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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는 꽤 상큼한 모습이었다. 수려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준수한 용모에 선하디 선한 말투, 상대방을 배려하는 행동까지, 그 깐깐한 배추도사마저도 이 친구에게 반해 흔쾌히 집을 내주겠노라 했으니 말이다. 그는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학생이라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그를 대~충 '미쿡'이라고 부르기도 하자(점점 줏대 없어지는 작명세계).

미쿡이와 배추도사,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경태의 말 바꾸기로 이사준비에 차질이 생긴 꼬냥이, 한번 겪고 나니 이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걸 급격히 깨닫게 된다. 아, 왜 인간은 피를 봐야 무서움을 알게 될까. 결국, 수많은 대기자 중에 순서는 무시하고 가장 조리 있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한 몇몇을 추리기로 결정, 그 중 첫 번째가 미쿡이었다.

아침 10시, 평소 같으면 양치하고 세수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지만 이른 방문을 약속한 미쿡이를 맞이하고자 두 눈 날로 뜨고 기다렸다. 구석구석 청소도 하고 최대한 깔끔한 집의 모습을 보여 어서 빨리 이 옥탑을 떠넘기고 싶었다고나 할까.

미쿡이는 10시 정각, 칼 같은 시간에 도착하여 전화를 걸어왔다.

"안녕하세욜, 집보귀로 한 미쿡이에효. 하아, 목동 너뭐 멀어열~"

아 놔- 이 녀석하고 말이나 통할는지 모르겠네. 추운 데서 자다 풍 맞은 말투를 들으니 영어 울렁증의 꼬냥이, 녀석이 혹시 영어를 쏟아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가슴을 졸이며 쪼르륵 내려가 입구에서 기다리니 말쑥한 정장차림의 꽃미남까지는 아니더라도 '꼰미남' 정도 되는 미쿡이가 사뱡그르르~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황야의 노숙자님? 오우, 반가워욜, 저 미쿡이라코 해효."

황야의 노숙자는 옥탑방을 내놓은 부동산 카페에서 사용하는 꼬냥이의 닉네임이다. 후후….

"이사 준비로 집이 좀 지저분한 거 감안하고 보세요, 다 치우면 깨끗해요." (밤새 청소했잖아, 그런 식으로 겸손하지 말란 말이다!)

"와우~ 나 혼자 한쿡와설 집 쿠하기 너머너머 어려웠어욜, 옥탑팡, 매력 있어욜. 나 계약할래효. 나 그 뭐? 가켸? 가켸약금 갖고 왔어욜."

오오… 뭔가 긴 대화를 나누고 싶진 않지만 이 든든함, 뿌듯함, 마구 친절하게 대해주고 싶은 봉사정신이 불끈 치솟았다. 당장 내려간 배추도사의 집, 역시나 근엄한 자세로 각 잡고 앉은 배추도사와 사모 할매.

"그… 그래, 미국에서 살다 왔다고?"
"집은 충남 서산, 그런데 공부하러 촘 오래 있었어욜, 이번에 서울, 아 어디? 여을도, 아니 여의도에 회사 음… 예, 입사 했어욜. 그뤠서 가까운 곳으로 집 구하고 있어효."

우리 배추도사, 2년 동안 그렇게 두 눈이 반짝이는 건 처음 봤다. 이 양반이 외국문물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인지 눈앞에 앉아 옹알거리는 미쿡이에게 급호감을 느끼는듯했다.

"아, 우리 아들이 작년에 미국으로 여행 보내줬어, 아주 사람이 많고 건물도 크고 말이여."

화기애애한 분위기, 나도 들어올 때 냅다 어디 코스타리카라도 살다 왔다고 할걸 그랬나.

"그려, 그럼 우리 미쿡 총각이 12일 날 이사 들어오는 걸로 합의된 거제?"
"전 언제든지 카능해요, 우리 노숙좌님 시간에 맞춰줄래요."
"제가 11일 날 나가고 12일 날 미쿡씨가 들어오는 걸로 얘기 됐어요. 그런데 보증금을 꼭 12일에 주셔야 하나요? 다시 오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돈 없다고 했잖여, 12일에 받아가. 이사 가는 주인집에 말하면 하루 정도는 봐줄겨."

자기 일이면 얄짤 없었을 거면서. 췟.

"와우, 우리 노숙좌님 곤란해요? 그럼 제가 12일 전에 나머지 보증금 줄케요, 어렵지 않아요."

오오오! 세상에 이렇게 착한 미쿡이가!! 이사 날짜도 맞춰주고 나를 배려해 보증금까지 미리 보내주겠다는 미쿡이의 배려에 제대로 반해버린 꼬냥이. 그제야 바짝 곤두섰던 신경이 스믈스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사까지는 약 보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고 그 기간 동안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았지만 일단 큰 산하나를 넘었다 생각하니 몸도 마음도 가볍게 느껴지면서 꽤 여유롭고 순탄한 며칠을 보낼 수 있었다.

미안, 누나 이제 똘똘하게 살께.
▲ 복댕이의 걱정 미안, 누나 이제 똘똘하게 살께.
ⓒ 박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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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남 미쿡이의 배신!

연휴기간이 끝나가는 2월 9일 토요일, 이사 가기 이틀 전. 미쿡이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예, 이사 준비 잘 되세요? 짐이 별로 없으시다고 했죠?"
"아… 음… 노숙좌님, 음… 제가 하는 말 오해 말코 들으세요."
"예?"

음… 보증금 준비가 안 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마음 써준 미쿡이에게 고마워 별말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음… 나 다시 미쿡가야돼요."
"예????"
"캅자기 연락 받았어욜. 다음 주에 미쿡 들어가요. 나 이사 못가요."
"…!!!!!!!!!"

아… 정수리 부근에서 감전된 것처럼 무언가 찌릿- 하고 터졌다. 머리가 핑 돌면서 온몸의 기운이 손끝으로 빠져나가는 기분.

"미안해욜, 나도 이럴 줄 몰랐어요. 그래서 가켸약금은 안 돌려 받을케요."

그건 당연한 거거든, 자식아.

무슨 내 인생이 시트콤도 아니고 이런 드라마에서도 안 우려먹을 씨알도 안 먹힐 일이 난데없이 들이닥치느냐는 말이지. 뭐라 말이라도 해보려 했지만 꼬냥이 성격이 또 안 되는 일에는 토를 안 단다는 거. 어차피 못 오게 됐다는 사람에게 중얼거려본들 무슨 소용 있으리. 대답도 하는 둥 마는 둥 전화를 끊고 침대에 쓰러졌다.

오늘이 이사 이틀 전 구정 연휴기간에 토요일. 내일은 일요일, 난 월요일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사를 가야 하는데 과연 오늘과 내일 사이에 집을 보고 바로 계약할 사람이 나타날 확률은?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이건 뭐 죽으라는 거잖아!

모든 걸 포기한채 증발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또 꼬냥이가 위기에 강한 인간형 아닌가. 타지 생활 10년에 이보다 더 어이없는 일도 겪었거늘 이 정도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이럴 때만 불끈 솟아오르는 오기!

침착하고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해야 했다. 가장 먼저 배추도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미우나 고우나 집주인이고 아무리 얄짤 없어도 어른은 어른, 이런 상황에서 뭔가 해결책을 제시해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거 참, 사람이 뭐 그려. 연휴동안 아무 말 없더니 이제 와서 그게 뭔 난리여. 거기 집보러 오는 사람들한테 보증금 얼마 안 하니께, 계약할 때 완불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찾아봐. 줄 선 사람 많다니 아마 한둘은 가능할거여. 그럼 색시도 바로 받아갈 수 있잖여. 젊은 사람들 많을겨, 알아봐."

음! 뭔가 크게 해결해준 건 아니지만 적어도 꼬냥이의 걱정을 해주는 '척'하는 배추도사에게 0.7%의 고마움이 느껴졌다.

일단 블랙카피 한잔 찐하게 마시며 수습할 방법을 생각하기로 했다. 커피를 들고 밖으로 나와 찬 바람을 쐬며 바라본 내 몫의 하늘. 꼬냥이 어깨 위에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곤두박질 쳐 내려앉았으니 세상사 쉬운 일 없다지만 꼬이려니 이렇게도 꼬이는구나 싶더군. 그래, 언제 쉬운 일이 있었던가.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나면 그만큼 나도 자라겠지.

십이지장 끝부터 심호흡 한번 크게 올려주고 오기와 기운을 급상승시킨 꼬냥이!!! 4시간 동안의 작업 끝에 결국 그날 밤 9시, 까까머리 총각과 계약에 성공했다. 물론 보증금 완불로. 이젠 빼도 박도 못하는 거야.

간다! 간다! 젠장! 이제 정말 갈 거라고!

그리고 이사 당일.

예상은 했지만 배추도사라는 큰 산은 꼬냥이를 호락호락 놔주지 않았다.


태그:#옥탑, #이사, #세렝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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