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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사정공원에 있는 만해 시비. '꿈이라면'이라는시가 새겨져 있다.
 대전 사정공원에 있는 만해 시비. '꿈이라면'이라는시가 새겨져 있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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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까지 변절의 길을 가지 않은 만해 한용운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만해 한용운(1879~1944)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그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고 난 뒤 설악산 오세암으로 입산한다. 십 년 후엔 다시 인제 백담사로 가서 연곡 스님을 스승으로 득도한 후 만화 화상에게서 법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그는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복역 중엔 '조선독립이유서'를 써 우리나라 독립의 당위성과 자신의 행동 근거를 밝히기도 했다.

3·1운동과 관련해서는 그가 나서서 '공약 삼장'을 추가했다는 얘기가 있다.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공약 삼장'엔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라는 결연한 의지가 담긴 구절이 있어 좌고우면하기 좋아하던 최남선이 썼다고 보기엔 미심쩍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만해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을 써 한국 불교의 낡은 정신을 비판하고 자유·평등주의 사상에 입각한 불교개혁안을 제기했으며, 1926년엔 임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가 살았던 삶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의미있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가 스님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시인이기 때문인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의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울림이 큰 것은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가운데 유일하게 변절하지 않은 애국지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육두문자 뒤에 숨은 무욕의 삶

1919년 3·1운동 때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만해 스님의 옥바라지를 했던 사람은 춘성(春城) 스님(1891∼1977)이었다. 그는 만해가 두었던 유일한 상좌였다. 속명이 이창림. 춘성 스님은 1891년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에서 태어났다.

13세 되던 해, 인제 백담사로 출가하여 10년간 만해 스님을 모시면서 불교에 대한 사상적 토대를 다졌다. 스무 살이 되자, 금강산 유점사로 들어간 춘성 스님은 동선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은 후 안변 석왕사에서 대교과를 마친다.

이후 본격적인 경전 공부를 시작한 스님은 경전 중에서 최고로 일컬어지는 <화엄경>을 거꾸로 외울 만큼 뛰어난 실력을 길러 당대 최고의 화엄 법사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40세에 이르자, 더 큰 세계가 필요했던지 춘성 스님은 당대의 고승 덕숭산 수덕사 만공스님 휘하로 들어가 법사가 되어 전법 수행했다.

도봉산 망월사 주지, 강화 보문사 주지 등을 역임한 그는 80세 때까지 죽 도봉산 망월사 조실로 있다가 81세에 홀연히 만행을 떠나기도 한다. 중 나이로는 74세, 세수로는 87세 되던 해 화계사에서 입적했다. 아래와 같은 열반송을 남긴 채였다.

팔십칠년사(八十七年事) 여든 일곱 생을 살았던 일이
칠전팔도기(七轉八倒起)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일어나는 것과 같네
횡설여견설(橫說與堅說) 횡설수설했던 그 모든 것이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붉은 난로 속의 한 점 눈이네

춘성 스님은 살아서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써서 욕쟁이 스님으로도 통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옷 한 벌 바리때 하나만으로 살다간 무소유의 실천가였다. 참선하는 수좌가 두꺼운 옷을 입거나 사치품을 사용하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을 만큼 엄격했다. 평생 무소유 정신을 철저히 지키며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지켰다.

어쩌면 그가 욕을 자주 입에 올렸던 것은 자신에게 당당한 사람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적당한 거짓과 위선을 깨트리는데 욕보다 더 유용한 수단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애한 삶과 기행을 거듭하며 살아서인지 그에겐 어느 스님보다 일화가 수도 없이 많다. 특히 강화도 보문사로 찾아온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에게 "입 한 번 맞추자"고 했던 일은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때, 절을 지으려고 벌목을 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혔을 때의 이야기도 빼놓기 아까운 일화다. 잡혀온 스님에게 일경이 본적을 묻자 스님은 "나의 본적은 아버지 자지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주소는 어디냐?"라고 묻자 "나의 주소는 어머니 보지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일경은 춘성 스님을 정신이상자로 간주하고 그냥 돌려보냈다고 한다. 본디 대등하지 않으면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게 정신의 경지다. 일개 일본 순사 나부랭이가 어찌 춘성 스님 같은 고승의 정신세계를 저울질할 수 있겠는가.

그런가 하면 춘성 스님이 어딘가로 기차를 타고 갈 때 생긴 이야기도 있다. 기독교 전도사 한 사람이 사람들 앞을 지나면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소리쳤다. 이윽고 춘성 스님 앞에 오더니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춘성 스님은 대뜸 "뭐? 죽었다 살아났다고? 나는 여태 죽었다 살아난 건 내 자지밖에 못 봤어"라고 핀잔을 줬다. 주위 승객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렸을 것은 "보지 않아도 비디오"다.

지게와 작대기의 삶에 비유할 수 있는 두 분의 삶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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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부력 강한 고은 시인이 1986년부터 벌이고 있는 시의 대장정 <만인보> 25권에는 춘성 선사의 기행을 형상화한 '춘성'이란 시가 실려 있다.

이 시는 앞서 말한 두 가지 에피소드를 축으로 펼쳐지고 있다.

만해 용운께서는

산중 괴각(乖角)이시라
상좌도 딱 하나밖에 두지 않았다
상좌도
산중 괴각이시라
승어사(勝於師)
산중 괴각이시라

춘성 선사

만해 용운이 감옥에 갇혀 계실 때
만해의 독립이유서를
몰래 받아내어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에
보내었다

춘성 선사

그는 아예 상좌 하나도 두지 않았다
이불 없이 살았다
하기야
절 뒤안에 항아리 묻어
거기물 채워
물속에 들어가
머리 내놓고 졸음 쫓는
선정(禪定)이니
기어이 수마를 모조리 내쫓아버렸으니

경찰서에 불려가 신문 받을 때
본적 어디냐 하면
우리아버지 자지 끝이다
고향이 어디냐 하면
우리 어머니 보지 속이다

누군가가
부활을 말하자
뭐 부활
뭐 죽었다 살아?
나는 여태껏
죽었다 살아나는 건
내 자지밖에 보지 못했다
이놈

한밤중에 다 잠들었는데
그는 마당에 나와
돌고 돌며
행선삼매라

신새벽 잠깐만 눈붙이고
다시 새벽 선정에 새치롬히 들어간다 무릇 아지 못해라 - 고은 시 '춘성' 전문

"산중 괴각이시라/ 승어사(勝於師)/ 산중 괴각이시라"는 말은 춘성 스님이 만해 스님을 능가할 만큼 괴짜였다는 말이다. 나머지는 그냥 따라 읽으면 되는 아주 쉬운 시다.

이 시 외에도 고은 시인이 춘성 스님에 대해 쓴 시는 여러 편 있다. <만인보> 15권에 실린 '춘성 선사'나 <만인보> 24권에 실린 '두 상좌' 등등. 그것은 어쩌면 고은 시인께서 승려생활을 할 적에 강화도 전등사 주지를 역임했던 데서 오는 친밀감과 연관이 있을는지 모른다. 춘성 스님도 한때 전등사 주지를 역임했기 때문이다.

특히 <만인보> 24권에 실린 '두 상좌'라는 시 속엔 " 이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중/ 불교승려 2인/ 백용성과/ 한용운/ 그들이 3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동안// 그들의 상좌/ 백용성의 상좌 동산/ 한용운의 상좌 춘성// 한달에 한번 함께 면회더라(시 '두 상좌' 부분)"라고  백용성과 한용운 스님의 옥바라지를 위해 애쓰는 두 상좌의 모습을 그려낸다.

만해가 투사의 삶을 살았다면, 그의 상좌인 춘성은 투사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시봉자로서의 길을 살았다. 이 두 분의 삶을 지게와 작대기의 삶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작대기가 없으면 지게는 받치지 못한다.

오늘은 89회를 맞는 3·1절이다. 89년 전, 온 겨레가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에 맞서 떨쳐 일어섰던 감격스런 날이다. 그러나 3·1절을 맞는 마음이 전혀 가볍지 않다. 그날의 정신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민족정기는 나날이 흐려져 가고 있다는 인식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지향점 잃은 역사,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삶이란 얼마나 한심하고 위태로운가. 만해 스님과 그의 상좌였던 춘성 스님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면서 애써 안타까운 마음을 삭힌다.


태그:#한용운 , #상좌 , #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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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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