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사를 했다. 세렝게티 옥탑, 1년 10개월 동안 나를 전투사로 만든 그곳을 떠났다. 머물 이유가 없으니 떠나는 것도 이유가 없었다. 두 달만 있으면 계약 기간 2년을 채워 마음 편하게 훌훌 털고 나올 수 있었지만, 떠날 마음이 생기면 하루도 머물 수 없는 방랑꼬냥이 기질은 결국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발길 닿는 곳이 내 고향이요, 등 뉘인 곳이 내 집이라

슬슬 이 집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 생각은 이 굼뜬 몸을 움직이게 했다. 인터넷에 적당한 가격으로 나온 매물을 검색하고 동네별로 몇 군데씩 추려내 보았다. 서울 송파구에서 양천구로 올 때 아무런 이유가 없었듯 이번에도 어디로 갈지 결정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선택의 폭은 넓었다.

그러나 복비를 주고서라도 부동산을 통해 소개를 받는 이유는 분명히 있는 듯했다. 직거래로 발품 팔아 좋은 집 구하는 것도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지, 이건 뭐 면접 사진 만큼 집 사진도 포토샵의 힘은 위대하더군.

① 계단 딱 3개만 내려오는 1층 같은 반지하예요

그랬다, 비교적 세렝게티 옥탑에서 가까운 양천구 신월동의 한 빌라. 사진상으로 봤을 때 어찌나 집이 좋든지, 과연 이 가격에 이런 집이 가능한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집을 보러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마음에 들면 바로 가계약금이라도 걸어둘 생각으로 보증금 10%의 돈을 들고 찾아갔다.

현재 살고 있다는 앳된 얼굴의 아가씨가 마중을 나왔고 그녀를 따라 찾아들어 간 곳. 그녀의 말은 맞았다. 계단 3개만 내려가는 집이었다. 문제는 현관 앞의 계단 3개와 그 옆에 붙은 7개의 또 다른 계단. 이건 뭐… 동굴이야?

"1층 같은 반지하라면서요?"

나의 말에 그녀는 "다들 이렇게 한다고 해서…"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기왕 온 거 방이나 보고 가자는 생각에 현관으로 들어서니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거실이며 온 방에 불을 켜놓고 있었다.

"햇빛 들어와요?"
"예…, 뭐 많이 어둡진 않아요…."
"불 좀 꺼봐도 돼요?"

그녀의 놀란 기색, 망설이던 그녀는 마지못해 불을 껐다. 동굴 맞네….

안방 꼭대기에 뚫린 조막만한 창문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 창살은 왜 쳐놨나, 도둑놈 몸뚱이도 못 들어오겠구먼.

"이러시면 안 되죠, 이렇게 와보면 금방 알 걸 가지고."
"사실… 집이 이래서 사람들이 보러 오지도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꼬냥이 역시 반지하에 살아보았지만 집이 좋고 안 좋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진을 보고 간 사람은 그 사진 속의 집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아닌가. 싫은 기색 못하는 꼬냥이지만 이사는 중요한 문제라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진 채로 나와버렸다.

② 습기 전혀 없는 깨끗한 집이랍니다!

이번에는 강동구 고덕동의 한 빌라로 가보았다. 방 2개의 안방 사진을 보니 창문도 크고 채광도 좋아 좀 먼 거리이긴 하지만 마음에 들면 계약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집으로 들어서니 광고에서 본 대로 나름대로 깔끔한 구조와 안방도 넓고 욕실도 깨끗했다. 거의 85점의 점수를 주고 싶을 만큼 흡족했다고 할까?

"작은 방 좀 볼게요."
"아… 짐 쌓아놔서 좀 지저분한데…."
"괜찮아요, 작은 방은 침실로만 쓸 거라 침대 위치 좀 보려고요."

작은 방문이 열리고…, 텁텁한 공기가 훅~ 하고 풍기며 온 사방에 시꺼멓게 자리 잡은 흉물스러운 곰팡이들. 난 보았다. 내 눈앞에 펼쳐진 판타스틱 포자의 왕국을. 이건 뭐, 키워서 판매하시나?

"제습지 붙이거나 주인집에 말하면 도배 새로 해줄 거예요."
"도배는 당연히 해줘야겠지만 이 정도면 집 문제네요. 제습지로 해결될 상황이 아닌데요? 습기 없다면서요?"
"음…. 안방은 없어요, 작은방은 짐 쌓아놓는 곳이라 상관없을 줄 알았죠."
"전 쌓아놓을 짐이 없어서 작은 방을 쓸 거라서요."

집을 보러 다니며 점점 까칠해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목동에서 고덕동까지 5호선 지하철로 끝에서 끝까지 달려가 보고 싶었던 게 포자의 왕국이었을까.

그즈음 신경성이었는지 온몸에 알러지처럼 울긋불긋한 무언가가 생기기 시작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꼴이 아닌가 걱정도 되었지만 어쩌랴, 한번 시작했으니 끝은 봐야지. 쓸데없는 고집 하나는 최강이다.

집을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갉아서 먹으리!
▲ 꼬냥이의 앙탈! 집을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갉아서 먹으리!
ⓒ 강나루, 박봄이

관련사진보기


배추도사를 능가하는 집주인

사당의 일반 주택 1층. 지금껏 본 집 중에 가장 깔끔하고 마음에 들었다.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하자도 없고 내 또래의 여성 세입자가 집도 깨끗하게 쓴 터라 문의도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맛있는 떡을 봤으니 제사를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주인집에 가서 가계약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4층의 주인집 문 앞에서 살짝 망설이는 세입자.

"주인분이 조금 깐깐하세요."
"지금 저희 집도 워낙 강적이라 괜찮을 거예요."

주인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연락을 받은 듯 근엄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집은 다 봤어?"
"예." (초면부터 왜 반말이신지….)
"이 집만큼 좋은 집이 어딨어, 그 값에. 나도 돈 욕심 없어서 어려운 사람 돕는 셈치고 싸게 내놓는 거야."

옥탑방 보증금에서 몇 배를 올려서 하는 이사라 이 정도 집은 솔직히 평균 시세였다.

"도배랑 장판은 해주실 건가요?"
"왜? 깨끗하게 썼는데 할 이유가 없잖아, 1층 아가씨, 집에 하자 생겼어?"

순간 당황하는 세입자. 아니 월세에 도배랑 장판 해주는 거야 당연한 건데 왜 불똥이 세입자한테 튀나.

"아니요, 집이 더럽다는 게 아니라 새로 이사하는 건데 도배장판은 여쭤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난 못해줘, 그럴 돈도 없고. 꼭 할 거면 1층 아가씨가 돈 내놓고 가."

순간 왜 내가 울컥했을까. 아마 한마디 말도 못하고 울상 지은 세입자의 모습에서 배추도사 앞의 내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그러시면 안 되죠, 월셋방 살면서 어느 세입자가 도배랑 장판 비를 내놓나요? 안 해주시면 그만이지, 이상하시네."

꼭 해달라는 말은 아니었다. 벽지 장판 모두 깨끗하긴 했지만 사람이 살았던 집에서 어느 정도의 생활감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런 이유로 집주인에게 물어본 것뿐인데 세입자가 죄인이라도 되는 양 몰아대는 모습이라니.

"그리고 우리가 워낙 깔끔하게 살아서 집앞 골목도 더러운 꼴 못 보니까, 1층 사는 사람이 골목 청소해줘야 돼."

이건 무슨 달밤에 복댕이 짖는 소리야. 깔끔하면 자기 성격이 깔끔한 거지, 1층 사는 사람이 왜 골목청소까지 해야 해?

"됐습니다, 전 제 방도 안 치워요!"

미련없이 돌아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배추도사의 잔소리는 사랑가로 들릴 정도의 내공을 가진 집주인. 여기서 살다간 아마 <오마이뉴스> 사회면에 내 이름이 올라갈지도 몰라.

대문 밖까지 쪼르르 따라나오는 세입자 아가씨가 얼굴엔 미안함이 가득이다.

"죄송해요…."
"그냥 날짜 맞춰서 나가세요, 그게 낫겠네요."
"이러는 사이 몇 달 지나서 아마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세입자 아가씨와 난 마주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인사 대신 서로 좋은 곳 얻어 빨리 나가자는 약속을 했다.

그날 밤, 옥탑에서 울긋불긋 알록달록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보자니 이 넓은 서울에서 작은 몸 뉘일 곳 구하기가 이리도 힘든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더군.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흑….


태그:#옥탑, #이사, #집주인, #세입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