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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눈물이 쏟아질까봐 어쩌지도 못하는, 한 집안의 가장이란 무게와 지금의 내 나이는 어머니, 아니 엄마를 부르며 혼자 울 수 있는 여건조차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럴 때는 베개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 잠든 아이의 발을 만진다. 꼼지락거리는 아이의 발은 죽음 혹은 외로움의 자리에 생명력을 채워준다.

 

잠들어버린 아내의 품으로 파고 들어가보기도 한다. 내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내의 품속에서 어머니의 가슴을 찾는다.

 

그도 아니라면 아이의 곰 인형을 끌어안고 잠을 청한다. 마흔이 넘은 사내에게도 곰 인형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분명 현실이긴 해도 비극이다." (이 책 158쪽)

 

현실은 곧 비극이기도 하다며 그는 아내들에게 혼자 잠자는 남편의 머리맡에 에이스나 빠다코코낫 같은 과자를 올려놓아 보라고 말한다.

 

다음날 아침, 남편의 잠자리 근처에 빈 과자 봉지가 뒹굴고 있으면 밤새 그리움에 목말랐을 남편을 위해 따뜻한 국 한 그릇도 잊지 말아 달라고 청한다.

 

요즘 세상에 아침 밥상에 국까지 부탁하는 간 큰 남자가 전하는 <어른의 발견>은 생활이라는 단어가 생존경쟁을 의미하는 우리 시대에 40대로 살아가는 한 아저씨가 결혼, 부부, 육아, 중년 생활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들이다.

 

지은이 윤용인은 <딴지일보> 기자를 거쳐 여행과 미디어 사업체를 운영하며, 일간지 등 여러 매체에 글을 써 온 꽃중년 칼럼니스트다. 사람마다 경험한 일들이 다르고, 생활환경이 다르지만 또래 집단에게 말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소재가 있기 마련이다. 사회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쳤던 선배 세대인 386이(이제는 486으로 불려야 마땅한) 어느새 40대 아저씨들이 되었는데, 이 책을 조용히 그들의 책상 맡에 올려두면 "기특한 후배" 소리 듣기에 딱 좋은 책이다.   

 

40대 가장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늙고 병든 부모의 자식으로, 아이의 아버지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소속된 사회의 조직원으로 제 역할을 다 감내해내야 하는 부담스럽고, 무섭고, 힘에 부치는 생활이기 쉽다.

 

전투적이고 생기발랄했던 20대의 연애나 파뿌리 되는 날까지 알콩달콩 신혼으로 지낼 것만 같았던 30대를 지나, 40대에 안착하면 우울증보다 더 무서운 병 '우울하지 않은 척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앓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저자는 후배와의 일화로 슬쩍 알려준다.

 

우울증에 걸려야 정상인 우울한 세상, '우울하지 않은 척'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

 

우울증에 걸려야 오히려 정상인 이 우울한 세상에서 우울하지 않은 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스스로 우울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막은 채 '강함'에의 의지만이 충실한 정글 속 사람들"에게 그는 "어느 날 이 사람들이 가식의 끈을 놓아버렸을 때, 자기감정에 솔직했던 우울증 환자들보다 더 걷잡을 수 없는 미궁 속에서 헤맬 것"같다고, 바로 저자 자신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고 고백한다.

 

여행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온 그는 충동을 사랑한다. 불행하게도 여행마저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그는 말한다.

 

"계획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세뇌하는 세상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슬그머니 내밀고 일상의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꺾는 바로 그 순간의 쾌감으 나는 포기하지 못한다. 준비되지 않은 여행길에서 만나는 의외성, 남기고 온 것들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과 이어지는 체념까지도 내 사랑의 대상이다." (217쪽) 

 

책 속에는 유쾌한 해결책들이 숨어 있다. 고부갈등을 겪는 사람들에게 가족의 개념을 조폭에게 배우라고 권한다. 며느리 입장에서 시어머니를 그저 사랑하는 남편의 어머니로 규정하고 어머니는 며느리를 그저 내 아들의 보조물로 인식하기 때문에 갈등이 커진다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 만났으면서도 조폭들은 "우리 패밀리" 혹은 "내 식구"라는 말을 쓰면서 하나가 된다는 걸 본받으라고 한다. 그들은 생판 남이어도 서로 죽고 못 살더라면서.

 

한 남자의 여성관은 딸에게 바라는 모습이나 아내에 대한 생각을 들여다보면 알기 쉽다. 운동선수 아내에 관한 글을 보면 우리나라 운동선수 부인들은 하나같이 남편 보약이나 달이는 예쁘장한 아내로 늙어가는 것이 안타까운 모양이다. 축구선수 호나우두의 아내 밀렌 도밍구스가 결혼 후에도 여전히 축구 선수로 뛰었다는 것, 베컴의 아내 빅토리아 애덤스가 얌전하게 관중석에 앉아 손뼉만 치는 여자가 아니라 하나의 당당한 개체로서 자신의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여성이라며 본보기로 들어준다. 

 

선수들은 결혼을 통해 안정을 얻지만, 선수의 아내들은 대개 스타 플레이어를 돕는 보조자로 살아간다. 그는 "공평한 게임의 룰이 스포츠맨의 기초"라며, "스포츠 스타들은 언론에서 결혼을 안정과 같이 묶어 쓰는 데 대해 쪽팔린 일이란 것을 느꼈으면 한다"고 말한다.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를 흔치 않은 입담으로 엮어낸 이 책은 현재 사십대를 살아가는 꽃중년들은 물론 마흔 즈음을 향해 내달리는 삼십대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읽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이 책 25쪽부터 29쪽까지 제시된 '명랑 결혼생활을 위한 결혼고시'를 풀고, 답안지를 바꿔서 채점까지 해주면서 말이다.

 

지은이의 말대로 주식과 정치와 골프와 자동차 이야기를 하다 결국은 자기 자랑으로 끝을 내는 것만이 어른의 술자리는 아니다. 가슴 뛰는 충동을 혼자 속으로 삭이지 않고, 펄펄 날아오르며 함께 '어른의 자리'를 즐기고 만끽하자는 그의 심리누드클럽에 슬쩍 동참하고 싶다.


어른의 발견 - 어른들의 속마음을 파고드는 심리누드클럽

윤용인 지음, 양시호 그림, 글항아리(2008)


태그:#40, #심리, #어른 , #발견,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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