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어린 날, 팽이치기에 대한 추억

정월 초이튿날, 김제 망해사에 다녀오는 길에 보았다. 아이들이 저수지 빙판 위에서 신나게 팽이를 지치는 풍경을. 요즘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가만 있자,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 긴가민가하다. 아마도 증여세도 물지 않고 흰머리만 무상증여한 채 흘러가버린 시간이 너무 아득한 까닭일 것이다. 하지만 나라고 해서 왜 저렇게 꽃 피는 시절이 없었겠는가.

초등학교 시절, 겨울이면 팽이를 만들려고 산에 올라가서 지름 소나무를 베어오곤 했다. 그리고 나무의 밑 부분을 야금야금 둥근 마름모꼴로 깎았다. 그러고 나서 꽁지에는 '다마'라는 구슬을 박았다. 손수레 바퀴에서 빼낸 베어링이다. 이렇게 해서 팽이가 완성되면 이번엔 길게 벗긴 닥나무 껍질로 팽이채를 만들었다. 헝겊으로 만든 팽이채보다 닥나무 껍질로 만든 팽이채가 훨씬 질기고 강했다.

시험 삼아 먼저 앞마당에서 팽이를 쳐본다. 그럭저럭 도는 듯하다. 그러나 마당에서 혼자 하는 팽이치기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저수지나 논바닥 위에서 치는 팽이가 훨씬 신나고 재미있었다. 동네 앞 너른 논바닥엔 벌써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팽이를 치고 있다. 슬그머니 끼어들어 팽이를 친다.

이렇게 제 각기 팽이를 치며 놀다가 시들해지면 누군가 "우리 팽이 싸움을 하자"라고 부추긴다. 자기 팽이를 팽이채로 세게 내리쳐서 쌩쌩 돌게 한 다음 그 반동을 이용해서 상대방의 팽이에 가 부딪치게 해서 쓰러뜨리면 이기게 되는 놀이다.

논을 베고 난 논바닥에 언 얼음은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설핏 언 살얼음이다. 그래서 때로는 얼음이 깨져서 발목까지 빠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팽이를 쳤다. 고무신 속 구멍 난 양말에서 더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렇게 겨울철 팽이치기는 직접 만든 앉은뱅이 스케이트 타기와 함께 가장 신나는 놀이 중 하나였다. 김선태 시인이 쓴 '팽이'라는 아름다운 시가 떠올랐다.

팽이기 피워올리는 한 송이 고요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세계사

관련사진보기


팽이가 도는 것은
누군가의 채찍질이 있기 때문이다
조무래기들의 채찍질까지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따악 따악, 아프게
매 맞으며 조금씩 제 몸을 일으켜 세우는 팽이
끊임없는 채찍질로 정신이 뜨여 빠르게 돌더니
마침내 스스로 도는 줄도 모르고 멈춰선 지점

저 무아지경의 황홀한 천착
저 꼿꼿한 자립(自立) 또는 자존(自存)

그리하여 팽이는, 천형의 팽이는
울음소리도 어지럼증도 미동마저도 없이
팽팽한, 한 송이 고요를 피워올리는 것이다
잠깐, 세계의 숨통을 바짝 조이기도 하는 것이다 - 김선태 시 '팽이' 전문

이 시는 2003년에 나온 김선태 시인의 <동백숲에 길을 묻다>에 실려 있는 시편이다. 97년에 첫 시집 <간이역>을 냈으니 6년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낸 것이다.

1960년 전남 강진 칠량에서 태어난 김선태 시인은 199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와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 문단에 나왔으니 상당히 늦깎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집 <동백숲에 길을 묻다>에 실린 시편들 역시 첫 시집 <간이역>에 실린 시편들처럼 남도와 남도 사람들의 삶을 아름답게 풀어낸다.

일상이란 팽이에선 무슨 꽃이 필까

김선태 시 '팽이'는 팽이 돌리기 전 과정을 묘사한 게 아니다. 팽이가 돌고 있는 한 순간을 날렵하게 포착해서 시라는 그물망으로 건져 올린 것이다. "스스로 도는 줄도 모르고 멈춰선 지점"이 바로 그 순간이다.

어린 날 우리는 그 순간을 가리켜 '꼿을 선다'라고 했다. 팽이를 몇 번 세게 내리치면 굳이 팽이채를 치지 않아도 팽이가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에서 빙빙 도는 때가 있다. 이것을 일러 팽이가 '꼿을 선다'라고 하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누구 팽이가 더 오래 꼿을 서나 내기를 하기도 했다.

팽이가 꼿서는 순간을 지켜보던 시인은 "저 무아지경의 황홀한 천착/ 저 꼿꼿한 自立 또는 自存"이라고 감탄한다. 또한 그 순간은 "잠깐, 세계의 숨통을 바짝 조이기도" 할 만큼 팽팽한 긴장의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이 맨 마지막에 발견하는 것은 팽이가 피워올린 "한 송이 고요"이다. 그 고요는 긴장이라는 감정을 속성으로 가진 것이다.

팽이치기라는 놀이에서 단순하게 추억만을 건져올리는데 그치지 않고 고요라는 한 송이 꽃을 포착해내는 시인의 시선이 놀랍다. 시인의 정신이 긴장의 끈을 놓쳤다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한 송이 고요"는 팽이 위에서 피어남과 동시에 시인의 마음속에서도 피어났던 것이다.

팽이는 돌지 않으면 쓰러진다. 그러나 돌지 않으면 쓰러진다는 것은 팽이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어린 날의 팽이 대신 일상이라는 팽이를 돌리고 있다. 이 일상이라는 팽이도 돌리지 않으면 쓰러지게 돼 있다.

우리가 돌리는 일상이라는 팽이 속엔 어떤 원심력이 작용하고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 돌리는 팽이에선 "한 송이 고요"가 피어나고 어른들이 돌리는 일상이란 팽이에선 '한 송이 맹목'이 피어난다. 때때로 내 생애의 아랫목에 자리하고 있는 맹목이라는 원심력이 나를 지치게 한다.


태그:#김선태, #팽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