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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칼, 환도

조선시대의 칼은 간결하고 정제되어 있다. 다른 나라에 비해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치장보다는 선비의 품격이 나타나는 고고한 맛이 더하다. 그렇다고 서슬 퍼런 날에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보다도 무엇인가 안정된 느낌을 준다.

조선의 칼의 특징을 들자면 다수가 휘어진 것보단 곧게 뻗어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좀 더 제대로 표현하자면 곧게 뻗어있긴 하되 약간의 기교를 부려 살짝 곡선을 만든 것으로서, 크게 보면 흔히 곡도(曲刀)라고 불리는 달이나 활처럼 휘어진 칼은 보기가 쉽지 않다. 이는 당시 조선 사람들이 무엇을 선호하였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으로서,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의 칼과 비교해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혹자는 몽골의 휘어진 칼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칼이 휘어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몽골의 침략 당시 그랬을 가능성도 있지만, 조선시대에도 곧게 뻗은 칼이 여럿 존재하였고, 휘어진 각도 또한 그렇게까지 많이 휘어지진 않았다. 그렇기에 단순히 어느 무엇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도 좀 더 효율적으로 베고 사용하기에도 편리한 곡도로 발전해 나갔으나, 무기로서의 성능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것이 조선의 칼이다.

조선의 칼은 주로 환도(還刀)라고 부른다. 조선의 거의 모든 검을 환도라고 부르는데, 기록을 보면 심지어 외국의 칼들 또한 환도로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실상 허리나 옆구리에 차고 다니며 실전에서 활용하는 칼들을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사도세자의 어머니였던 영빈이씨가 소장하였다고 하는 환도로서 명품이다.
▲ 패월도. 사도세자의 어머니였던 영빈이씨가 소장하였다고 하는 환도로서 명품이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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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어머니였던 영빈 이씨(暎嬪李氏 : 1696~1764)가 소장하였다고 하는 패월도(佩月刀)는 그러한 환도 중에서도 명품으로 꼽힌다. 칼집과 손잡이는 매화교(梅花鮫), 즉 상어가죽으로 만들어서 붉은 칠로 마감하였다고 하며, 손잡이의 금속장식에는 구름과 유사한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칼집에는 의장을 위한 전형적인 상징문양인 산과 구름 등을 상징하는 길상무늬를 덧대어 만든 가죽으로 만든 장식이 부착되어 있는데, 아래쪽 가장자리에는 방망이술을 달라 장식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개인이 칼을 소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보면 칼로 인하여 일어난 사고를 여럿 말하고 있다. '성종실록'에서는 '고읍지 살인사건'이라는 게 보인다. 이 사건은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의 종이었던 원만(元萬)이라는 자가 그 주인이 시키는 명령을 듣고 환도를 가지고 고읍지(古邑之)라는 사람을 죽이고, 석산(石山)이라는 이가 그 고읍지를 새끼줄로 매달았던 사건이다. 이 외에도 칼로 인한 살인 사건들이 여럿 있었고,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생각 외로 조선시대와 칼의 관계가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

호랑이의 기운이 아로새겨진 신비의 검

이러한 검은 벽사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12년마다 한번씩 제작하였다.
▲ 사인검. 이러한 검은 벽사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12년마다 한번씩 제작하였다.
ⓒ 국립대구박물관, 『한국의 칼』,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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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칼 중에서 사인검(四寅劍), 삼인검(三寅劍)이라고 부르는 게 있다. 이러한 칼들은 인검(寅劍)이라고 부르는데, 다른 칼들에 비해 그 생김새부터 예사롭지 않은 것들이 더러 있고, 일반적인 환도와 비슷하게 생긴 것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역할은 무기로서의 기능도 존재하지만, 그보다도 재앙을 막는, 즉 참사(斬邪)의 기능으로서 존재한다.

인(寅)은 지지(地支)의 네 번째로서 호랑이를 의미한다. 이 호랑이는 음양오행설에서 양의 성질을 가지고 음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어졌고, 만물이 시작인 춘양(春陽)에 해당된다고 인식되었다. 이를 가지고 조선에서는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 : 새벽 3~5시)에 도검을 제작하였다. 이때 이 4가지를 모두 맞춰, 즉 인시의 2시간 이내에 만든 도검을 사인검이라고 하며, 그 외에 3가지만 맞추고 시간을 제외하여 만든 도검을 삼인검이라고 한다.

이렇게 정성스레 만들어졌고, 그 소유는 주로 왕실과 양반들이 위주였다. 이러한 도검들을 보면 별자리나 주문 등이 새겨져 있는 것들도 있다. 특히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는 인검을 칠성검(七星劍)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인검들은 정성을 다해 만들었기에 명검이 많지만 실전성에서는 떨어지는 것들도 많다. 그리고 사인검과 마찬가지로 용의 지지인 진(辰)에 맞춰서 제작한 도검인 사진검(四辰劍), 삼진검(三辰劍)도 있다.

이러한 도검은 호신용으로 주로 사용되었지만, 검계나 살주계 같은 조선시대 조직폭력배들에게도 선호의 대상이었다.
▲ 창포검. 이러한 도검은 호신용으로 주로 사용되었지만, 검계나 살주계 같은 조선시대 조직폭력배들에게도 선호의 대상이었다.
ⓒ 국립대구박물관, 『한국의 칼』,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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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창포검(菖蒲劍)이라는 칼이 있다. 이 창포검은 겉보기에는 단순한 막대기나 지팡이 같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속에 날카로운 칼이 들어있다. 이 칼은 서양의 순례자들이 썼다는 스틱소드(Stick Sword)를 연상시킨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횃대, 좌장검 등이 있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호신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런 창포검 같은 호신검을 지니고 다녔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들고 다닌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바로 검계, 살주계 같은 비밀 단체들이 이용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조야회통'이라는 책에 보면 살주계의 무리들이 모두 창포검을 차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검계와 살주계를 조선시대의 조직폭력배로 보는 견해도 있으니, 조선을 단순히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우리의 인식과는 약간 빗나간다.

충무공의 얼이 깃든 서슬퍼런 쌍검(雙劍)

위의 사진은 복제품으로서 진품은 현충사에 있다. 길이가 2m에 달하며 글귀가 새겨져있다.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촬영.(보물 326호)
▲ 이충무공장검. 위의 사진은 복제품으로서 진품은 현충사에 있다. 길이가 2m에 달하며 글귀가 새겨져있다.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촬영.(보물 326호)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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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도검 중에서 명검을 꼽아라고 하면 이충무공장검(李忠武公長劍)을 꼽을 수 있다. 보물 326호로 지정된 이 검은 모양과 크기가 거의 같은 쌍검으로서 선조 27년, 즉 서기 1594년 4월에 제작되었다. 태귀련과 이무생이 제작하였다고 하는 이 명검은 칼집은 상어가죽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흑칠을 하여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칼 몸에는 이순신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三尺誓天 山河動色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  한바탕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이충무공장검은 그 길이가 각각 197㎝, 196.8㎝이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물론 오늘날의 사람들의 키에 비교해도 훨씬 큰 길이로서 이걸 실전에서 사용했을까라는 의문이 들게 한다. 우선 이충무공장검은 의장용으로 만들어 진 것으로서 실전에서는 활용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순신의 전술은 적과 대치하였을 때 조선의 장점이었던 화포를 이용하여 원거리에서 포격을 하는 것으로서 근접전을 하는 일본과는 대치되는 방식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순신이 구태여 이러한 칼을 제작한 것은 의장용으로서의 의미이지 실전용으로서의 의미를 가지진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긴 칼을 실전에서 쓴 예는 의외로 많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야태도(野太刀)라고 하여 이충무공장검처럼 긴 칼을 이용하여 싸웠으며, 중국도 쌍수장검(雙手長劍)이라고 하여 긴 칼을 이용하여 싸웠다. 그리고 독일의 쯔바이한더(Zweihander), 영국의 투핸드소드(Two hand sword)도 180㎝를 넘기는 긴 칼로, 전장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흔히 은장도라고 알려져 있으며, 장식이 두드러진다. 조선후기에 가서는 실용적인 목적이 강화된다.
▲ 장도. 흔히 은장도라고 알려져 있으며, 장식이 두드러진다. 조선후기에 가서는 실용적인 목적이 강화된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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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조선인들이 가장 널리 사용한 도검은 무엇일까? 조선을 대표하는 검이 환도라고 한다면, 조선인들이 애용한 도검은 장도(粧刀)라고 할 수 있다. 장도는 작은 검으로서 손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도는 주로 옷고름 등에 패용하는데, 고려시대 몽골의 영향을 받아 유행하게 되었다.

여인들에게는 정절의 상징으로서 우리에게 흔히 은장도라고 알려진 칼을 지니고 다녔다. 이는 호신구이면서도 정절을 빼앗길 위기에 자결하라는 용도로서 주어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장식품과 자살용구라는 잔인한 양면성을 지녔으나,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장식품의 의미에 실용구가 더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후기의 여성용 장도를 보면 젓가락이 함께 달려있는 것도 있어서 식기(食器)로서의 활용도 가능하였고, 은으로 제작하여 독의 유무를 판가름하는 잣대로서 활용하기도 하였다.

남성들에게도 이러한 장도가 존재하였다. 남성의 것은 여성의 것에 비해 투박하고 단순하게 생겼으며, 주로 호신용도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장도는 그 모습이 화려하고 은을 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조선 내에 사치풍조로 인한 사회문제까지 대두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한문소설인 '시간기(市奸記)'를 보면 박씨라는 인물이 서울의 시장에서 소매치기를 고용하여 장도를 훔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당시 조선에서는 장도를 귀하게 여기고 서민의 경우 어렵게 얻은 장도를 가보로 삼기도 하였다. '연산군일기'에 보면 조정에서 이러한 장도로 인한 사치풍조를 염려하여 서민들의 은장도 사용을 금지하기까지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칼이 있었고, 이들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무신들이나 장군은 물론이거니와 양반이나 서민들에 걸쳐서 이용된 것이 칼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도검을 전투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외국에 비해 흔치 않았다. 그래서 살인을 목적을 극대화시키는 식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으나 간결하고 정제된 모습으로 후세까지 그 단정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국립대구박물관에 갔다와서 쓴 글이며 예전의 '한국의 칼' 특별전에 진열되었던 유물들을 위주로 썼습니다.



태그:#국립대구박물관, #한국의 칼, #환도, #이충무공장검, #패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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