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십천을 따라 상류로 상류로

준경묘 가는 길에 만난 머루 포도
 준경묘 가는 길에 만난 머루 포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오십천은 삼척시 도계읍 구사리 백병산(1259m) 아래에서 발원, 심포리 미인폭포를 지나 북류하면서 본격적인 하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오십천은 도계읍을 거쳐 신기면과 미로면을 지난다. 오십천은 삼척 시내로 들어가면서 동류해 죽서루 앞을 지나 동해로 흘러들어간다. 이 오십천 협곡을 따라 영동선이 놓여 있고, 제천에서 삼척까지 이어지는 38번 국도가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38번 국도를 따라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준경묘를 찾아 나선다.
  
이번 답사는 이틀 내내 비가 우리를 떠나지 않아 우중 답사가 되고 말았다. 오른쪽으로 멀리 백두대간 산줄기가 두타산(1355m)을 지날 텐데 비구름에 가려 짐작도 할 수 없다. 미로면에서 424번 지방도로가 갈라지는데 이것은 댓재(810m)를 넘어 하장면으로 이어진다. 차는 천기리에 이르러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 길이 활기리로 이어지는 마을 도로이다.

준경묘 가는 길
 준경묘 가는 길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한 2㎞쯤 갔을까? 차가 선다. 이곳에서부터는 차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어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차에서 내려 왼쪽으로 난 길을 보니 산 쪽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준경묘까지가 다시 1.8㎞이다. 산길이니 걸어서 30분은 걸리겠다. 우리를 안내하는 해설사가 오늘 같이 비 오는 날은 땀이 안 나 좋을 수도 있다고 힘을 실어준다. 한 10여분 가파른 길을 오른다. 길 좌우로는 여름의 녹음이 무성하고 그 사이로 금강송이라 불리는 소나무들이 보인다.

고개 넘어 나타난 금강송들의 우아한 자태

길을 따라 해발 250m쯤 되는 고갯마루에 이르자 오른쪽으로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길 왼쪽으로는 준경묘에서 내려오는 물이 흘러가는 작은 계곡이 보인다. 옛날에는 이 계곡을 따라 출입했을 것 같다. 이 길 좌우에는 정말 멋진 금강송들이 쭉쭉 뻗어 있다. 이 소나무들이 과거 경복궁을 재건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난번 광화문을 복원한다고 할 때도 기둥으로 이 소나무를 쓰려 했지만 전주이씨 문중에서 반대해 무산된 일이 있다.

정이품송과 결혼한 소나무
 정이품송과 결혼한 소나무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길을 가다 보니 오른쪽으로 계단이 있고 안내판이 있다. 제목이 정이품송과 결혼한 소나무다. 내용을 읽어 보니 인간들이 만들어낸 '해프닝'이다. 산림청 임업연구원이 소나무 형질에 대한 조사를 해서 이 소나무가 가장 아름답고 우수한 소나무로 선택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소나무가 '미스 코리아 소나무'가 된 것이다. 당시 나이가 95살이고 키가 32m이며 가슴높이 둘레가 2.1m였다고 한다.

이 소나무의 우수한 형질을 보존하고자 산림청에서는 보은군에 있는 천연기념물 103호 정이품송과 결혼을 시키게 된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인간들이 나서서 초등학교 6학년짜리 신랑과 신부를 간택하고는 그 아버지 역을 보은과 삼척의 시장이 대행하고 산림청장이 주례를 맡는 한바탕 쇼를 연출한 것이다. 2001년 5월 8일의 일이다. 역사는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행정 관료들의 즉흥적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진다.

준경묘 전경
 준경묘 전경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이곳에서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니 널찍한 공간이 나오고 그 앞으로 홍살문이 보인다. 홍살문 뒤로는 일자형의 재실이 보이고 그 오른쪽에 비각이 있다. 그리고 이 준경묘 영역을 둘러싸고 있는 경사면 위로는 미끈미끈한 금강송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비에 젖어 줄기의 붉은색이 조금은 검은색으로 변해있지만 그래도 황장목, 적송으로 표현되는 그 본연의 자태는 감출 수가 없다. 모두들 오늘의 날씨를 아쉬워한다. 초록의 잔디, 붉은빛을 띤 금강송의 자태, 파란 하늘이 조화를 이룬 준경묘를 보지 못하는 것을.     

문화재청 직원도 쩔쩔매게 하는 준경묘 관리인

양무장군의 묘인 준경묘
 양무장군의 묘인 준경묘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사람에 따라 걷는 속도가 다르니 다리가 길고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내가 비교적 빨리 도착한 편이다. 먼저 오른쪽에 있는 비각을 살펴본다. 앞에는 대한준경묘(大韓濬慶墓)라고 쓰여 있다. 문이 걸려 있어 뒷면의 글씨를 자세히 볼 수가 없다. 비석은 그 내용을 알아야 하는 건데 아쉽기 그지없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인 김정구 선생이 준경묘로 올라간다. 이것저것 관찰하는데 관리인이 올라가지 말도록 제지를 한다. 올라가지 말라는데 고집 피워 올라갈 수도 없고 또 한 번 답답한 생각이 든다. 묘 주변을 빙빙 돌며 멀리서 구경만 한다.

이제는 사람들이 모두 도착해 해설사로부터 준경묘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는다. 그런데 우리를 인솔하는 박영록 팀장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다시 한 번 묘에 올라가지 말 것을 부탁한다. 문화재청이 주관하는 현장 교육에 묘를 둘러볼 수 없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우리 회원 중 홍인화 선생이 묘지기에게 잘 얘기를 해 묘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한다.

준경묘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
 준경묘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묘로 올라간다. 이곳 준경묘는 풍수적으로 대단한 명당이어서 묘 자체보다 묘의 뒤쪽으로 올라가 좌향을 살펴보는 것이 답사의 중요한 포인트다. 묘 뒤에서 좌청룡 우백호 그리고 안산과 조산 등을 따져보아야 하는데 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그냥 감으로 파악해 볼 수밖에.

묘역의 기운이 흘러나가지 않고 꼭 싸여 있다는 생각은 드는데 전체적으로 뭔가 좀 답답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풍수전문가들은 주변 산들이 성곽처럼 나성을 이루고 높은 산으로 이어지는 혈이 천궁과 같으며 혈 앞으로 천지수가 흘러 천교혈(天巧穴)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천하 명당이라는 것이다.

준경묘를 감싸고 있는 금강송
 준경묘를 감싸고 있는 금강송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묘를 내려와 우리 일행은 이곳의 대표적인 자연유산인 금강송을 보기 위해 산쪽으로 들어간다. 전체적으로 소나무들이 잘 자라 쭉쭉 하늘로 뻗어 있지만 일부 소나무 아랫부분에 상처가 좀 나 있다. 일제강점기 때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칼집을 낸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너무 잘 생기다 보니 이런 피해도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좀 더 자세히 소나무들을 관찰하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해 적당한 선에서 우리는 산을 내려온다.

대한 준경묘 비석에 적힌 이야기

어제준경묘비: 대한준경묘
 어제준경묘비: 대한준경묘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산을 내려와 보니 다행히 비각의 문이 열려있다. 비석에 적힌 비문을 읽어보면 준경묘의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아 반갑기 그지없다. 전면에는 대한준경묘 다섯 자만 적혀 있지만 뒷면에는 어제준경묘비(御製濬慶墓碑)라는 이름으로 준경묘의 역사를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1899년(광무 3) 11월 자헌대부 이근명이 썼다. 그 내용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삼척군의 서쪽 40리에 노동(蘆洞)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두타산으로부터 뻗어내린 형국이 웅혼하고 위엄이 있다. 이곳에 두 기의 묘가 있는데 하나는 목조의 아버지인 양무장군의 묘이고 다른 하나는 그 비인 이씨의 묘이다. 그런 내용을 정승을 지낸 허목이 삼척부사로 있을 때 <척주지>에 언급한 바 있다. 선조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정철은 산소의 지도까지 그려 올려 수축하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명신들로 그 말하는 바가 믿을 만하다.

비석 뒤쪽의 비문
 비석 뒤쪽의 비문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조선이 개국하였을 때는 삼척군을 삼척부로 승격시키고 금관(金冠)과 옥대(玉帶)를 삼척 원에게 하사하고 도백(道伯)에게 명하여 해마다 두 묘소를 보살피게 했으나 점점 폐허화되었다. 그 뒤 묘를 다시 수축하고 대대로 산소의 수호와 벌목의 금지 등 보호에 애써 왔다. 그동안 열성조의 제사는 지내왔는데 더 먼 선조는 예를 차리지 못했다. 이제 그 내용을 비석에 적으니…"

대강의 내용은 이러했다. 그렇지만 단체로 답사를 하고 시간에 쫓기고 비도 오고 하여 제대로 기록을 할 수가 없었다. 언제 한번 시간을 가지고 그 내용을 완벽하게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비문과 작별을 한다. 이번 여행이 강의식 공부와 현장 답사를 병행하는 좋은 방법을 택했지만 현장에서의 전문성이 좀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었다. 비문을 시원시원하게 읽어내는 해설사가 있으면 좋으련만.

준경묘에 묻힌 사람이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맞아?

준경묘 원경
 준경묘 원경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준경묘에 묻힌 사람이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양무(陽武)라고 한다. 양무장군은 전주이씨 17세로 고려시대 내시집주를 지낸 린(璘)과 남평문씨 사이에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 린이 길성(현재 길주)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이후 경산(현재 경성 또는 경흥)을 거쳐 안남 땅으로 오게 되었다. 양무는 안남에서 자라 장군이 되었으며 상장군 이강제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넷을 두었다고 한다. 그들이 안사(安社), 영필, 영밀, 영습이다.

그 중 첫째인 안사가 조선 개국 후 목조로 추존되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이다. 안사에 대한 이야기는 <완산실록>에 나오는데, 그는 성품이 온화하였다고 한다. 대대로 무인 기질을 물려받아 호방했다고도 한다. 그러다 보니 전주지방을 다스리는 지주사(知州事: 지방관)와 불화를 겪게 되었다. 불화의 발단은 관기를 두고 벌인 싸움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흥왕정기설(興王精氣說) 때문이었다고 한다.

안사는 180여 가구를 이끌고 강원도 삼척 땅으로 이주를 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런데 몇 년 후 전주의 지주사가 관동 지방의 안렴사가 되어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안사는 다시 170가구를 이끌고 함경도 덕원의 남면 용주리로 다시 피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박해를 걱정한 안사는 함경도 경흥 땅에서 30리 되는 두만강 유역의 알동(斡東)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5000호를 다스리는 원나라의 다루하치(達魯花赤)가 된다.

이상이 소위 정사인 <완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양무장군이 삼척땅 미로면 활기리 산골에 묻혔을까? 양무장군의 아들인 안사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양무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적어 확인하기 어렵다. 더욱이 그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준경묘와 관련된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준경묘가 양무장군의 묘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준경묘가 양무장군의 묘가 확실하다면 조선을 개국하고 나서 바로 묘역에 대한 정화사업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 초에는 논의도 되지 않다, 중기에 논의되기 시작해서 500년이 지난 1899년에야 양무장군의 묘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경묘는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고종황제에 의해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양무장군의 묘로 확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태그:#준경묘, #오십천, #미로면, #금강송, #양무장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