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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 말을 격언으로 삼고 그에 맞춰서 행동해 왔다. 그렇기에 단종을 모시던 사육신은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삼국지>의 저수도 원소에 대한 충정을 굽히지 않았기에 조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됐다.

우리 역사에서도 그러한 충신을 여럿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충신을 뽑으라고 한다면 5천의 결사대로 5만의 신라군을 막고 장렬히 전사한 계백이 있다. 멸망하는 백제의 운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족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전쟁터로 향해 적과 당당히 마주하고 싸웠던 그의 넋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회자되고 있다.

역사는 계백을 기억한다

논산에 있으며, 그 옆에는 백제군사박물관이 있다(기념물 제 74호).
▲ 계백장군 묘 논산에 있으며, 그 옆에는 백제군사박물관이 있다(기념물 제 74호).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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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階伯)은 황산벌전투에 즈음하여 이미 백제의 국운을 알고 있었다. 백제의 불안한 정치 상황과 백제가 막기 버거운 대군을 이끌고 신라와 당나라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계백은 충성을 다하기 위해 전장을 나섰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여건에서의 최후의 전투. 이를 짐작하고 있었던 계백은 나서기 전 가족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한 나라의 인력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 것이 낫겠다."

<삼국사기>는 그러한 계백의 비장한 모습을 따로 열전을 만들어서 수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백제인에 대한 기록과 열전이 신라에 비해 극소수지만, 계백은 그 중요성이 남달랐기에 이렇게 자세히 다뤄진 것이다.

부여 부소산성에 있으며, 여기에는 계백과 성충, 그리고 흥수가 배향되어 있다(문화재자료 제 115호).
▲ 삼충사 부여 부소산성에 있으며, 여기에는 계백과 성충, 그리고 흥수가 배향되어 있다(문화재자료 제 115호).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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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에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나갔던 계백은 세 개의 군사 진영을 만든 후 그들에게 장중하게 말했다.

"옛날 월왕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로 오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니,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하여 싸우고, 반드시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계백의 단호한 어조. 그리고 죽음을 불사한 충성에 대한 결심은 백제인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고, 결국 당시 신라 최고의 명장이었던 김유신마저도 황산벌에서 큰 곤욕을 치렀다. 이 황산벌전투에서 반굴과 관창의 옥쇄(玉碎)로 말미암아 끝내는 신라가 승리할 수 있었지만 1만이라는 큰 사상자를 남겼다. 그리고 계백은 신라인의 후손이었던 김부식에 의해 칭송받아 <삼국사기>의 열전에 오르게 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충신의 상징으로서 남아 있다.

역사는 충상을 기억하지 못한다

부여군청 앞의 로타리에 위치한다.
▲ 계백장군 동상 부여군청 앞의 로타리에 위치한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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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중에서 계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충상(忠常)'은 전공자나 백제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잘 알지 못한다. 이 충상 또한 백제 말기의 장군으로 계백과 함께 황산벌전투에 출전했다.

그의 벼슬은 좌평이었다. 백제의 벼슬 중 가장 높은 게 좌평이며, 그 아래가 달솔이다. 당시 황산벌전투에서는 좌평인 충상, 그리고 달솔인 계백과 상영이 출전했다. 하지만 우리는 계백을 기억하나 충상과 상영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충상과 상영은 황산벌전투에서 백제를 배반했기 때문이다. 황산벌전투에서 5천의 결사대가 싸우고 이들이 모두 전사했다고 알려졌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충상과 상영을 비롯한 20여명의 백제 장수들은 신라에게 투항했고, 이들은 신라로부터 벼슬을 받고 이후에도 신라에서 활동했다.

상영은 일찍이 나당연합군이 백제로 쳐들어 올 때 조정의 국론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좌평 의직은 당나라군을 먼저 급습하면 신라가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고 했지만, 달솔 상영은 신라군을 먼저 공격하면 당나라군이 물러날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이후 흥수의 제안인 탄현과 백강을 지켜야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신라는 이런 충상과 상영에게 일길찬의 벼슬을 주었다. 백제는 16관등으로서 그 중에서 1번째가 좌평, 2번째가 달솔이었는데, 일길찬은 신라 17관등 중에서 7번째에 해당한다. 사실 신라가 그들을 대우한 것은 백제에 비하면 형편없었던 것이다.

이후 문무왕 8년인 668년, <삼국사기>에는 충상에 대한 기사가 하나 보인다. 바로 백제부흥군과 충상과의 싸움을 기록한 것으로, 이때 충상의 벼슬은 6번째인 아찬으로 바뀌어져있다. 이후 충상은 상주총관에 임명되는데, 이는 황산벌전투에서 전사한 관창의 아버지와 같은 지위다. 충상은 이렇게 신라에 항복한 후 주로 백제부흥군과 싸우면서 신라에 충성했다.

하지만 이 외에 충상에 대한 기록을 찾기는 힘들다. 기록의 미비함도 있지만, 황산벌전투에서 그 이름을 단 한번 비치는 계백에 비해 오히려 신라에 대한 공헌이 높음에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것이다. 김부식은 신라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충상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계백은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자기 목숨을 바쳤고,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지불한 신라군조차도 그의 충정을 높이 기렸다. 반면 충상은 신라 6두품의 벼슬을 받는 데 그쳤으며, 이젠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역사가 기억하는 사람은 기억할 가치가 있는 사람, 혹은 기억할 수밖에 없는 사람, 기억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기억되는 사람이다. 계백은 기억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라에 막대한 손실을 입혀 당나라 쪽과 시비가 붙을 정도로 곤혹스러운 전투를 치르게 했기 때문에 기억될 수밖에 없기도 했다.

충신은 나라를 위해서는 두 임금을 섬기는 것도 불사한다?

최근 '충신불사이군'이라는 고사성어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참여정부 시절 국방부장관을 역임하였던 김장수 전 국방장관이다. 김장수 전 장관은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를 하면서 리를 굽히지 않고 똑바로 응시해 화제를 낳았다.

그리고 그의 주군이라고 할 수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식 후 귀향하는 것을 보며 눈물로 배웅했다는 일화, 국방장관을 연임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명박 대통령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였다는 일화도 '충신불사이군'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꼿꼿장수'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그런 그가 지난 16일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자신의 주군이 있었던 통합민주당이 아닌 한나라당으로의 입당. 여기에다 통합민주당이 비례대표를 권유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동안 그가 쌓아온 충신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의 이념과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기에 그런 선택이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왠지 모르게 씁쓸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는 더 이상 '충신불사이군'이라는 고사성어를 현실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인가? 사육신은 어린 단종을 위해 세조에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보였다. 그리고 거란족과 싸웠던 고려의 강조는 거란의 권유에 굴복하지 않고 목숨을 바치고, 반면 이현운은 거란에 항복했다. 역사는 이들에 대해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가?

'충신불사이군'이라는 고사성어는 옛말이 됐다. 이제는 충신불사이군을 '충신은 나라를 위해서는 두 임금을 섬기는 것도 불사한다'라는 뜻으로 써야할지도 모르겠다. 또 이런 행위를 '실용충성'의 이름으로 강요당하지 않을까?


태그:#계백, #백제, #황산벌전투, #충상, #김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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