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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가 중요한 무역 도시로 성장한 것은 18세기 초반 무렵이었다. 그런데 무역 도시는 언제나 제국주의 열강의 표적이었다. 거기다가 그 도시가 그 나라의 수도와 가까울 경우 제국주의자들은 어김없이 그곳을 먼저 노렸다.

홍콩, 마카오와 인접한 광주(광저우)는 조선으로 치면 강화도가 있는 인천 같은 곳이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을 협박하여 맺은 강화도조약은 제국주의의 종주국인 영국에서 배워 온 것이었다. 조선 패망의 역사가 강화도에서 비롯되었듯이, 중국이 치욕의 역사를 감수하기 시작한 곳은 광주였다.

아편전쟁은 얼핏 그 이름부터가 매우 중국적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아편의 원료가 되는 양귀비의 원산지는 중국이 아닌 유럽과 북아프리카였다. 양귀비를 ‘기쁨의 꽃’이라고 불렀던 것은 물론 그 즙에서 추출하는 아편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인도 산 아편을 중국에 팔아먹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였다. 그들은 1800년에 이미 백 근 들이 아편 2천 상자를 중국에 수출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30년 후 중국 내 반입 아편은 무려 열 배로 늘어났는데 그 중 대부분은 밀수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밀수 아편은 다시 7년 후 두 배로 늘어나게 된다. 여기에는 미국 상인도 새로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과로 중국 땅에는 200만 명이 넘는 아편쟁이가 흐느적거리게 되었다. 심지어는 군 내부에까지 아편이 침투해 들어갔다. 게다가 아편 구매를 위해 중국의 은이 대량으로 국외 반출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은으로 세금을 받던 중국 정부는 세수의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아무리 타락하고 무능한 정부라 해도 이것을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838년 도광제는 강직하기로 이름 난 호북 총독 임직서를 특명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아편 밀수를 추방하도록 조치했다. 임직서는 영국 밀수 상인의 아편 이 만 상자를 압수하고, 한 상자 당 차 한 근으로 보상해 주었다. 이것은 물론 정당하고도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임직서는 몰수 아편을 한데 모아 정부 관리와 외국 상인의 입회하에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제국주의 영국에서 내심 기다려 오던 일이었다. 1940년 4월 영국의회는, ‘(중국에 당한) 영국의 영원한 치욕을 씻기 위해서’라며 중국에 군대를 파견하는 의안을 가결한다. 이런 일은 자딘 메시슨 상회를 비롯한 아편회사와 인도, 중국을 무대로 하는 무역상들의 로비가 있은 다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악의 집단에도 정당한 사람은 있는 법이었다. 영국 자유당의 청년 대의원 글래드 스턴은, “청국에는 아편 무역을 금지시킬 권리가 있다. 영국의 외무대신은 청국의 정당한 권리를 짓밟고 부정한 무역을 지원했다. 이와 같이 불공정한, 영국의 수치를 드러내는 전쟁은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다. 영국의 국기는 이제는 추악한 아편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걸리게 되었다”고 모국을 맹비난했다.

영국군이 양자강을 건너 남경을 압박하자 청국 조정은 서둘러 화친조약을 맺어야 했다. 그 결과 청국은 홍콩을 넘겨주었고 영국을 우선 최혜국으로 대우하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거액의 전쟁 배상비까지 물어야 했다.

다시 15년 후 영국은 청국 상선 에로호(號)에서 영국기가 끌어내려졌다는 것을 트집 잡아 국기 모독이라고 항의하며,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북경을 향해 진격하게 된다. 이제 청국은 프랑스에도 많은 이권을 내줘야 했다. 또한 미국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어 실질적으로는 프랑스와 맞먹는 이권을 챙겼다. 그런데 세 나라가 내세운 조건 중에는 똑같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바로 기독교의 포교를 허용하라는 요구였다.

상해는 바로 이 아편전쟁의 결과 맺어진 남경조약에 의해 개항된 도시였다. 남경조약은 훗날 일본이 한국을 압박하여 맺은 여러 불평등 조약의 지침 교본이 되기도 했다. 남경조약으로 인해 상해의 실권은 외국인 해관세무사가 장악하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침략의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외국인 조차 지역을 두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중국의 민족해방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중심지로 이용되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신규식이 눈 여겨 본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그는 중국의 해방운동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겠다는 방략을 세워놓고 상해로 온 것이었다. 1911년까지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지사의 대부분은 주로 동북삼성 일대를 활동지로 삼았다. 그들은 국내에서 쫓겨 도피해 온 애국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겨우 목숨을 보전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당시 상해와 같은 중국의 중심부에 들어온 독립지사는 극소수였다. 그리고 그들의 신원과 근황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독립운동가의 신분으로 손중산이 이끄는 중국 국민당과 공식적인 접촉을 시도한 것은 신규식이 처음이었다. 이런 점에서 신규식은 망명자가 아니었다. 그는 능동적인 독립운동가였다. 물론 그는 정치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순수한 심성과 천부적인 감각을 타고 난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혁명가만의 고유한 자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신규식이 상해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박찬익이었다. 박찬익은 관립공업전습소 출신의 엔지니어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일찍이 상공학교 재학 시에 독립운동을 모의하다 퇴학 처분을 받았고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한 사람이다. 그는 국권 피탈 후 간도에 망명해서 교육 운동을 하기도 했다. 물론 국내에서는 신규식과 가깝게 지내던 의기투합의 동지이기도 했다. 그는 신규식의 노선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박찬익은 신규식을 동지 겸 형님으로 예우했다.

“예관 형님, 하루 정도는 쉬면서 하셔야지요.”

어언 상해 정착 후 3년째였다. 쉬지 않고 일만 하는 신규식에게, 박찬익이 어디 바람이나 쏘이러 가자며 한 말이었다. 신규식은 중국 혁명 인사들과 이미 두터운 교분을 쌓아 놓고 있었다. 그리고 벌써 10여 명의 한국인 독립지사가 신규식을 찾아와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 신규식은 임시정부의 모태가 될 조직을 구상해 놓고 있었다. 또한 그는 최근 상해 아래 항주에다 비밀 정보기관을 개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규식에게는 모든 일이 더디게 진행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하루도 제대로 여유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신규식에게는 내세울 만한 취미가 없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한시를 짓는 일이었는데, 그것도 남이 보기에는 열심히 공부하는 일로 비쳐지기 십상이었다. 그는 종교인은 아니었지만 생활은 매우 금욕적이었다.

“남파, 어디 갈 만한 데가 있으면 안내해 봐.”
“황포강에 가서 농어를 한 번 드셔 보시지요. 마침 농어 철이기도 합니다.”

상해의 날씨는 아직 5월인데도 벌써 더위가 느껴졌다. 특히 오늘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서 더 무더운 것 같았다. 신규식은 고향에서 먹었던 하얀 농어회를 생각하니 갑자기 입맛이 당겼다. 그는 고향에서 생선회를 먹을 때 꼭 조선 된장을 묻혀서 먹고는 했다. 그게 육질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된장은 없겠지만 그래도 마호타이 술과 함께 취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아내와 딸이 몹시도 보고 싶던 차였다.  

두 사람은 인력거를 타고 황포강으로 갔다.
“이렇게 좋은 데를 안내해 주어 고맙네.”
신규식은 탁 트인 강줄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황포강은 상해 시내까지 들어와 흐르는 양자강 하류의 한 지류였다. 황포강은 제국주의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중국 강남의 수로였다. 이따금씩 대규모의 준설 작업을 해야 하는 강이기도 했다. 강변에 준설선 대여섯 척이 미동도 없이 머물러 있었다. 황포강은 상해가 개항된 이후 오송에서 상해까지 50리 물길에 기선이 오가는 강이기도 했다. 마침 강 한가운데에서 움직이는 기선에서 길게 뱃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그들은 농어를 주문했다. 고향의 농어와 색과 맛이 다르지 않았다.
“형님 다음 기회에는 쏘가리를 한 번 드십시다.”
“쏘가리도 있단 말인가?”
“예. 정산호수에 가면 있답니다.”

모두가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정겨운 이름들이었다.
“자네 처자는 어디에 계신가?”
“자식은 없고 처만 고향에 있습니다.”
“경기 파주였던가?”
“기억하시고 있군요.”
“내 처도 고향이 경기라네.”

그들은 아직 30 전후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이라고 해서 고달픈 여정과 낯선 객지 생활에 와락 회의감이 들 때가 없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물안개가 강 수면에 뽀얗게 올라와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꽤 많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소설입니다.



태그:#아편전쟁, #황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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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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