까 잘 된단다. 이 집 지점도 있을 정도니까. 그 집에도 간판에 김밥이 춤을 추는 그림이 들어가 있지."

 

"후후. 너무 재밌어요, 그 그림, 김밥이 춤 추는 거."

"그것도 경영술일 거다 아마. 마케팅 전략의 하나겠지."

"정말 그렇겠어요."

 

"내가 음식점 창업에 대해서 좀 연구했었지."

"예? 정말요?"

"시사주간신문에 일본 창업 아이디어를 번역해서 소개하는 기사를 연재했었어."

"예. 선생님은 일본서적도 많이 번역해서 내셨잖아요."

"그런 건 친일(親日) 아니지?"

"그럼요."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미운 나라라도 그들이 잘하는 건 보고 배우고 아닌 건 받아들이지 말아야지. 그런데 좋은 걸 받아들이는 건 많지 않고, 심지어 TV 프로그램에서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만 열심히 벤치마킹하는 추세지. 내가 일본 창업 아이디어를 번역해서 소개한 것은 그들의 상술(商術)을 배우자는 뜻이었어. 연재가 끝난 뒤에 그 기사를 묶어서 책으로 내게 됐고, 그게 서평에 자주 나오자 강남의 유명한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특강 의뢰가 들어왔어. 그래서 창업 준비하는 아줌마들한테 강의를 했지. 그런데 문화센터 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전체 강의실 광경이 CC-TV로 찍히고 있는 거야. 어이가 없었지. 강의실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기니? 강사 입장에서도 기분 나쁜 노릇이지만, 수강하는 분들이 알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

 

"예. 그렇네요."

"그래서 화를 내고 그날로 강의를 그만뒀어."

"예."

"그런데 김밥전문점에서 파는 라면 말야. 보통라면 말고 만두라면, 떡라면, 해장라면, 이렇게 세 가지가 대부분 있잖아."

"예."

 

"라면전문점에 가면 콩나물라면 같은 것도 있지. 그런데 마트에 가서 라면을 사더라도 요즘에는 참 여러 가지가 있잖아? 내가 라면전문점을 차린다면 말이야, 이런 메뉴를 만들어 볼 것 같아. 다슬기라면, 우렁이라면, 골뱅이라면, 굴라면, 오징어라면, 낙지라면, 주꾸미라면, 문어라면, 새우라면, 참치라면, 바지락라면…"

"우와! 모두 먹고 싶네요. 전에 서울 명신여대 앞에서 오징어라면을 먹어본 적은 있어요. 진짜 맛있던데요."

 

"명신여대 앞에도 갔었어?"

"예. 여고 때요. 친한 친구가 서울로 전학 가서 그 부근에서 학교를 다녔거든요."

"거기 오징어라면으로 유명한 집 있지. 그리고 라면에다 김가루 넣어주는 것도 방법이야. 아니면 김 몇 장을 서비스로 주거나. 젓가락질 잘하는 사람은 김으로 라면을 싸서 먹어도 맛이 괜찮을 거다. 후추가루 좀 넣어 먹어도 별미고."

"후후, 선생님은 천상의 맛객이신가봐요."

"하하하." 

 

선호는 효진의 말솜씨에 놀라며 소탈하게 웃었다.

 

주방 쪽 벽의 위쪽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는 강철규, 이응만 등이 출연하는 야외 오락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이것이 재밌다면 재미있는 프로그램이지만, 풀장에서 벌어지는 내용은 하필 선호를 역겹게 만들고 있었다. 수영복 차림의 남자 연예인들 여러 명 속에 나이 어린 여가수 선우사랑과, 얼마 전에 맨몸 사진으로 돈을 번 수영 국가대표 출신 여성 연예인 채진이 끼어 있으니, 수중 촬영 화면이 나오더라도 보기가 편치 않은 상황인데, 한 남자 출연자가 수중에서 수영복 차림의 여성 연예인 선우사랑을 양손으로 잡아 번쩍 들어올렸던 것이다. 수영복 차림의 여자 어린이 출연자들도 여럿이 함께 구경하고 있었다. 보기가 민망했다.

 

아무리 길거리를 걸어가며 20대 여자가 담배를 피우거나, 길거리 벤치나 시내버스 좌석에 남녀가 앉아서 입을 맞추는 사람이 생긴 세상이라지만 해도 너무했다 싶었다. TV 드라마도 아니지 않은가. 경우에 따라서는 성적(性的) 수치심도 유발시킬 수 있는 장면이었다.

 

자신이 뭐, 아주 진보적인 사람인 것처럼 "그 정도야 뭐 어때." 하는 관대한 해석을 내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한(大韓)의 정신문화 발전에 대단히 무관심한 사람이거나 오히려 관음증을 얼마쯤 지니고 있는 사람일 거라고 선호는 생각했다. 더불어 저 프로그램은 성적 매력을 주무기로 하는 20대 여자 연예인들을 상품화하고 있다고 보아도 지나친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쯧쯧! 상스러운 사람들 같으니라구."

 

선호가 혀를 차고 말하자 효진이 "까르르" 하듯이 웃었다. 그때 마침 김밥전문점 아줌마가 뚝배기 불고기 두 그릇을 쟁반에 받쳐 들고 다가왔다.

 

"안 그래요, 아주머니?"

 

뚝배기 두 그릇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아줌마를 쳐다보며 선호가 물었다.

 

"예? 뭐가요?"

 

아줌마는 김밥을 말다가 뚝배기 불고기가 다 됐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가져왔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

 

"저기 좀 보세요."

"아, 텔레비전이요?"

 

[계속]

덧붙이는 글 | 2004년 말에 초고를 써놓고 PC 안에 묻어두었던 소설입니다만,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그 시절의 세상 이야기와 최근의 달라진 세상 모습을 고려하여 많은 부분 보충하고 개작해 가며 연재한 뒤에 출간하려고 합니다. 선호의 눈을 통해, 가난하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질 것입니다. 이 소설은 실화 자체가 아니라, 소중한 우리 삶의 여러 실화를 모델로 한 서사성 있는 창작입니다.


태그:#모래마을, #김밥전문점, #라면, #뚝배기 불고기,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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