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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초 옛 소련이 붕괴할 무렵 독립한 발트 3국. 빨간 선은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라트비아 리가를 거쳐 리투아니아 빌뉴스까지 600km에 걸쳐 이어지는 '발트의 길'이다.
 1990년대 초 옛 소련이 붕괴할 무렵 독립한 발트 3국. 빨간 선은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라트비아 리가를 거쳐 리투아니아 빌뉴스까지 600km에 걸쳐 이어지는 '발트의 길'이다.
ⓒ 오마이뉴스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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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라는 나라가 있다. 온통 영어 한 가지에만 미쳐 돌아가는 인수위 분들이 그런 작은 나라를 알기는 할까 모르겠다만, 17년 전 소련에서 독립해 엄연히 유럽연합의 일원이 된 작지만 아주 알찬 나라다. 어찌 보면 우리가 그냥 모르고 지나가도 특별히 문제가 없을 수 있는, 정말 별 볼일 없는 나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 나라님들이 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그 작은 나라에서도 '날 좀 보고 배우쇼' 하고 손짓을 하는 것 같아, 우리가 '비정상적인 국제화 바람'에 빠져 관심을 전혀 두지 않던 그 나라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인구가 약 260만 명에 불과한 라트비아이지만, 이들에겐 자신들만의 언어가 있다. 그 전에도 주변 국가들에게 연이어 지배당했고 옛 소련 시절엔 자국 언어가 알게 모르게 탄압받는 슬픔을 겪었지만, 지금은 자국 언어와 문자를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라트비아인 중 약 40%는 러시아 사람이다. 나라 전체를 놓고 볼 때는 40%이지만 수도 리가만 놓고 보면 그 비율이 60%에 육박해, 라트비아 현지인들은 수도에서 소수민족에 속할 노릇이다.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냉전 시절 소련의 공화국들 중 가장 발전했던 라트비아로 이주해 온 사람들로, 라트비아에서 가정을 일구고 정착해 잘 살고 있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러시아어 외에 현지어를 잘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라로서 라트비아는 언어를 마음껏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를 얻었지만, 라트비아어가 처한 존재적 위기는 사라질 줄을 모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구도 줄어드는 상황에서 자국에서마저 언어 사용이 줄면 자칫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 불가능한 상상만은 아니다.

헛바람만 든 인수위 어르신들, 라트비아란 나라 아십니까?

언어란 한 나라의 존재 자체와 연관된 아주 중요한 것임을 잘 알고 있던 라트비아 정부는 언어의 생명력과 국가경쟁력 사이에서 몇 년을 고심한 끝에 대안을 내놓았다.

라트비아 내에 존재하는 러시아 학교에서 라트비아어 사용 비율을 최대 60%로 높이기 위한 강제적인 조치를 취한 것. '교육개혁'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2004년 시작된 이 조치는 러시아 학교를 포함한 외국인 학교에서 라트비아어 사용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

궁지에 빠진 라트비아어를 구할 특단의 조치라는 점에서 현지인에겐 환영받을 만한 조치였지만, 이 조치는 초기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고 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공교롭게도 라트비아 교육개혁의 문제는 요즘 인수위 사람들이 목숨 걸고 도전하는 영어몰입교육이 낳을 풍경과 아주 비슷하다. 겉으로는 영어로 수업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영어로 된 교과서를 펼쳐놓고 한국어로 몰래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 말이다.

일단 러시아 학교 내부에선 예상했던 대로 반대가 심했다. 그동안 마음 놓고 사용했던 러시아어가 주변 언어, 2류 언어로 전락한다는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러시아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린 학생들의 경우 라트비아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텔레비전에서 라트비아어를 접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라트비아어로 대화하는 데는 거의 지장이 없었다. 아울러 라트비아어 자체에 대한 반감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추진론자들은 이 조치가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 결과는 그와 달랐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 이제 이 땅의 주인은 러시아인이 아니라 라트비아인이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 이제 이 땅의 주인은 러시아인이 아니라 라트비아인이다.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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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어 교과서 펴놓고 러시아어로 수업하기

2005년, 나는 리가의 러시아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라트비아 여교사 나탈리아를 만날 수 있었다. 나탈리아는 러시아 사람이지만, 라트비아인과 결혼해서 라트비아어 성을 사용하고 있었고 라트비아어도 현지 출신만큼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또한 옛 소련 시절 라트비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탈리아는 라트비아 정부의 교육정책을 드러내놓고 반대했으며, 그 정책에 대항해 노골적으로 러시아어로 수업을 진행했다.

물론 이는 엄연히 불법이었다. 그런데도 나탈리아가 러시아어로 수업을 진행한 까닭은 아이들이 평상시에 라트비아어를 잘 구사하면서도 수업시간에는 라트비아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고, 심지어 러시아 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들 중에서 라트비아어만으로 자유자재로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탈리아는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라트비아 내 러시아 학교들이 '교육개혁' 후 정부를 상대로 쇼를 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수업 시간에 라트비아어로 된 교과서를 펴놓기는 하지만, 교사들은 모든 설명을 러시아어로 해야 했고 아이들은 노트에 러시아어로만 필기를 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라트비아어 단어와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전문적인 단어의 괴리가 커서 아이들이 학교수업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탈리아는 설명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자 아이들은 라트비아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으면서도 정작 라트비아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했고, 러시아인들이 차별을 받는다는 생각에 라트비아어에 대한 반발감만 더 커졌다는 것.

러시아 학교에서 만난 한 학생은, 라트비아는 러시아가 커지는 것을 겁내고 있고 그 때문에 러시아어 수업을 탄압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여학생은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러시아 사람인 상황에서 특별히 라트비아어를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탈리아는 정책 수립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일반교육법이나 언어교육법 등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이들의 참여 없이 탁상공론으로 이루어진 정책이었기에 러시아 아이들에게 해만 끼쳤다는 주장이다. 라트비아어 강제 사용 조치는 자연스럽게 인권문제와도 연결되었으며, 여러 비정부기구들은 라트비아의 교육정책을 '러시아 민족을 비롯한 소수민족 탄압'이라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들의 연합집단인 슈탑(SHTAB)의 홈페이지. 슈탑은 라트비아의 대러시아 정책 반대 및 라트비아 학교에서 러시아어의 비중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들의 연합집단인 슈탑(SHTAB)의 홈페이지. 슈탑은 라트비아의 대러시아 정책 반대 및 라트비아 학교에서 러시아어의 비중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라트비아 '무리수'엔 자국어 살리기라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내가 나탈리아를 만났던 때는 6년이라는 장기적인 시각으로 만들어진 이 정책의 도입 초기였다. 문제점도 많고 비판도 적잖게 받았지만, 라트비아 현지인들의 눈으로 보면, 그들에게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고 상당한 출혈을 감수하더라도 그런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적어도 그 나라는 이미 라트비아어를 사용하는 라트비아인들이 주인이 되는 땅이 되었으니까.

이처럼 라트비아의 언어 관련 교육정책은, 사라져갈 위기에 놓일 라트비아어를 살린다는 명목이라도 있었다. 그렇지만 요즘 인수위에서 주문하는 것처럼 한국인들이 영어에 말 그대로 목을 매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방송매체에서 사용되는 자막을 보더라도 한국어의 정상적인 문법은 무시된 지 오래고 일반인 언어사용에서도 우리말이 구박당하고 있는데, 영어 광풍을 부추기는 분들이 이런 부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대책을 내놓을지 참으로 의심스럽다.

인수위의 영어 교육 관련 정책은 모든 아이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만들기 위해 학교 전체를 체육 특기 학교로 만드는 것과 같다. 나처럼 운동에 소질이 전혀 없고 취미조차 없는 사람이 그런 정책에 따라 억지로 체육을 공부해야 한다면 달리는 트럭에 뛰어들어서 인생을 하직하는 편이 훨씬 편할 것 같다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든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모든 아이를 체육특기자로 만들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북유럽, 그 중에서도 특히 핀란드가 영어교육의 천국이라 불리며 한국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그 핀란드만이 아니라 스웨덴, 노르웨이 등 그쪽 지역 국민들의 영어 실력은 정말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인들이 부러워할 만큼 대단하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나라 사람들에게 영어는 단순히 자신들이 배우는 언어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핀란드의 경우 인구 중 6%밖에 안 되는 스웨덴어 사용자들 때문에 영어뿐 아니라 스웨덴어 교육도 필수적으로 받아야한다. 그곳에는 영어만이 아니라, 모든 외국어를 공평하고 차별 없이 배울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있다.

국경이 열리고 모든 지역이 하나로 통합되는 유럽의 경우 영어만이 아니라 외국어 자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상황이 한국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된다. 그렇지만 한국의 경우 영어 이외 문화권의 국가 및 그 사회의 생활방식을 알고 배우기 위한 투자는 얼마나 하고 있는가?

사교육 방지는커녕 아이들 여럿 잡을 수도 있다

언어는 정말 선택의 문제이다. 그런 차원에서 영어몰입교육은 소질이 없는 사람조차 억지로 예능특기자로 만드는 과정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언어 교육 역시 개인의 필요나 관심에서 벗어나 있으면, 어떤 좋은 혜택을 주어도 제대로 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한국의 언어와 삶의 모습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영어 배우는 데에만 몰입하게 하는 교육을 과연 높은 분들은 최상의 방법이라 생각하시는 걸까. 현재 지구를 주름잡고 있는 강대국들이 영어 교육에만 힘써 그런 결과를 얻었다는 착각을 하고 계시는 건 아닌가. 자신들의 국어와 문화를 아름답게 발전시켜 세계화한 강국이 아니라 필리핀, 싱가포르처럼 영어만 잘 구사하는 나라가 되는 것이 정작 이 나라의 목표란 말인가.

나라살림을 잘 이끌겠다고 하는 나라님들이 나라 살림을 얼마나 황폐하게 하는지 감상해 볼 일이다.

 30일 오전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 인수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영어공교육 완성을 위한 실천방안 공청회'에서 이경숙 인수위원장이 참가자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30일 오전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 인수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영어공교육 완성을 위한 실천방안 공청회'에서 이경숙 인수위원장이 참가자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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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나는 한국어 외에 5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그냥 대충 구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국어로 통역, 번역을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자랑스러운 내 아버지는 내게 외국어를 가르치시기 위해 사교육비를 한 푼도 쓰지 않으셨다. 외국어를 써야 할 필요성과 배울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주셨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언어는 선택의 문제이다.



#영어몰입교육#라트비아#인수위#영어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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