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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리 웃나루 선창에 도착한 고막들이 트럭에 옮겨진다.
 장암리 웃나루 선창에 도착한 고막들이 트럭에 옮겨진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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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막밭은 두 종류가 있다. 개인이 운영하는 ‘방천’으로 불리는 것과 마을공동으로 운영하는 ‘공동양식장’이 그것이다. 전자가 개인사업에 속한다면 후자는 마을공동사업에 해당된다. 관리의 주체도 개인관리와 마을공동관리로 다르다. 종패자금이나 꼬막선별기 구입 등 꼬막관련 국가 지원사업은 마을공동어장에 한해 지원하고 있다.

벌교꼬막이 품질을 유지하고 꼬막밭이 제기능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마을공동어장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근 마을은 마을공동어장을 개인지분으로 나누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장암리 꼬막밭은 반대로 개인지분으로 나누어졌던 것을 공동어장으로 전환해 운영하고 있다. 10여 년 전까지 벌교꼬막은 따로 종패를 뿌릴 필요가 없었다. 그만큼 자원이 풍부했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10여 년 전부터 여수나 고흥에서 종패를 사다 뿌리곤 한다. 종패 값은 성패(다 큰 꼬막) 값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비싸기 때문에 정부지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다 보니 개인이 자기 꼬막 밭에 종패를 뿌려 관리하기 쉽지 않다.

벌교갯벌에서 꼬막을 캐 그릇에 담는 장암리 어민들
 벌교갯벌에서 꼬막을 캐 그릇에 담는 장암리 어민들
ⓒ 보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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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막밭, 마을을 지킨다

패류와 인간의 관계는 구석기시대로 올라간다. 조개무지 즉 패총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에 들어서는 한말 광양만 섬진강 하구에서 굴양식을 했고, 여자만의 장도, 대포, 장암의 아랫나루 등에서는 꼬막양식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여자만의 꼬막을 수탈하기 위해 웃나루 선창에 통조림공장을 짓기도 했다.

벌교사람들은 흉년이 들면 꼬막을 캐다 끼니를 해결하고, 생필품과 바꾸기도 했다. 그런데 해방을 몇 해 앞두고 큰 흉년이 들었지만 꼬막밭에 들어갈 수 없었다. 조상대대로 이용해 오던 꼬막밭을 일제의 비호를 받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개인소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제두마을 책임을 맡았던 서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나서서 재판을 해 꼬막밭을 되찾았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꼬막이 널려 있어 널이 나가지 않을 정도였다. 장암리와 대포리는 물론 보성의 죽암리의 주민들도 벌교 꼬막밭 덕에 흉년을 넘기기도 했다.

꼬막작업은 물때보다는 가격과 수요 등을 고려한 ‘업자들’의 주문에 따라 결정된다. 마을에서 작업결정이 이루어지면 어촌계원들은 반드시 호당 1명씩 참여해야 한다. 업자들의 주문만 있다면 조금을 전후한 며칠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작업을 할 수 있다.

꼬막을 캐는 주민들에게는 마을자금에서 일당 10만원을 준다. 반대로 작업에 나오지 않으면 벌금이 4-5만원 부과된다. 결국 마을공동 꼬막작업에 참여하지 않으면 일당을 포함해 15만원을 손해 보는 셈이다. 이렇게 경비를 제하고 남은 금액을 연말에 주식배당 하듯 가구별로 분배한다. 꼬막 밭이 큰 마을은 일 년 작업을 마치고 1000여만 원, 작은 곳은 500여만 원을 분배한다. 최근 주민들이 노령화되면서 제두마을처럼 벌금을 부과하지 않는 마을도 생겨나고 있지만 장암리는 모두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꼬막을 세척 및 선별하는 작업
 꼬막을 세척 및 선별하는 작업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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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막밭이 금밭이다

꼬막밭이 있는 마을은 갯벌이 ‘금밭’이다. 이러다보니 갯벌자원을 관리하는 규칙들도 매우 엄격하다. 외지인에게는 꼬막밭 지분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 저금 난 차남(분가)도 마을총회에서 승인을 받은 후 1500만 원 정도의 마을기금을 납부해야 지분을 인정받는다. 비로소 진정한 마을주민이 되는 것이다.

장남은 따로 지분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당연히 아버지의 지분을 승계 받아야 한다. 그것도 부모가 살아 있을 때 마을로 들어와야 인정받을 수 있다.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갯사람들이 만들어낸 지속가능한 자원관리 방안인 셈이다. 그만큼 갯벌은 그들의 삶이자 생활의 동력이다.

꼬막은 참꼬막, 새꼬막, 피꼬막 등으로 구분한다. 꼬막 맛은 가을걷이를 마치고 찬바람이 여자만 갯골에 밀려들기 시작해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진달래가 필 무렵까지 좋다. 특히 설을 전후해 알이 탱탱하고 달고 쌉사름한 맛이 최고다.

꼬막 껍질에 17-18개의 굵은 줄이 분명히 새겨진 것은 참꼬막이다. 새꼬막은 참꼬막보다 가는 줄이 32줄, 피꼬막은 42줄이 있다. 참꼬막은 털이 없고, 새꼬막과 피꼬막은 털이 있다. 참꼬막은 제사상에 오른다고 해 ‘제사꼬막’, 피꼬막은 그렇지 못해 ‘개꼬막’, ‘똥꼬막’이라고도 했다.

성장기간도 다르다. 참꼬막은 4년이 걸리지만, 새꼬막은 2년이면 상품이 된다. 그러니 가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벌교시장에서 참꼬막 1킬로그램에  1만원, 새꼬막 1킬로그램에 5천원이다. 장암리 산지에서 새꼬막은 10킬로그램 도매로 3만원, 참꼬막은 6-7만원에 거래된다. 대부분 중간상인들이 도매로 거래하기 때문에 구매하기 쉽지 않다.

벌교에는 격식이 있는 꼬막정식 식당이 많지만 시장골목에서 싸고 쉽게 먹을 수 있는 꼬막비빕밥(꼬막값 1만원+밥값8천원, 2인분기준)을 먹어보는 것도 좋다. 식단에 있는 메뉴가 아니다. 식당주인에게 부탁한 것이다.
 벌교에는 격식이 있는 꼬막정식 식당이 많지만 시장골목에서 싸고 쉽게 먹을 수 있는 꼬막비빕밥(꼬막값 1만원+밥값8천원, 2인분기준)을 먹어보는 것도 좋다. 식단에 있는 메뉴가 아니다. 식당주인에게 부탁한 것이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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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막이 품은 남도인의 삶

오전 11시에 널를 타고 나간 아낙들은 해가 고흥반도를 넘을 무렵 허리까지 빠지는 갯벌에서 나왔다. 그 사이 점심도 꼬막 밭에서 해결했다. 대접에 부어 마신 소주 힘으로 널에 기계(꼬막을 캐는 갈퀴 모양으로 제작된 도구)를 붙이고 갯바닥을 청소하듯 밀었다.

기계에 참꼬막 한 바가지 걸려 올라온다. 그릇에 가득 담긴 꼬막은 배로 옮겨져 선별과 세척작업을 거친다. 이물에는 꼬막이 가득 담긴 자루(20킬로그램)가 차곡차곡 쌓인다. 오늘 하루 벌교갯벌에서 꼬막 캐는 아낙들은 줄잡아 100여 명에 이른다. 어둠이 몰려올 무렵 이들이 캔 꼬막은 배로 벌교천을 따라 웃나루에 도착할 것이다.

홍어 없는 잔치는 생각할 수 없듯, 꼬막 없이 제사상을 차릴 수 없다. 4일과 5일에 서는 벌교 오일장이 번성했던 것도 꼬막 때문이었다. 집집마다 큰 바구니 몇 개씩 꼬막껍질이 나와야 설 명절이 지나갔다.

갯것이 귀하던 지리산 골짜기 마을에선 장독대 옆에 굴러다니는 꼬막 껍질은 장난감이었다. 예쁘게 골이 닳고 색이 바란 꼬막 껍질에 구멍을 뚫어 목걸이를 만들고, 밥그릇이 되기도 했다. 뭍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꼬막인지라 ‘꼬막 맛이 변하면 죽을 날이 가깝다’고 했다. ‘감기 석달에 입맛은 소태 같아도 꼬막 맛은 변함이 없다’고도 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막 삶은 꼬막 맛을 모르고 겉만 보면 돌멩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고양이 꼬막 보듯 한다’고도 했다. 꼬막을 안은 갯벌이 그렇다. 갯벌이 지켜준 마을이야기도 예외가 아니다.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갯벌, 어촌마을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남도의 삶이 녹아 있는가.


태그:#벌교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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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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