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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은 영화 '워낭소리'로 도시도 농촌도 흙냄새 풋풋하다. 역시 예술은 위대하다. 정치인의 천마디 말보다 한편의 영화가 온 국민의 영혼을 사로 잡으니 말이다. 이 복잡한 도시에서 봄이 가장 빨리 느끼는 것은 여인의 옷차림이지만, 그래도 번잡한 도심을 일단 빠져나오면, 봄은 성큼 와 있다.
 

 
봄은 매혹이다. 가만히 집안에 있기 힘들다. 봄처녀가 손짓하는 봄의 심장 속으로 오늘은 무한궤도처럼 돌고 도는 것이다.  농부 아저씨는 털털거리는 기계음을 생산하며 논밭을 갈고 계신다. 점점 농촌도 기계화되어 가서 소와 함께 일하는 모습은 현실에서도 찾아보기 힘든다. 내 귀에는 딸랑딸랑 워낭소리가 들린다.
 

 
봄길은 이정표를 보지 않는다. 길을 따라 걷다보니 길은 봄길 따라 이어진다. 하얀 목련들이 하얀 새처럼 날아와 지줄거리고 있다. 나는 농가의 낮은 담장을 기웃거린다. 아무도 없는 텅빈 농가의 빨랫줄에 봄새들이 날아와 지줄거리고, 낯선 나그네의 침입에 겁을 먹는 강아지가 멍멍 짖는다. 나는 잠시 강아지와 멍멍 같이 놀다가 주인 없는 농가 앞을 그냥 지난다. 물 한그릇 얻어 마시고 싶은 목마름을 지그시 억누르고.
 

 
유년 시절 워낭 소리 앞세워 소꼴을 먹이러 다녔던 그 청라 언덕 같은 고향의 봄이 나를 부른다. 생각하면 영화 '워낭소리' 속의 현실은 우리의 거울이다. 우리 삼형제도 아무도 영농후계자가 되어 고향에 눌러 살지 못했다. 고향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향을 버린 것이다. 국민 모두가 '워낭 소리'에 환호하지만, 워낭 소리 들리는 고향은 이제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딸랑 딸랑 워낭 소리가 나를 그리운 고향의 심장 속으로 봄향기가 되어 나를 부른다. 먼 고향의 동산이 그리운 워낭 소리를 부른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기장군 앵림산 중턱까지 올라온 산길에는 선술집 색시의 저고리 색깔 같은 진홍빛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마치 립스틱을 꺼내 봄의 입술을 칠할 태세로…자연은 위대한 책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식물도감 속에서만 보았던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눈길을 잡아 끈다. 사방 둘러보니 파스텔조의 은은한 연푸른 빛깔의 하늘 아래 봄은 수채화보다 아름답다. 
 

 
휘적휘적 걷는 길은 논두렁 밭두렁에 주저 앉아 파릇파릇한 쑥과 씀바퀴, 달래의 향기에 취해 양지 바른 봄산을 바라본다. 봄 ! 봄은 대지의 어머니처럼 늘 따뜻하고 만물을 소생케 하는 신비로운 계절이다. 봄나물, 봄학기, 봄비, 봄노래, 봄잔치, 봄처녀…봄은 어디에서나 아름답다. 도시의 하천가에 핀 개나리도 아름답다. 하물며 논두렁가에 핀 홍매화 백매화는 더욱 아름답다. 봄은 일년 중에 가장 즐거운 왕이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듯이…
 

 
고향을 못 잊기는 옛 매화 탓이로다
담 머리 밝을 제 그 꽃이 피었고야
밤마다 꿈 속에 들어 잊을 길이 없어라
'매화'-'이옥봉'
 

 
딸랑 딸랑 워낭 소리 닮은 댕댕 울리는 산사의 봄 풍경 소리에 눈처럼 하얀 백매화의 자태에 잠시 현기증이 난다. 우리 선조들은 꽃을 볼 때 생김새가 아름답거나 향기가 좋거나 하는 물리적 잣대를 대지 않고, 꽃이 지닌 정신적 기준으로 꽃의 화품을 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세종 때 학자 강희안은 우리 조선인이 좋아하는 화품을 9등까지 나눠 놓고 있다. 그 1등에 해당 하는 꽃이 겨울의 수난을 이긴 매화와 찬 서리를 이기고 피는 국화. 고난과 역경을 이긴 눈보라 속에서 핀 매화의 향기는 천금 보다 귀한 자연. 황량한 겨울 들녁에 노란등불 같은 산수유에게 화품을 매긴다면, 이 역시 1등 대열에 올려주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봄은 가만히 서 있는 산사 앞의 늙은 적송에게도 춘정이 넘치게 만든다. 서로를 자빠질듯 한 태세. 농가가 내려다 보이는 동산의 파스텔조로 번지는 이 분홍빛 봄이, 내주에는 활짝 벚꽃을 만개 할 듯 한데, 아담한 농가의 담장 너머 핀 목련은 이미 만개해 있다.
 
올봄은 내 귀를 떠나지 않는 워낭소리와 함께 좋은 봄소식이 찾아올 듯 설레인다. 봄의 따뜻한 심장 속에서 나는 잠시 행복해 진다. 자연의 은혜에 새삼 합장케 하는 이 봄, 이 아름다운 봄이 내가 뜻 없이 흘려 보낸 봄보다 작게 남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 열심히 이 봄을 사랑해야 겠다. 나의 가족이 나에게는 대자연의 일부이듯이….  
 


태그:#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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